3. 황후의 첫 아침은 황제의 집착과2021.08.12.
“기침이 늦으시는데.”
시종장 제롬은 신방 문 앞에서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황제 폐하는 해 뜨는 시각과 동시에 기침하신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자신을 부르는 신호가 없다. 평소였다면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 살폈겠지만, 오늘은 초야의 다음 날이라 그럴 수 없었다. 혹시 무슨 사고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전쟁터에서 맹위를 떨친 적국의 공주와 보낸 하룻밤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으란 확신이 없다. 문이라도 두드려 봐야 하나 제롬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막 손이 문에 닿기 직전, 안쪽에서 먼저 문이 벌컥 열렸다.
“……헉! 폐하?!”
문 사이로 드러난 키에르트의 모습에 제롬은 놀라 펄쩍 뛰었다. 어딘지 부스스하고 눈 밑이 퀭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신혼 첫날밤을 보낸 신랑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장군 같은 느낌이었다.
“폐, 폐, 폐하, 괜찮으십니까?”
밤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제롬은 가슴이 철렁해 키에르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침 식사.”
“예, 준비되어 있습니다! 들일까요?”
“그냥 내놔.”
“예? 예!”
곧 트레이를 끌고 온 시종들이 도착했다. 키에르트가 트레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하지.”
“……폐하?”
“부르기 전까지는 문도 두드리지 마. 일정 전엔 나올 거야.”
대체 신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제롬이 슬쩍 문틈을 들여다보았지만 사방에 커튼을 친 방 안은 촛불의 어두운 불빛만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문틈에서 스며 나왔다. 설마 하룻밤 새에 한 사람이 죽어 나간 건 아니겠지. 제롬의 상상력은 불안함이 더해져 극으로 치솟았다.
“서, 설마 황후 폐하께 무슨 일이……, 혹시 시체 처리가 필요하시면 불러 주십시오.”
“……뭐?”
키에르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제롬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젓다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필요하면 부르지.”
정말 이쪽이 먼저 죽여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키에르트는 독기어린 눈빛으로 방문을 닫았다.
“마지막 한 판이에요.”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시스가 똑같이 퀭한 눈으로 키에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먹고 두지.”
“먹으면서 둬요.”
승부에 관한 한 리시스는 징그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키에르트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이 벌였던 전투의 연장이 신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워 장기를 뒀다. 키에르트는 대답 대신 장기짝을 정리했다. 밤을 새워 눈이 뻑뻑해 커튼을 열 수도 없었다. 어두운 방에서 내내 장기판만 바라보고 있으니 몸에서 곰팡이가 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승패에 대한 두 사람의 불타는 집착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첫 승리는 키에르트의 것이었다. 리시스도 결과에는 승복했다. 하지만 한 번 더 승부를 걸었다. 너무 극비니 하천 쪽의 지형만 알려주겠다. 그렇게 재차 내기의 조건이 들어갔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조건의, 조건의, 조건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덩달아 승부도 끝나지 않았다. 내기가 거듭될수록 승패 자체에 열이 올랐다. 승패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밤이 깊고, 날이 밝았다. 어차피 초야의 다음 날은 두 사람 다 큰 일정이 없었다. 오후 늦게 일어나 귀족들의 인사를 받고, 저녁 만찬만 하면 끝이다. 결혼식에 지친 황제와 황후의 몸을 푹 쉬게 해 주기 위해 여유롭게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 시간을 두 사람은 승부욕으로 불태웠다. 휴식보다 승부가 더 중요했다. 승부욕에 사로잡힌 두 사람은 피곤함도 잊었다.
“……잠깐, 허리 좀 풀고요.”
하지만 아무리 튼튼해도 한 자세로 밤을 새면 쑤시고 결리다. 리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풀다가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어젯밤 베일을 쓰고 앉아서 키에르트를 기다릴 때는 가시방석처럼 불편했는데, 지금은 긴장이 풀렸는지 구름 위처럼 푹신했다.
“와, 살 것 같은데. 그냥 누워서 하면 안 될까요?”
“……그럴까.”
키에르트도 쑤시던 건 마찬가지였다. 장기판을 들고 일어나려는데, 리시스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무슨 짓이세요. 침대엔 제가 먼저 누웠잖아요. 누워서 하고 싶으시면 한 판 더 이기셔야죠.”
“아하……, 그래, 좋아.”
이런 식이었다. 다시 한번, 신방의 전투가 벌어졌다. ***
“진짜 들어가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문 밖에서는 난리가 났다. 초야를 마친 황제 부부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귀족들이 몰려들었는데 신방의 문이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키에르트가 아침을 가져간 이후로 소식이 없다. 두 사람은 점심도 걸렀다.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닌가요?”
“두 분께서 열중하시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시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신방의 본분 때문에 늦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후가 되도록 늦어지려면 뜨겁게 불타는 소리라도 새어나와야 할 텐데, 너무 조용했다. 하다못해 창문 밖에서 올려다보기까지 했는데 창문도 커튼이 쳐진 그대로였다. 귀족들도 기다리다 못해 제롬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제롬은 동동거리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폐하께서는 ‘일정 전까진 나오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미 일정이 예정된 시간이 지난 지 한참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그 앞에 말씀하신 ‘문도 두드리지 마.’는 무효가 된 것 아닐까? 그럴 것이다! 혼자 결론을 낸 제롬은 문 앞에서 헛기침을 했다. 귀족들이 기대어린 시선으로 제롬을 지켜보았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일정에 가셔야 하는 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몇 번 더 밖에서 말을 걸고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은커녕 기척조차 없었다. 이제 슬슬 조바심보다는 걱정이 커졌다. 키에르트는 잠귀가 밝은 편이었다. 밖에서 제롬이 헛기침만 해도 깨어나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제롬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덜컥 겁을 먹었다.
“폐하, 실례지만 들어가겠습니다.”
제롬은 충심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호위기사들이 덩달아 긴장하며 뒤따랐다.
“폐하……?”
방 안은 빛줄기 하나 없이 캄캄했다. 밤새 타오른 초가 명을 다 한 것인지 촛불조차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누가 신방의 분위기를 잡는답시고 기름등을 안 넣었지. 제롬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커튼을 젖혔다. 기다렸다는 듯 빛줄기가 가늘게 찔러 들어왔다.
“으응…….”
햇빛이 침대에 닿자 낮은 신음이 울렸다. 적어도 한 사람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안심하며 뒤돌던 제롬은 예상 밖의 정황에 숨이 턱 막혔다.
“……뭐야…….”
“……제롬?”
두 사람은 몽롱한 정신에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들의 몸이 어떤 상태였는지 깨달았다.
“!”
“꺄아아악!”
비명밖에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리시스의 비명에 달려 들어온 호위기사들과 귀족들은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모습에 함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침대 위에서 다정하게 얽혀 있는 황제와 황후의 두 팔, 두 다리. 칭칭 얽혀 고사리인지 사람인지 모를 모습. 그리고 흐트러진 잠옷, 사방에 엉클어진 침구들. 리시스는 반사적으로 키에르트를 밀치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키에르트의 손이 리시스의 팔과 허리를 꽉 잡아 눌렀다.
“괜찮아.”
머리 위에서 울리는 키에르트의 낮은 목소리에 리시스는 다시 한번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몸에 감긴 키에르트의 손은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강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뭣들 하는 거지.”
“소, 송구하옵니다! 비명 소리에 놀라……!”
“썩 꺼져.”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품에 안은 채 위협하듯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사람들은 들어온 속도 그대로 돌아나갔다.
“……후.”
마지막으로 제롬까지 나가는 것을 확인한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놓아주고 베개에 털썩 머리를 뉘였다. 잠결에 발휘한 최대의 순발력이었다.
“그래도 비명을 지를 것까진 아니지 않나?”
키에르트 덕분에 상황을 잘 모면하기는 했지만 리시스도 조금은 억울했다. 둘이 칭칭 감겨 자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냥 시종이 들어왔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손끝 하나 안 대신다면서요…….”
“그대가 나한테 먼저 접근했을 때에도 그래야 하나?”
키에르트가 고개를 내려 몸과 침대의 위치를 가리켰다. 리시스의 눈이 또륵 굴러갔다. 키에르트는 침대의 딱 절반, 반대쪽에 누워 있었다. 방금 전 자고 있던 모습은 리시스가 침범한 것이 맞았다.
“……큼.”
리시스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며 돌아누웠다. 침대에서 한 판, 반쯤 누워 한 판, 아예 나란히 한 판, 번갈아 눈을 감아가며 한 판, 그러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들이닥친 거예요?”
“첫날 아침문안. ……점심 이후가 되었지만.”
“……?”
리시스도 황후가 처음이라 모르는 것투성이다. 결혼 전에 이런저런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이었다. 일방적으로 우르르 쏟아낸 정보를 다 기억하는 건 무리였다.
“인사만 받으면 돼요? 인사를 왜 침실에서 받아요?”
“인사를 하고, 아침 단장을 돕겠지.”
“그걸 왜 귀족들이 해요?”
“조금이라도 더 눈에 들려고?”
“아.”
키에르트의 설명에 리시스는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차렸다. 황후라는 자리에만 앉아 있는다고 모든 권력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편이 많아야 목소리도 커진다. 귀족들 중 누가 자신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지 잘 봐 두었다가 시녀를 뽑아야 한다. 시녀는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중요한 사람이다. 리시스는 긴장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키에르트가 종을 울리자 이번에는 제대로 절차에 맞추어 노크를 하고, 허락을 구하고, 대답을 들은 뒤 제롬과 귀족들이 들어왔다.
“성혼의 완성을 경하드리옵니다. 황후 폐하의 입궁을 다시 한번 환영드리옵니다.”
형식적인 말이었지만 성혼의 ‘완성’이라는 말에 리시스는 괜히 한 번 더 뜨끔했다. 하지만 짐짓 당연한 듯 도도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고맙네.”
“고개.”
옆에서 키에르트가 힌트를 주었다.
“고개를 들어도 좋아.”
그제야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사실 갑작스럽게 결정된 황후의 얼굴이 궁금했다. 전쟁터에서 구르던 공주였으니 분명 거칠고 추하지 않을까 내심 상상하기도 했다.
“헛…….”
그러나 사람들은 리시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귀여워?!’
키에르트의 눈만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리시스는 귀여웠다. 과연, 황제 폐하께서 밤이 새도록 끼고 돌 만했다.
“그럼 아침 목욕 시중을 들겠습니다. 저쪽 방으로 가시지요.”
귀부인들이 리시스를 둘러싸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리시스는 아차 싶어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키에르트도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돌아보는 속도가 똑같았다. 몸을 씻는 걸 다른 사람 손에 맡기면 어젯밤 아무 일 없었던 것을 들키게 된다.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새어나가는 소문은 막기 어렵다.
“목욕은 우리 둘이 알아서 하도록 하지.”
이번에도 키에르트의 순발력이 빛을 발했다.
“예?! 황제 폐하께서 손수……?”
“나가.”
그럭저럭 리시스의 단 한 순간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고 싶지 않은 남자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