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수와의 첫날밤2021.08.05.
이제라도 도망칠까. 리시스는 신방의 문을 노려보며 고민했다. 화려한 꽃과 촛불, 흩날리는 레이스로 꾸며진 신방과 어울리지 않는 고민이었다. 곧 저 신방의 문으로 들어올 신랑은 쉬란의 황제, 키에르트다. 리시스의 나라인 에드린과 백 년간 전쟁을 한 적국, 쉬란의 황제. 동시에 전쟁터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가장 치열한 적이 오늘의 부부가 되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에서 칼을 맞대고 있었는데.
인생은 어디로 흐를지 아무도 모른다더니. 나라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로 알 수 없었다. 최근 남부의 로구안이 급성장을 하며 두 나라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두 나라의 싸움에 끼지도 못하던 약소국 로구안의 급변이었다. 로구안은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잡아먹으며 에드린과 쉬란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해졌다. 위기를 느낀 두 나라는 급히 휴전에 합의했다. 다만 휴전 협약으로만 끝나서는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휴전 협약의 도장처럼 국혼을 추진하게 되었다. 리시스가 에드린 왕가의 유일한 공주이고, 키에르트가 쉬란 황실의 유일한 미혼 남성인 것은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어이없이 전쟁터의 철천지원수들은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초야가 되었다. 결혼식까지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눈 뜨기가 무섭게 씻기고, 입히고, 꾸미고……. 정신없이 돌아갔다. 결혼식 절차가 다 끝난 뒤 마지막으로 리시스는 신방의 침대 한가운데에 홀로 앉혀졌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결혼을 했다는 실감이 났다.
‘어떡하지!’
리시스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쟁터에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키에르트다. 키에르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황제였다. 황제가 전쟁터에 나왔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한숨이 먼저 나올 만큼 끔찍한 상대였다. 애초에 키에르트가 이 결혼을 하겠다고 동의한 것부터 리시스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주인 리시스에겐 결혼의 선택권이 없었다. 에드린 왕이 하라면 해야 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황제였다. 거부할 수 있었다. 당연히 거부할 줄 알았다. 전쟁터에서 서로의 목을 노리던 사이인데, 결혼이라니. 말도 안 됐다. 그런데 뜻밖에도 키에르트는 결혼에 동의했다.
‘설마 이렇게 잡아놓고 죽이려는 계획?’
퍼뜩 스친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 생각을 왜 이제야 했지? 키에르트라면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리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초야 준비를 하며 머리를 다 풀어내려 꽂은 핀도 없고, 몸에 걸친 장신구도 없었다. 신방의 장식은 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것들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이 촛대, 커튼 묶는 끈 정도였다. 리시스는 전술이 뛰어났던 것이지 신체적인 조건이 남성보다 우세한 것은 아니었다. 과연 이걸로 키에르트를 잘 죽일 수 있을까? 촛대를 들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도중, 문이 달칵 열렸다. 키에르트였다.
“…….”
“…….”
뜻밖의 타이밍에 등장해버린 키에르트. 뜻밖의 모습으로 기다리던 리시스. 키에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문가에 등을 기댔다.
“……역시 암살이 계획에 있었던 모양이군.”
“아, 아니에요! 이건 호신용으로…….”
“내가 신방에서 그대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같은 생각 하셨잖아요.”
“내가 그대를 어떻게 할 작정이었으면 국경에서 이미 처리를 했겠지.”
“……아.”
키에르트의 지적에 리시스는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휴전 협약을 했어도 적국이기 때문에 리시스는 홀몸으로 쉬란에 왔다. 키에르트의 말대로 죽이려 작정을 했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리시스는 머쓱하게 촛대를 내려놓고 침대로 돌아갔다. 처음에 앉았던 것처럼 다소곳이 앉아 베일 주름까지 탁탁 폈다. 하지만 이미 차갑게 식은 분위기는 다시 데워지지 못했다.
“피로연까지 얌전하길래 무슨 꿍꿍이인가 했더니, 초야를 노렸나.”
“정말 아니에요! 제가 폐하를 진짜 암살할 생각이었으면 잠든 틈을 노렸겠지, 이렇게 촛대로 뭔가를 하려고 했겠어요?!”
“……아, 그거였군.”
키에르트의 오해는 엉뚱한 방향으로 깊어졌다. 억울해도 억울해할 수조차 없는 관계였다. 리시스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었다. 그때 키에르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리시스의 몸이 반대 방향으로 움찔 기울었다. 그걸 본 키에르트는 흥미롭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겁먹은 걸 보면 암살계획이 없던 건 맞는 것 같은데.”
“진짜 없었어요…….”
“그래, 그렇다 쳐 주지. 부디 그 베일 안에 칼을 숨기지는 않았길 바라.”
키에르트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다가오는 발소리에 리시스의 몸이 더욱 얼어붙었다. 키에르트의 말대로 당장 자신을 죽이러 오는 건 아니겠지만 초야라는 상황의 긴장감도 컸다. 치맛자락을 쥔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공주의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리시스의 맞은편에 앉은 키에르트가 베일 끝을 잡았다. 신혼 첫날밤의 의식은 신랑이 신부의 베일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제까지의 시간은 모두 덮고 처음 마주하는 두 사람의 시간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의미였다. 과연 두 사람이 서로의 과거를 덮고 처음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럴 리는 없었다.
“이제까지는 적으로, 원수로 만났지만 앞으로는 부부로 잘 지내볼 수 있으면 좋겠어, 황후.”
그런데 키에르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정말로 부부처럼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리시스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며 베일의 끝단만 응시했다. 키에르트의 손이 천천히 베일을 끌어올렸다. 리시스도 키에르트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둘 다 전쟁터에 직접 칼을 들고 나가는 일이 많지 않았고, 설령 나간다 하더라도 갑주를 두르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결혼식과 피로연 때에도 내내 베일을 쓴 채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키에르트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사르륵, 베일이 어깨 너머로 흘러내렸다. 둘 사이를 가로막던 베일이 사라졌다. 얼굴에 꽂힌 키에르트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얼굴을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없지?’
괜한 긴장감에 휩싸인 리시스는 찔끔찔끔 시선을 들었다.
“아…….”
리시스는 처음 제대로 본 키에르트의 얼굴에 흠칫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잘 생긴 편이었다. ……아니, 놀랍게 잘생겼다. 자신을 향한 보랏빛 도는 진한 회색 눈동자가 깊다. 날카로운 콧날, 단정한 입술, 부드럽게 물결치는 회보랏빛 머리카락까지. 그런데 키에르트도 놀란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그대는……, 생각보다……. ……귀엽군.”
“……예?”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키에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스로가 한 말이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키에르트의 감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리시스는 객관적으로 귀여웠다. 맑게 찰랑이는 금발, 유리알 같은 푸른 눈동자. 동그란 눈과 오밀조밀한 코, 입, 갸름한 얼굴형까지. 리시스의 생김새는 그야말로 공주님이었다.
“이런 공주님에게 내가 죽을 뻔할 때까지 몰렸었던 것이 믿기지 않는군.”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짠 작전에 휘말려 몇 번이고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건 리시스도 마찬가지였다.
“폐하도……, 그렇게 무섭게 전쟁하실 분처럼 생기진 않으셨어요.”
“다행이군. 볼 때마다 전쟁 생각이 나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
리시스의 몸 위로 타고 오르는 몸짓이 짐승처럼 날렵했다. 순식간에 시야를 뒤덮는 남자의 넓은 어깨와 가슴. 리시스는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키에르트는 건조한 손길로 리시스의 어깨와 허리를 쓸어내렸다.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리시스는 숨을 고르며 그 손길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초야를 치러내는 것은 중요한 의무다. 키에르트처럼 담담하게, 아무 생각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그러나 키에르트의 손이 치마에 닿은 순간, 리시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 그 손길을 피했다.
“자, 자자자, 잠깐!”
다가가던 키에르트의 손이 멈칫했다. 왜 막냐며 항의하는 듯한 눈빛이 리시스에게 닿았다.
“죄, 죄송해요…….”
“나라고 즐거워서 하는 건 아니야. 협조 부탁하지.”
“네, 네에…….”
이건 중요한 의무다, 잘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전쟁이 난다. 잠깐만 참으면 된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진정해 보려 했다. 그러나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긴장감이 풀어지기는커녕 급기야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키에르트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 황후. 그대가 이러면 나도 못 해.”
“……왜요?”
“왜냐니. 이렇게까지 온몸으로 거부하는 사람에게 그럴 생각이 들겠나?”
“거부 안 하는데…….”
자신은 최대한 잘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었다. 키에르트의 질책은 억울했다. 하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몸,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 뻣뻣하게 굳은 팔다리는 모두 다 거절의 신호였다. 키에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리시스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리시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움츠러들었다.
“…….”
시간이 한참 흘러도 키에르트의 손은 닿지 않았다. 그제야 리시스는 자신이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 숙연해졌다.
“몸이 생각대로 안 따라줘요…….”
리시스는 울 것 같은 눈으로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키에르트는 긴 한숨을 뽑아냈다.
“하……. 진짜 여러모로 상상을 초월하는군.”
전쟁터에서의 리시스는 언제나 상상초월의 작전으로 키에르트의 뒤통수를 때렸다. 예측을 할 수가 없는 작전들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신방에서까지 그런다. 신방에 들어서자마자 날아오는 암기, 침대에 풀어 놓은 독충, 또는 맨몸으로 죽이려 달려드는 신부까지도 예상 안에 있었다. 차라리 죽이겠다며 달려드는 몸을 내리누르는 건 할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 울먹이며 겁먹은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차라리 칼 들고 덤비는 쪽이 나았겠군.”
키에르트는 심란한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자 스치듯 한 말이었는데, 리시스는 그 말에 반짝 눈을 뜨며 반응했다.
“그래도 돼요?”
“될 리가 있겠어? 할 수는 있고?”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지금 폐하를 죽이고 도망치고 싶긴 해요…….”
키에르트는 말없이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귀여운 외모에 속아 자꾸 잊게 되는데, 저건 죽도록 싸워댔던 원수다. 사정을 봐 줄 필요는 없다. 키에르트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