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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야의 굉장한 내기 (2/153)

2. 초야의 굉장한 내기20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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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353302145.png“꺄악! 죄송해요! 역시 못 하겠어요!”

그러나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손이 닿기 전, 다람쥐처럼 재빨리 달아났다. 순식간에 침대 구석까지 굴러간 리시스는 침대 기둥을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1654935330215.png“그럼, 결혼을 취소하자고?”

16549353302145.png“그건 안 돼요…….”

리시스는 기둥에 머리를 비비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택지 앞에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눈 딱 감고 초야를 치러버리고 싶지만, 정말 죽을 정도로 싫었다. 그렇다고 이 결혼이 깨져서도 안 되었다. 역시 키에르트를 죽이는 것이 유일한 답인가. 키에르트를 죽이면 결혼은 취소되겠지만 최소한 당장 전쟁이 재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은근슬쩍 촛대를 흘끔거리는 리시스의 눈빛을 눈치챈 키에르트가 엄하게 경고했다.

1654935330215.png“날 죽이려는 계획은 그만두지?”

16549353302145.png“……제가 언제요.”

리시스는 시치미를 뗐지만 키에르트도, 본인도, 아무도 속이지 못했다. 리시스는 풀죽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얌전히 초야를 받아들일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키에르트를 처치한 뒤 도망갈 수도 없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이 키에르트의 눈에도 빤히 보였다. 이래서야 밤새 이렇게 술래잡기를 할 기세다. 키에르트는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하다 하다 적국의 공주를 우쭈쭈까지 해 주게 되었다.

1654935330215.png“어쨌든 초야를 보내야 결혼이 인정되는 건 알지?”

16549353302145.png“알죠…….”

1654935330215.png“그럼 내가 최대한 안 아프게, 부드럽게 하면 어떻겠나?”

16549353302145.png“아파요?!”

1654935330215.png“…….”

괜한 말을 했다. 리시스는 처음엔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더러 있다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병아리 발바닥만큼 다가가려던 합의점이 곰 발바닥만큼 멀어졌다.

1654935330215.png“그러니까. 최대한 그대가 안 아프게 할 거라고. 멈추라면 바로 멈추고, 하지 말라면 바로 안 하고. 싫다는 건 절대 안 할게.”

16549353302145.png“지금도 이미 싫어요!”

1654935330215.png“……하, 어떻게,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이라도 할 수 없나?”

16549353302145.png“온 세상 사람이 다 죽어도 폐하만큼은 좋아질 리 없을 텐데, 그게 노력한다고 될까요?”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전쟁터의 원수 관계다. 초면인 사람보다 심리적 거리가 더 멀었다. 게다가 당연한 말이었지만 키에르트는 황제였다. 게다가 젊고, 잘생기고, 몸도 좋았으며, 머리도 명석하고, 성격도 다정하고, 여성에게 예의 바르기까지 했다. 싫다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온다는 여자는 많았지만 간다는 여자는 한 명도 없던 그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당한 거부였다. 이게 은근히 자존심을 긁었다.

16549353302145.png“……노력할게요.”

뒤늦게 리시스가 눈치를 보며 덧붙였지만 키에르트의 인내심도 이미 뚝 끊어졌다.

1654935330215.png“아니, 생각해 보니 굳이 해야 하나 싶군.”

16549353302145.png“그 말씀은……?”

1654935330215.png“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우리 둘만 했다 치기로 합의하면 되는 것 아닌가?”

16549353302145.png“그……래도 돼요?”

리시스는 눈을 크게 떴다. 초야를 치르지 않으면 나중에 결혼 무효가 될 수도 있었다.

1654935330215.png“우리 둘만 비밀을 잘 지키면 누가 알겠어? 대신 그대가 협조해 줘야 할 것이 있지.”

16549353302145.png“뭔데요?”

초야를 치르지 않아도 되면서 결혼도 유지할 수 있다니. 뭐든 협조할 수 있었다. 리시스는 기둥을 놓고 키에르트의 말을 경청했다.

1654935330215.png“남녀관계는 육체관계를 맺은 이후 분위기가 꽤 변하기도 한다더군.”

16549353302145.png“아……, 그래요?”

1654935330215.png“우리가 초야를 건너뛴 걸 들키지 않으려면 적어도 남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친밀한 모습을 보여야겠지?”

16549353302145.png“이해했어요.”

1654935330215.png“겸사겸사 로구안에 우리 사이가 견고하다는 걸 보여줄 기회도 될 테고.”

이 결혼은 휴전 협약의 확인도장이자 로구안에게 우리가 이렇게 손을 잡았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로구안을 향한 견제만 아니었어도 대충 남남으로 살아도 상관없다. 대부분의 정략결혼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로구안이 지켜보고 있다. 시작은 정략결혼이지만 이 결혼이 잘 지속되고 있으며 휴전 협약이 금방 깨질 일은 없다는 과시를 해야 했다. 키에르트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리시스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49353302145.png“열심히 할게요. 아, 그런데. 합궁도 포함이죠?”

초야 이후에도 황제 부부는 한 달에 한 번씩 합궁을 한다. 리시스는 계약조건을 철저히 따졌다.

1654935330215.png“……그래. 그대가 진심으로 날 원하게 될 때까지 손끝 하나 대지 않도록 하지.”

키에르트도 오기가 생겨 선언했다. 싫다는 여자는 본인도 싫었다. 어디, 언제까지 싫어할지 한번 지켜보고 싶었다. 평생을 같이 붙어 살아도 싫을까?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황제, 키에르트였다. 그런 키에르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시스는 속 편한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침대 가운데로 돌아왔다.

16549353302145.png“그럼……, 이제 자면 되나요?”

1654935330215.png“그대는 자.”

16549353302145.png“폐하는요?”

키에르트는 대답하지 않고 침대 곁의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침대로 들어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16549353302145.png“밤……, 새시게요?”

1654935330215.png“자는 동안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리시스는 아, 하고 깨달았다. 여차하면 키에르트를 죽이고 도망치겠다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16549353302145.png“이제 합의도 했으니까……, 제가 폐하를 죽일 일은 이제 없어요.”

1654935330215.png“그래,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키에르트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신용은 말로 쌓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홀랑 침대에 누워 혼자 자버리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눕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고민하던 리시스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16549353302145.png“그러고 가만히 앉아서 밤새시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1654935330215.png“죽는 것보단 쉽지.”

16549353302145.png“음……, 이제 같이 작전도 하기로 했으니까 끝말잇기라도 하면서 같이 밤을 새워 드릴게요. 아! 아니다. 뭔가 이것저것 놀잇감을 준비해 뒀다고 들었는데.”

신방에 들기 전, 초야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다. 형식적으로 할 것만 하고 자지 않을까, 생각해서 대충 들어 넘겼었는데 문득 떠올랐다. 황제의 혼사가 연애결혼이었던 적은 역사상 전무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육체관계를 맺어야 하는 이들의 긴장감을 풀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게 되었다 했다. 두 분도 어색하실 때 이용해 보라며 넌지시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권해주었다. 용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유용하게 쓰면 그만이다. 밤새 끝말잇기를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16549353302145.png“여기 쌓아 놓은 것들이 다 놀잇감이었나 봐요.”

리시스가 물건들을 뒤지기 시작하자 키에르트도 흥미를 보이며 쳐다보다가 다가왔다. 별의별 것들이 다 있었다.

16549353302145.png“이건 여차하면 죽이라고 둔 것이려나요?”

리시스는 물건들 사이에서 분홍색 밧줄과 채찍을 발굴해 냈다. 하필 찾아도 이런 걸! 키에르트는 기함하며 빼앗아 멀리 던져버렸다.

1654935330215.png“실수로 끼워 넣었을 거야.”

그것들 외에도 뒤져보니 이것저것 다양한 종류의 놀잇감이 꽤 있었다. 주사위 놀이라든가, 카드 같은 것들. 그러나 초야를 위한 놀잇감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16549353302145.png“뺨에 키스해주기, 눈꺼풀에 키스해주기, 입술 마주 대고 세 번 숨쉬기……?”

주사위와 카드에 적힌 규칙들을 읽던 리시스는 질겁해서 집어던졌다. 다른 놀이도구를 살펴보던 키에르트도 비슷한 표정으로 찾아낸 물건을 내려놓았다. 다 이런 식이었다. 스킨십을 유도하든가, 농도 짙은 대화를 나누게 한다든가. 초야를 생략하기로 극적 합의를 마친 두 사람이 즐기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놀이였다. 뒤지고 뒤지다 겨우 장기판을 찾아냈다. 찾아낸 순간 둘 다 너무 기뻐 이거다! 하고 환호했다. 장기판 칸마다 적힌 벌칙은 다른 것들과 비슷했지만 무시하고 둘 수 있었다.

1654935330215.png“에드린만의 규칙이 있나?”

16549353302145.png“음……, 모르겠네요. 저는 전술 구상용으로 써서.”

장기짝을 올리는 리시스는 벌써 머릿속으로 전략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기는 원래 전술 구상용 도구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보편화되면서 놀이를 위한 규칙이 정해졌고, 장기짝도 간단하게 추려졌다. 키에르트도 리시스와 마찬가지로 전술용으로 이용할 때가 많았지만 놀이용 규칙도 알았다. 귀족들도 파티에서 흔히 가지고 노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장기 규칙은 사람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다. 그때그때 바꿔가며 하기도 했다.

1654935330215.png“그럼 전술용 규칙으로 가지.”

16549353302145.png“좋아요. 그럼 이긴 사람 상은 뭘로 정할까요?”

1654935330215.png“……전술 구상용이었다며?”

내기를 제안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

16549353302145.png“걸린 게 있어야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서 전략을 뽑아내잖아요.”

1654935330215.png“에드린 군이 강한 이유가 이거였나.”

키에르트는 어이없다는 듯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리시스는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적장에게 강하다는 인정을 눈앞에서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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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353302145.png“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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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밤샘을 위해 재미로 하는 놀이다. 가벼운 조건 정도야 얼마든지 허락할 수 있다. 키에르트가 내기에 응하자 리시스는 신중하게 고민을 했다. 리시스가 너무 진지하게 조건을 고민하니 키에르트도 덩달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목을 내놓아라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여차하면 꽤 괜찮은 걸 얻어낼 수도 있는 기회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생각을 끝냈다. 그러나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또 눈치싸움이 이어졌다. 전략에서는 선점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수를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다. 평소 버릇이 어디 가지 않았다. 결국 리시스가 제안했다.

16549353302145.png“셋 세면 동시에 말할까요?”

1654935330215.png“그러지.”

키에르트도 동의했다.

16549353302145.png“네, 그럼 셀게요. 하나, 둘, 셋!”

1654935330215.png“노락 고지에서 후면을 친 건 어떻게 한 거지?”

16549353302145.png“반말.”

두 사람은 서로를 벙찐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기 조건이 튀어나왔다. 키에르트가 말한 소원은 리시스에게 참패를 당하다 못해 본인도 죽을 뻔했던 전투의 전략이었다. 이후 아무리 전략 분석을 해 보아도 에드린 군의 이동경로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 비밀을 드디어 알 수 있는 기회였다.

16549353302145.png“그걸 말씀드리면 에드린의 지형지물 특성을 고스란히 알려 드리는 건데 어떻게…….”

1654935330215.png“그러는 그대의 소원이야말로 쉬란 황실의 위계를 뒤집어 놓는 것인데.”

리시스의 소원도 나름대로 사유가 분명했다. 공주와 황제이고, 일반적인 황후가 아니라 인질에 가까운 황후였다. 이 입장 차이에 따라서 키에르트는 반말을, 리시스는 존댓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리시스가 사용한 키에르트의 호칭은 키에 놈, 황제 놈, 그 새끼, 망할 놈 등등 자유분방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존댓말과 깍듯한 ‘폐하’라는 호칭을 붙이니 영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둘 다 굉장한 것을 내기 조건으로 걸었다. 하지만 그런 것일수록 내기가 재미있어 지는 것은 사실이다.

16549353302145.png“……내기는 내기죠?”

1654935330215.png“그래, 내기는 내기지.”

마주친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상대가 뭘 걸든 이겨버리면 그만이다.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장기짝을 잡았다. 전쟁에 임하는 눈빛과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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