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화
452화
앞으로 나선 하월의 검막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팔다리를 잃는 사람이 서너 명은 나왔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검막을 펼친 하월의 몸이 앞으로 기울면서 한 움큼 진한 핏물이 토해졌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공을 급격히 끌어 쓴 탓이었다.
사인걸은 그들을 해치우고 추연월을 쓰러뜨리려고 하다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점점 열에 받쳤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다가 그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몸을 날렸고 산본의가에 있던 일반인을 향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무인들은 이제 그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야 했고 그는 그 틈을 노려 추연월에게 향했다.
추연월과 함께 있던 서악은 소청이 데리고 사라졌고 추연월은 혼자 남았다.
“순순히 죽어라.”
사인걸이 말하고 검을 들다가 소리 없이 날아온 염화에 깜짝 놀라며 몸을 띄웠다.
청수가 염화를 날리고 추연월의 옆으로 달려갔다.
사인걸은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끝도 없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필요가 없는 거다. 죽지만 않으면 돼. 죽지만 않으면 언령의 힘을 얻을 테고 그러면 언령으로 내 몸을 낫게 하면 돼. 다치는 걸 무서워하지 말자. 추연월만 죽이면 된다.’
일단 그 생각이 들자 사인걸은 확신이 생겼다.
청수는 사인걸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사인걸은 확실히 달라졌다.
청수는 다시 염화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위협만 해도 사인걸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인걸은 염화가 날아와도 멈추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추연월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깜짝 놀란 청수가 염화를 날렸지만 사인걸은 그것을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직 추연월만을 노리며, 추연월을 죽이는 것만이 궁극의 목표인 것처럼 달려왔다.
워낙 빨라서 불길이 제대로 붙지도 않았다.
청수는 추연월을 자신의 몸으로 막으려 했다.
그러나 추연월도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도 한때 헌터였던 사람.
가녀린 체구였을 때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던 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무공을 익히는 것은 영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싸우는 법을 완전히 잊은 것도 아니었다.
사인걸은 그런 추연월의 저항을 가소롭다는 듯이 보았다.
추연월의 눈앞에 다시 상태창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사인걸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당신을 죽이면 사인걸은 영원히 언령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언령을 사용하는 사인걸은 모두를 죽일 수 있습니다.]
[서도진을 죽여 언령의 힘을 얻겠습니까?]
추연월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인걸은 갑자기 웃는 추연월을 보며 그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 해. 이 미친 새X야. 사인걸에게 언령을 준 것도 너일 텐데 이제 와서 나한테 사인걸을 막으라고? 왜? 내가 세상을 구하고 싶을 것 같아서? 네 말을 들을 정도로 멍청한 놈은 사인걸뿐인 것 같으니까 마음대로 해. 사인걸은 네가 하는 말을 믿는 것 같은데 너희만 남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봐.”
사인걸은 추연월이 하는 말을 듣고 설마 하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상태창을 봤다는 것인가.
헌터였던 그가 이곳에 온 걸 보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추연월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사인걸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추연월이 웃으며 말했다.
“사인걸. 상태창이 나타났지? 너한테 언령의 힘을 준 거고. 줬다가 뺏었나? 그래서 지금은 영원한 언령을 얻으려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고? 그런데 어쩌지? 상태창이 그거 거짓말이라는데? 네가 언령을 발하는 순간 너는 죽을 거라는데? 어디 한 번 해봐. 내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확인하면 되잖아. 어. 상태창이 또 보이는데?”
추연월은 뭔가를 집중해 보는 것처럼 허공을 노려보았다.
상태창을 보곤 하는 사인걸은 그가 상태창을 본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야. 나한테 이런 협박 해 봐야 안 통한다니까? 네가 나한테 알려주는 건 나도 사인걸한테 알려줄 거야. 나는 네 편이 아니니까 이런 거 알려 주지 마. 어떻게 된 상태창이 이간질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사인걸. 나를 죽이면 네가 영원히 언령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줄 알았어? 이거 되게 멍청하네.”
사인걸은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곳곳에서 검객들이 검을 들고 다가왔고 사인걸은 추연월을 데리고 도망치려 했다.
낌새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추연월의 앞을 막아섰고 사인걸은 잇새로 신음을 흘렸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네놈이 강한 건 알겠다만 여기에는 너 같은 놈이 넘쳐나.”
서도진의 목소리였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지 않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사인걸은 짜증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추연월을 노리다가는 자신의 목숨도 장담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솟구쳤지만 사인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사인걸이 격체전력으로 많은 이들에게서 내공을 흡수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눈앞에 펼쳐진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는 듯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진은 사인걸을 쫓아가지 않았다.
사인걸이 스스로 떠나준다면 고맙게 여길 따름이었다.
그는 린린의 빈자리를 크게 느꼈고 사인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제 린린을 데리러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추연월에게 돌아간 아진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상태창은 진짜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그는 상태창에 나왔던 말을 알려주었다.
“사인걸한테 한 말은 뭐예요? 사인걸이 다시 언령을 사용하면 사인걸은 죽는 거예요?”
그러자 추연월이 웃고 아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거짓말입니다.]
[……네?]
아진은 왜 추연월이 갑자기 그것을 전음으로 보내는 건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군사님. 설마…….]
[네. 저 북천의 군사였던 사람입니다. 머리 하나 가지고 살아남은 사람인데 그 정도가 어렵겠어요?]
[군사님. 정말 대단한데요?]
아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순간적인 기지로 사인걸이 언령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게 아닌가.
상태창은 괜히 추연월을 유혹해 보려고 했다가 사인걸의 신뢰만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와. 정말 쌤통인데요?”
아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다른 이들은 그들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알지 못했기에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전음이 오간 것 같은데 추연월이 굳이 전음을 했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무슨 말이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다친 사람은 없고 피해도 적습니다. 사인걸을 맞아서 이 정도로 끝났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잘 싸워주셨습니다.”
아진의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인걸이 왔을 때, 그리고 그가 언령을 발하고 사람들이 쓰러졌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를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 자기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기적 같았다.
의원들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갔고 무인들은 아진에게 모여들었다.
사인걸은 떠났지만 그가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명령을 듣고 방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자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강할 수가 있는 겁니까? 솔직히 공자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사인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 같던데요.”
하월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모두 사인걸이 그 정도인 것에 진심으로 놀랐던 것이다.
“그자가 산본의가를 떠난 것에 기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이대로 가서 린린을 데려오려고 합니다. 사인걸에게는 추살접이 붙었으니 사인걸이 있는 곳은 제일조가 알려줄 거예요. 린린이 돌아오면 사인걸을 쫓아갈 겁니다. 그때까지 모두 수련에 힘써주세요.”
모두 아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령이 아니라도 무공의 수위만 해도 절대로 범상치 않은 사인걸이었기에 모두 긴장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아진은 교두들을 바라보았다.
사인걸이 이번에는 그냥 돌아갔지만 섬풍대를 노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교두들 역시 그 뜻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월 공자. 내가 린린과 함께 돌아올 때까지만 여기에 더 머물러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서 가 보십시오.”
아진은 하월이 추연월을 구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것을 보았고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월은 아진을 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고 괜히 민망한 말을 듣기 전에 보내려고 아예 아진을 돌려세우고 등을 밀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산본의가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그것은 이제 남은 사람의 몫이 되었다.
* * *
산본을 떠난 후 사인걸은 혼자 객잔에 들어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직도 추연월이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나를 속였어. 하지만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시키는 건 전부 했는데 이제 와서 왜? 나를 죽이려고 그런 건가? 처음부터 나를 죽이려고 여기로 데려온 거고 그자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간 거고? 대체 왜?’
아무리 생각을 하려고 해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런다는 말인가.
사인걸은 그 생각을 하느라고 식사도 거르고 방에서 나가지도 않았다.
날이 새는지도 몰랐고 하루가 지나간 것도 몰랐다.
점소이가 왔을 때야 그 사실을 알고 사인걸은 돈을 내려 했다.
그러나 점소이는 귀찮게 자기를 여기까지 올라오게 했다면서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점소이는 사인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했고 자기가 얼마나 큰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건지도 전혀 몰랐다.
사인걸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터질 것 같고 화가 나 있던 차에 점소이가 그러자 그대로 화가 폭발했다.
점소이를 죽이기 위해서 대단한 것을 할 필요도 없었다.
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준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사인걸은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고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짜증스러웠을 뿐.
어차피 그는 그곳에 오래 있을 생각도 아니었고 그곳을 떠나기만 하면 아무도 자기가 그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섣불렀나? 산본의가를 이대로 떠나오는 게 아니었던 건가? 거기로 다시 가서 그자에게 상태창에서 본 걸 확실히 말해달라고 하는 게 좋으려나?’
사인걸은 상태창이 도대체 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다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건 자기가 혼자 고민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아니었다.
‘언령을 다시 할 수 있게 돼도 이제는 할 수가 없잖아. 나쁜 새끼. 나를 죽이려고……. 도대체 나를 왜? 그동안 이용만 했다는 거잖아. 아니. 왜?’
끝도 없는 질문을 다시 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