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2화
462화
소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아진은 비무대회 준비를 위해 사련으로 향했다.
갑자기 비무대회의 내용을 바꿔놓고 그들에게만 알아서 하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한 손 거들어주려고 한 거였는데 사련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막막해하던 참이라 아진을 열렬히 환영했다.
아진은 황상을 알현하고 온 얘기를 해주며 황상께서도 수적 토벌을 반기셨고 상품도 준비하실 거라고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사련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감격했다.
아진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는데 늦게 온 사람들이 먼저 와 있던 사람들에게 얘기를 듣고 뒤늦게 놀라 그 분위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혹시 비무대회는 어떻게 진행하기로 하셨는지요? 어느 정도 대략적으로나마 일정이 나왔는지 궁금해서 와 봤습니다.”
아진이 말하자 련주를 비롯한 지휘부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 미리 준비를 해 두고 있다가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사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형국이었는데 그러던 차에 아진이 와 주어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련주가 그런 사정을 말하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진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해주었다.
최근에 자주 출몰하며 사람들을 잔악하게 죽이는 수적단을 추려 그들의 본거지를 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에 사련의 지휘부는 모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수적단 중 가장 세력이 큰 곳은 함부로 볼 수가 없는데 아진이 너무 간단히 생각하는 건 아닌가 했다.
“우리는 육지에서 싸우는 것이 좋지만 그자들은 싸움을 그런 식으로 끌어가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육지에서 싸운다고 해도 몇 사람은 배를 타고 물로 도망갈 것이고 그자들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면 우리도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그때부터 전세가 역전될 겁니다. 일단 물 위로 나가면 그자들은 정말 신출귀몰해서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조사는 많이 해둔 듯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그 말이 맞을 겁니다. 그들은 배도 잘 몰고 흔들리는 배 위에 있으면서도 땅에 있는 것만큼이나 편안하게 굴 테니 말입니다.”
균형도 못 잡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다시피 한 사람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아진은 그들을 설득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래도 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찾아준 이유는 오래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원망이 생기게 하기도 한다.
“별수 없군요. 어려우니 더더욱 우리가 해야겠지요. 우리가 막아서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은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요.”
“혼자도 아니고 이번에는 같이 싸울 사람들도 있으니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황상께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신다고 하니까 더 기회가 좋지요.”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하려고 할 테고 이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사정마가 다 같이 힘을 합치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지요.”
곳곳에서 그런 말이 나왔고 사람들마다 용기를 냈다.
아진은 그때를 기다렸다가 추연월과 함께 세운 계획을 말해주었다.
북천의 군사 연월랑이었던 추연월은 수적을 소탕할 계책을 꺼내놓았는데 잘만 하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 그것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 있는 분들 외에는 절대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만약 이 내용이 새어나간다면 다음부터는 공유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두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어도 좋습니다. 공자님.”
련주가 말하자 아진도 웃으며 그렇게 믿는다고 했다.
간자가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적을 이루려고 수십 년 동안 숨어서 다른 사람의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누가 함부로 장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진은 우선 그 정도로 말을 해 두고 산본의가로 돌아갔다.
괴수의 사체는 완전히 분리되었고 내단은 제선문주와 역천마의가 나눠 가졌다고 했다.
린린은 제선문주가 역천마의에게 많이 쥐여 주고 보냈다면서 흐뭇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 좋았어?”
“무슨 소리야? 역천마의에게 준 건데 내가 왜 좋아?”
“웃지나 말고 거짓말을 해라.”
“아니라고 해도 그러네.”
철방에서는 이미 여러 개의 창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고 벽예월은 수천 개의 화살을 만들어 금방이라도 상단 마차에 실어 나를 준비를 끝내두고 있었다.
당연히 괴수의 깃가지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벽예월은 그냥 평범한 화살이라고 했다.
아직은 그렇게 좋은 것을 팔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우선은 판로와 수요를 알아보려 한다는 말에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의 깃가지로 만든 화살이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이것에도 만족할 테니까요.”
벽예월은 의미심장하게 말했고 아진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본무관에서는 착착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고 아진도 다시 영물들과 수련을 시작했다.
독각화망은 랑랑의 수련 때문에 바빠서 오지 못했고 제일조는 린린이 빌려갔는데 그림자 용만 있어도 수련에 도움을 받았다.
이제 그림자 용은 흑주의 안에서 훨씬 자유롭게 빠져나왔고 흑주는 어느새 엄마처럼 그림자 용을 챙겼다.
처음부터 그림자 용이 흑주의 안에 갇힌 것이 아니었기에 꼭 흑주의 안으로 들어가고서야 이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흑주는 자기가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이 그림자 용을 기다렸고 그림자 용 역시 그게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창 수련을 하는데 멀리서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그러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지는 않고 얌전히 잦아드는 것을 보고 린린이 수련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 번 더 소리가 나서 그때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신법을 펼쳐 날아갔다.
“…….”
“…….”
그 자리에는 역시나 린린이 있었다.
린린이 있던 곳은 야산이었는데 야산이 떡처럼 썰려나가고 그 아래가 움푹하게 들어가더니 물이 고여 있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래도 운치 있고 괜찮은 것 같지 않아? 이쯤에 호수 하나 있으면 좋지.”
“말이나 못 하면.”
그러다가 갑자기 아진은 전에 자기가 만들었던 호수가 떠올랐다.
만들어놓고 가보지는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호수를 일부러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었고 지금 린린이 이런 것처럼 그때 새 무공을 수련하다가 만들어진 거였다.
“……왜?”
아진이 가만히 있자 린린은 아진이 화가 났나 했는지 소심하게 물었다.
“응? 아니. 전에 나도 호수 하나 만들어놨던 게 생각나서. 그건 잘 있는지 생각했어.”
“난 또.”
“왜? 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니. 화났나 했지.”
“내가 화낼 이유가 뭐가 있는데?”
“그러니까 하는 말이잖아. 화낼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러고 있으니까 또 왜 이러나 해서.”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아진이 웃었다.
“수련 잘 해라.”
“어디 가려고?”
“호수 잘 있는지 가 보려고.”
린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따라나섰다.
“너는 왜 따라와?”
가볍게 신법을 펼치며 아진이 묻자 린린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누구 호수가 더 큰지 보려고 그러지.”
“린린. 너는 아무리 그래도 이 오라버니를 못 당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아. 오라버니는 너랑 격이 다른 존재야. 하늘 위의 하늘. 그게 이 오라버니야.”
아진이 잔뜩 뻐기듯이 말했지만 린린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원래 자기가 이런 소리를 하면 정말 재수 없다는 듯이 노려봐야 정상인데 린린이 그러니까 왠지 먹은 게 제대로 안 내려가고 턱 얹힌 것처럼 불편했다.
린린도 아진이 그런 기분을 느낄 거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런 거였지만 아진이 그것을 알 리는 없었다.
“왜 그러냐. 린린? 이제 드디어 인정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거야?”
“응. 그렇지. 나 같은 건 감히 오라버니를 올려다볼 수도 없는데 이렇게 가끔씩 말이라도 걸어주고 상대도 해 주고 해서 정말 고마워.”
아진은 린린이 자기에게 한 방 먹이려고 이런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기가 천하제일인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얼굴로 말하는 린린을 보면서 아진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야? 언제 이렇게 작아졌지?”
아진은 그사이에 자신의 호수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했다.
이제는 호수라고도 못 하겠고 연못이라고 하면 대충 맞을 듯했다.
“아아. 맞다. 여기가 비무 장소로 그렇게 각광 받던데. 사람들이 여기 와서 비무하다가 이렇게 만들어놨나 보네. 그런데 이것도 귀여운데? 작고 운치 있고.”
린린의 말을 들으며 아진은 한숨을 쉬었다.
“호수일 때 정말 멋있었는데.”
“여기도 좋잖아. 이 나무는 여기에 이렇게 날아와 박혀서 살아난 거야? 신기하네.”
린린은 연못 주위에서 자라는 나무를 보며 말했다.
“물은 시원하네.”
신발을 벗고 발을 담근 아진이 말하자 린린은 그를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정말 시원해. 너도 들어와 볼래?”
“아니. 싫어.”
“그럼 업어줄까?”
린린은 어떻게 할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러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저 인간을 믿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드는 얼굴.
아진은 린린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지나가는지 훤히 다 알겠다고 느꼈다.
“됐다. 그냥 거기에 있어.”
“아니야. 업고 가 봐.”
“웃기고 있네. 야, 인마. 오라버니, 제발 한 번만 업고 가 주세요. 그렇게 말해도 해 줄까 말깐데.”
“제발 한 번만 업고 가 주세요.”
아진은 진정성이 없다며 무시해줄까 하다가 이것도 재미있기는 할 것 같아서 다시 돌아가 린린을 업어주었다.
두 사람 모두 수면 위를 그냥 차고 걸어갈 수 있는 무공이 가능하면서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짓을 하는 게 운치도 있고 그렇지 않던가.
아진은 린린을 업고 가면서 정말 평화로운 한때라고 생각했다.
산새 소리도 들리고 나비 몇 마리가 낮게 날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그렇고 짙게 풍기는 꽃내음도 그렇고.
“내가 너 어렸을 때 정말 많이 업어줬는데 기억은 나냐?”
“아니. 안 나는데?”
“왜 안 나? 내가 너한테 내 얘기 해 준 것도 다 기억난다고 했잖아. 내가 헌터였다는 얘기해 준 거. 그건 정말 어렸을 땐데. 갓 태어나고 며칠 안 됐을 때 말한 거였을걸?”
“그래도 업어준 건 기억 안 나.”
이 인간이랑 말을 해서 뭘 하겠나 하면서 린린을 한 번 추어올렸다.
“으우. 무거워!”
“검 때문에 그래. 곤오철이잖아. 곤오철.”
린린은 타격감을 전혀 느끼지 않은 채 가볍게 넘어갔다.
“야 인마. 업힐 거면 검은 빼놓고 와야지.”
“검객이 검을 빼놓는 게 말이 돼?”
아진도 정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어떻게라도 린린을 말로 한번 이겨보고 싶어서 그런 거였는데 어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