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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57화 (457/470)

제457화

457화

아진은 자기가 뭘 보고 있는 건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흑주의 밖으로 검은 그림자가 흘러내리듯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흑주와 이어져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 용이 왜 그림자 용인지, 녀석의 움직임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몸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단지 보이지 않는 것뿐이고 결코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여기쯤 오겠다 싶은 곳을 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신기한데?’

마침내 그림자 용이 다 나오자 흑주는 신기한 듯 잽싸게 그림자 용에게 다가갔다.

흑주만 그런 것도 아니고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제일조와 독각화망까지 그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걸 본 아진은 자기에게 그동안 별별 녀석들이 다 모여들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러다가 그 녀석들 각각의 능력이 결코 함부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고 감탄했다.

“얘들아. 너희만 같이 있어도 나는 무적이겠다.”

독각화망은 랑랑의 것이라 자기가 넘볼 수는 없겠지만 꼭 필요한 일이 있으면 빌려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서로 그렇게 막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만하면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었는데 모두 흑주를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는 분위기였다.

제일조는 흑주가 데려왔으니 말할 것도 없고 그림자 용도 그렇고 독각화망도 뭐.

‘신기하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거네.’

가히 영물이라 할 만한 것들을 하나도 아니고 넷씩이나 얻었으니.

“그럼 너희는 너희끼리 놀고 있어. 나는 연습 좀 할게.”

아진은 자기가 그곳에 왔던 이유를 잊지 않고 사인걸이 했던 이기어검과 심검을 떠올렸다.

이기어검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도했고 자기가 왜 그동안 그것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잘하는데. 이 정도면 나 진짜 재능 있는 거 아닌가?’

흑주는 다른 녀석들과 놀다가 와서 아진을 구경했다.

이어서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 아진의 옆으로 왔고 검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신기해하는 듯했다.

아진이 진검을 회수하고 주위에 있던 나무 막대기로 이기어검을 해서 각각의 자리에 있는 녀석들에게 막대기를 날리자 녀석들은 신이 났다.

독각화망도, 그림자 용도, 흑주와 제일조도 신이 나서 그때마다 막대기를 몸으로 때렸다.

잘하면 그런 식으로 훈련을 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진은 계속 술법을 펼쳤고 아진의 영물들은 그때마다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노는 것에는 정말 성심을 다하는 녀석들이었다.

그림자 용은 자기에게 날아간 막대기를 칭칭 휘감았다.

아진은 막대기를 다시 회수하기 위해 힘을 쏟았고 결국 그것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그림자 용이 승부욕이 돋았는지 계속 건들거리며 덤볐고 이번에는 제일조가 막대기를 콱 물고 날아올랐다.

그것도 다시 빼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참 끙끙거리다가 되돌려오는 데 성공하고 아진은 땀을 뻘뻘 흘렸다.

‘쉽지 않은데?’

확실히 재미가 있었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흑주는 그냥 동그란 모양이다 보니 다른 녀석들처럼 하지는 못하고 제 몸으로 땅땅 때리며 막대기를 날려 아진과 주고받았다.

아진은 몇 번 이기어검을 하다가 심검을 날리는 시도를 했다.

아진의 영물들은 막대기가 날아올 때까지만 해도 신이 나서 그것을 막기도 하고 쫓아가기도 하더니 갑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 날아와서 때리자 갸웃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날아와서 뭐가 때리고 도망가자 결국 다들 성질이 나는 듯했다.

아진은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더 했고 영물들은 이리저리 피했다.

“피하기만 하면 안 되는 거지. 너희도 심검을 사용하는 사람을 마주칠 수 있으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방법을 찾아봐. 사인걸은 심검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그 사인걸이 죽었지. 누군가에게 꼼짝도 못 하고 죽은 거야. 그 사람이면 사인걸보다 훨씬 더 심검을 잘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자리에 있는 영물들은 아진의 말을 알아듣고 잇따르는 공격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물들은 조금씩 능숙해졌고 아진은 심검의 개수를 두 개로 늘렸다.

그렇게 하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어서 아진은 그곳에서 반 시진 정도 수련을 하고 멈추며 자리에 앉았다.

그림자 용은 흑주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고 아진은 그 흑주를 들고 쓰다듬었다.

독각화망이 아진의 옆에 와서 친한 척을 하자 아진이 그런 독각화망을 보며 웃었다.

이제는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없이 고맙고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게 영물들 사이에서 쉬다가 아진이 갑자기 탄성을 냈다.

“아! 사인걸이 누구인지 이제 생각났네.”

그는 처음에 사인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전에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해서 왜 그러는 건가 했더니 분명히 그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이 아닌, 헌터로 전에 살던 세계에서 사인걸과 같이 레이드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과시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했다.

꼭 필요한 게 아니어도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시험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하기도 하고 몇몇은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장비와 무기를 챙기던 것이 떠올랐다.

“양아치였네.”

아진이 사인걸에 대한 얘기를 하는 동안 영물들은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친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던 것 같아.”

아진은 조금 더 그곳에 머물다가 산본의가로 내려갔다.

영물들은 다시 자기들의 자리로 돌아갔고 흑주는 제 안에 그림자 용을 품은 채 쌩하니 날아갔다.

사인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아진은 사인걸을 통해서 얻은 게 많았다.

사인걸이 그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하면서 아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련만 봐도 한 번 안 좋은 인연이었다고 그 인연이 끝까지 그러는 것도 아닌데 어찌 된 게 사인걸과는 끝까지 그렇게 되었다.

* * *

내당으로 향하는데 벽예월이 급하게 부르고 다가왔다.

“공자님.”

“아. 총관님.”

그렇지 않아도 벽예월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었기에 아진은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안 바쁘세요?”

“예. 바빠도 총관님이 부르시면 시간을 내야죠.”

“다행이에요. 계속 바쁘신 것 같아서 기다렸어요.”

아진은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사인걸에 대한 얘기일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방식으로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도록 기다리기로 했다.

“제가 왜 그걸 못 봤을까요, 공자님.”

벽예월은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계속 걱정이 되었던 듯했다.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총관님이 보지 못하셨지만 거기에 맞춰서 또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게 우리 모두를 훈련시키는 과정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때는 이 사람이 활약하지 못하게 하고 어떤 때는 갑자기 도울 수 있는 동료를 만나게 해 주기도 하죠. 저도 이번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또다시 돌아온 것 같더군요.”

“그럼 저도 그렇게 될까요?”

“하늘을 보고 계십니까?”

아진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뭔가를 보고 계신가요?”

“네. 특별한 건 없어요. 그런데 전에도 그랬다가 사인걸이 나타나고 문제를 일으켜서 이제는 그걸 봐도 전처럼 안심할 수가 없게 됐어요.”

아진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벽예월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그 사실 자체도 정보가 되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추연월에게 거짓 정보를 들어 더 이상 언령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사인걸과도 비슷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진은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총관님. 이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라도 대화를 하는 동안 누군가 우연히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죠.”

그러면서 추연월이 사인걸에게 언령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을 얘기하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는 아마 그 후로 언령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에게는 그것을 사용할 힘이 여전히 있는데도 그랬을 거라는 거군요.”

“예. 그것을 사용하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쓸 수가 없었겠죠.”

벽예월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한 상황인 건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는 아직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는 상황인 거고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자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게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결정을 내리는 게 어렵겠지만 벽예월은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저라면 믿어보겠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후련하다는 듯이 웃었다.

“역시 공자님에게 와보길 잘했네요.”

“총관님도 그렇게 하실 생각인가요?”

“네. 더 이상 고민하는 것도 귀찮고요.”

아진은 새삼 벽예월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고 대단한 사명감을 가진 채 지켜주려고 하는 것이 고마웠던 것이다.

“참. 공자님. 사련의 비무대회에 맞춰서 상단을 꾸려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머니께서 또 시작을 하신 모양이군요.”

“아니에요. 제가 해 보려고요. 기회를 봐서 사련이 있는 곳에 분타를 하나 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요. 사련이 그동안 기회를 노리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성장은 거두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이번 비무대회를 기점으로 커질 것 같아서요.”

“분타주로 가시려고요? 그럼 안 되는데요?”

그러자 벽예월이 유쾌하게 웃었다.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총관님이 하신다면 당연히 잘될 겁니다. 필요한 예산이 있거나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말만 해 주세요.”

“아니에요. 도전을 해 보고 싶은 거라서 혼자서 해 보고 싶어요. 아…… 산본의가 분타라고 하면 어차피 정상에서 시작하는 게 되려나요? 그냥 그런 거 없이 해볼까?”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는 거였지만 해보고 싶다면 아진은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하면 멀리서라도 응원은 해 줄 생각이었다.

“지켜보는 건 괜찮죠?”

“그것까지 하지 말라고는 못 하죠.”

환하게 웃는 벽예월에게 아진이 말했다.

“항상 감사합니다. 총관님.”

그러자 벽예월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요. 공자님. 공자님이 저에게는 그런 말씀을 안 하셔서 그게 참 뿌듯했어요. 가까운 사람들은 그런 말 안 하잖아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저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 안 하는 거 좋고요. 그분들이 고맙다는 걸 모르고 고마운 마음을 안 가져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러네요. 고맙다고 말한 거 취소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고맙다고 안 할게요.”

아진의 말에 벽예월의 웃음이 더 환해졌다.

벽예월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진은 더욱 고마웠다.

그래도 그 말을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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