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0화
470화
“그러면 우리 연아가 소지존이 되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이냐, 린린.”
북리의천의 목소리에 짙은 고뇌가 묻어났다.
천마신교의 사람들이 알았다면 엄청나게 기분 나빠할 만한 일이었다.
그곳에서는 소지존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쉬울 정도일 텐데.
그러나 린린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그렇다고 말했다.
“그건 언제 공표할 생각이냐, 린린?”
북리의천은 린린이 한 말이 신경 쓰였다.
천마의 제자가 되어 소지존이 될 아이라는 게 알려지면 목숨이 위협받을 거라는 말은 절대 그냥 지나가는 얘기처럼 휙 하고 흘릴 얘기가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바로 가르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자 하연이 토토톳 달려가 린린에게 매달렸다.
자기를 두고 가지 말라는 듯이.
하연은 이번에 갈 때 아예 자기를 데리고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독고소영도 그 사실을 눈치챘고 아련한 표정으로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의천. 우리도 산본으로 가면 어떨까? 나는 연아가 자라는 걸 옆에서 보고 싶어.”
독고소영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북리의천이 매몰차게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한 번 겪기도 어려운 일을 계속 겪어왔다.
그래서 평범한 하루를 사는 게, 그리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북리의천은 시원하게 말했고 독고소영의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하연은 어머니의 힘이 굉장히 세다는 것을 알고 존경하는 마음이 가득 생겨난 듯했다.
일단 그렇게 되자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은 그때부터 바빠졌다.
할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아진아. 연아가 누구인지 본가에도 말을 하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님. 그런데 설 루주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도 존재할 테고 그 사람들이 연아를 노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설 루주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요.”
북리의천도 그게 걱정이 되어서 물었던 거였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러면 가주에게만 말을 해 두는 것으로 하지. 그래도 가주는 우리가 갑자기 산본으로 가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싶을 테니 말이다.”
“예, 스승님.”
“그래. 그러면 두 사람이 연아를 좀 보고 있거라. 가자. 소영.”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이 나가고 하연은 자기 세상이 된 듯 린린의 주위를 오갔다.
“나는 설 루주의 의지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그리고 정말 좋다. 설 루주가 돌아와서.”
린린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인정이 돌아온 게 왜 그렇게 좋다는 건지 알 수 있어서였다.
“설인정. 본좌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작금의 천마신교는 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힘을 숭상하는 곳이라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강한 자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은 본좌의 뜻이기도 하고 말이다. 너를 강하게 해주겠지만 스스로 강해지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지킬 수 없는 동안에는 너를 지켜주겠지만 그 후에는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린린이 말하는 동안 하연은 얌전히 그 말을 들었다.
“서악이랑 같이 수련을 하면 되겠군. 이제는 서악이가 핑계를 대지도 못하겠어. 자기보다 더 어린 연아가 수련하는 걸 보면.”
아진이 말하고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웃었다.
수련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건 하연이 잘 때마다 내공을 조금씩 불어넣어 주는 정도일 터였다.
그러나 하연이 설인정의 환생이라는 것을 생각하자면 도중에 수련의 일정은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을 듯했다.
* * *
사련의 비무대회가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산본의가에 돌아온 후에도 오지 않던 아진과 린린이 돌아왔다.
그러나 산본의가에 온 사람이 그들만이 아니었다.
북리의천 가족이 함께 온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두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놀라며 다가왔다.
북리의천이 왔다는 말에 가주 서종욱이 급하게 나왔다.
“형님. 형수님.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던 가주의 눈에 그들이 끌고 온 마차가 보였다.
아기가 있어서 마차를 타고 왔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함께 온 짐마차가 왠지 희한하게 보였다.
가주가 이상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북리의천이 웃었다.
“이제 여기에서 지낼 것이네. 동생.”
“예?”
“왜 그러나. 싫은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야 당연히 좋지요. 한번 찾아뵙고 싶어도 의가의 일 때문에 가지도 못하고 얼마나 그리웠는데요.”
아진은 스승의 가족을 모셔오길 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아버지는 스승님과 함께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이 풀리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선문주와도 우정이 깊어지고 의지가 되는 듯하지만 일단 스승님이 오시면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함께 해 온 시간과 사건들이 있으니 그것은 제선문주가 서운하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말씀도 없이 어찌 오셨습니까, 형님. 저야 당연히 좋지만 혹시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그것은 아니네. 자세한 얘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지.”
“예. 형님. 제가 너무 오래 밖에 서 계시게 했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형수님도 어서 드시지요. 내자도 곧 올 것입니다. 벽 총관과 함께 새로 일을 시작했는데 아주 반응이 좋습니다.”
아마 이제부터 스승님과 린린이 하연의 일을 설명할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슬그머니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린린도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야. 린린. 아버지께는 설명을 드려야지.”
“내가 안 해도 돼.”
그거야말로 딱 린린답다고 생각하며 아진이 린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산본무관에 같이 가 보겠냐고 물었다.
“좋아.”
둘이서 함께 가는 동안 도종이 달려왔다.
“야. 너희 나만 따돌리고 다니는 거냐?”
그러면서 그가 아진의 팔을 잡아 자기 어깨에 올리고 같이 걸었다.
“어디 가?”
“우리? 산본무관.”
“야. 너희 그거 들었냐? 총관님이 화살 다 파셨어.”
“……어?”
도종의 말에 아진이 깜짝 놀라며 그를 보았다.
그게 한두 개가 아닌데 어디에다 다 판 건가 해서 봤더니 북궁세가에 가서 북궁가주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였어. 아진이 너한테 말을 하면 되겠지만 네가 본가의 일로 황상께 말씀을 드리는 건 좀 그렇잖아. 그래서 총관님이 북궁세가로 가셨나 보더라고. 그리고 가주님에게 사정을 말하니까 흔쾌히 수락했대. 황군은 안 그래도 화살이 많이 필요하잖아. 그러니까 좋았겠지. 필요한 화살을 사면서 우리한테 빚졌던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듣고 보니 생각을 잘 한 것 같았다.
구문제독인 북궁세가주라면 가운데에서 다리를 놔주는 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세가주님이 화살을 소개해주고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고 좋아하시더라고.”
“그런데 그 많은 걸 정말 다 파신 거래?”
“응. 괴수의 깃가지로 만든 건 안 팔았고. 그건 안 팔기로 한 거잖아. 맞지?”
도종의 말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오라버니. 그 미공략 던전이라는 거. 다음에 또 나오면 그때는 사람들을 많이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지? 그 괴수를 보니까 웬만한 공격은 안 들어갈 것 같았거든. 검강을 날려야 겨우 먹히는 정도인 걸 보면 괴수랑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도 있어.”
린린이 말하자 아진은 잊고 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괴수 부산물로 만든 건 그때 괴수랑 싸울 사람들한테 지급해야겠어.”
“그게 여기에도 많이 생길 수 있을까?”
도종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고 아진은 확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마냥 불안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질 거야. 형님. 청수가 우리를 지키겠다고 마음먹고 있더라고. 아직 어린데도.”
아진이 그 말을 했을 때 제일조가 하늘을 날아갔고 흑주와 독각화망이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날아다녔다.
“저 녀석들도 도움이 될 거고. 그림자 용도 우리 편인 것 같고.”
“그래. 확실히 그건 아진이 너의 능력인 것 같아. 사련도 너를 돕고 싶어 하잖아. 아진이 너는 어려서부터 그랬던 것 같아. 사람들에게 네 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들지.”
린린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본무관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여러 이야기를 했다.
도종은 린린이 하연을 제자로 받을 거라는 말을 들으면서 여러 생각이 드는 듯했다.
아진은 일찍부터 제자를 받았지만 제자를 들인다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아닐까 하면서 도종은 린린을 축하해주었다.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린린. 그리고 나는 네가 제자를 들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는 게 좋은 것 같아. 이번 삶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지난번에는 누군가를 제자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안 한 거잖아. 그렇지?”
“그렇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그렇지. 나 한 사람 사는 것도 벅차고 귀찮아 죽을 뻔했는데 제자는 무슨. 재미도 없었고.”
도종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야. 이 세상의 진짜 영웅은 나인 것 같아. 잘 생각해 봐라. 내가 어려서부터 너희를 잘 키워와서 너희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자라게 된 거야. 아닌 것 같아?”
당연히 아닌 것 같았지만 이 어린 형님이 오랜만에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아진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린린도 동참했고 도종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았다.
이 녀석들이 원래 이렇게 순순히 수긍할 인간들이 아닌데 뭔가 이상하고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린린은 그 생각을 진지하게 한 것 같았다.
“큰 오라버니 말이 맞는 것 같아. 지난 세상은 나에게 그런 의미가 없었거든. 제자에게 물려주고 싶은 생각 같은 게 없었어. 그런데 이번에는 물려주고 싶어.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서 그 세상을 소지존에게 물려주고 싶어. 그러고 싶어졌어.”
“그렇지? 환생하기를 잘한 거지?”
도종이 흐뭇하게 물었고 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 진짜. 나는 정말 너무 대단한 것 같아. 남동생은 헌터였고 여동생은 천마였고.”
아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도종은 정말 대단했다.
그런 두 사람과 살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은 것도 그랬고 끝까지 두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된 것도 그랬다.
“형님에게 항상 고마워.”
아진이 말하자 도종이 피식 웃더니 아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럼 잘 다녀와라. 나는 돌아가서 진료 봐야 해. 며칠 빠졌다고 하기 싫어서 큰일이네.”
손을 흔들고 그와 헤어진 후 산본무관에 가자, 엄청난 불길이 치솟고 폭음이 들리며 땅이 진저리를 쳐댔다.
전각 위로 인영 하나가 솟구쳤다가 사라지고 그 뒤를 몇 사람이 따라왔다.
불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 다시 솟구쳤고 폭음이 들리는 반경은 상상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다.
아진과 린린이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강풍이 몰아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치고 옷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앗, 공자님!”
바람이 멈추고 청수와 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법을 펼쳐 그들을 쫓아온 섬풍대 역시 멈추며 아진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오셨네요?”
아진은 이 녀석들이 도대체 언제 이렇게 성장했나 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얼마나 열성적으로 훈련을 한 건지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가슴이 크게 오르락거리면서 거친 숨이 쏟아져 나왔지만 아이들의 얼굴은 마냥 밝았다.
‘언젠가는 저희가 산본의가를 지켜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희가 어렸을 때 지켜주셨으니까 이제는 저희가 지켜드리는 게 맞죠.’
그렇게 말하던 청수는, 그리고 섬풍대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몸을 아끼지 않는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한없이 고마워졌다.
“너희.”
아이들은 자기들이 잘한 것을 알고 있는 듯 퍽 자랑스러운 얼굴로 아진의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 느려서 괴수는 어떻게 피하려고 그러냐? 며칠 쉬더니 몸이 굳은 것 같아. 훈련 시작할 준비는 된 거지?”
아이들은 그보다 더 반가운 말은 없다는 듯 해처럼 웃었다.
린린은 정말 이해 안 되는 녀석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아진은 섬풍대의 아이들과 함께 산본무관으로 사라졌다.
“아니. 뭘 굳이 뛰어? 귀찮게.”
그러나 결국 린린의 신형도 그곳에서 사라졌다.
산본무관의 전각 위로 천공의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
<2부 완결>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