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화
451화
그 생각을 하고 아진은 품에서 목함을 꺼냈고 사인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절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아진이 사인걸에게 폭약을 던지자 사인걸은 짜증을 내면서 피했다.
그에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파리가 괴롭히는 것처럼 귀찮을 뿐이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바닥이 가라앉았지만 그것은 이미 한 번 본 공격이었다.
그곳을 피하기만 하면 피해를 입히지도 못했다.
사인걸은 답답했다.
그래도 한때 영웅이라 불리던 자가 이렇게 멍청해진 건가 해서.
사인걸은 그 공격을 피하고 한심하다는 듯 서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서도진이 다시 폭약을 던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멍청한 짓을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언령을 발하려 할 때였다.
앞선 두 번의 공격이 그의 머릿속에 오해를 심기 위한 동작이었다는 것을 사인걸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폭약이 터졌지만 이번에는 흙먼지가 떠오르는 대신 파편이 튀어 올랐다.
그것은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사인걸을 중심으로 떠올랐다.
사인걸은 어느새 그렇게 된 건가 했지만 겁을 내지는 않았다.
간단히 몸을 움직여 거기에서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무슨 허접한 수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한다는 건가 하고 사인걸이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서도진이 다시 한번 폭약을 터뜨렸다.
암기와도 같은 파편이 한층 더 두텁게 하늘로 솟아올랐고 그것은 사인걸을 노리는 대신 그보다 훨씬 더 위쪽으로 튀어 올랐다.
‘그래서 뭐란 말인가! 왜 성공하지도 못하는 공격을 자꾸 하는 거냔 말이다!!’
사인걸은 서도진이 자기를 터뜨리려고 하다가 그게 계속 실패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두 개가 추가로 더 터졌을 때는 지극히 혼란스러워졌다.
바보가 하는 짓을 보고 헛웃음을 짓는 것도 한두 번이다.
혹시 저기에 저만 모르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면 그때부터는 복잡해지는 거였다.
서도진이 폭약을 터뜨리기 전까지 사인걸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명료하게 알았다.
자신은 언령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서도진에게 죽으라고 명령을 할 수가 있었다.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한 번에 서도진에게 언령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천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러 번 반복하고 나면 마침내 서도진에게도 통할 거였다.
그는 그냥 그렇게만 했으면 됐을 것이다.
그런데 폭약이 터지면서 사인걸은 각각의 동작에 의미를 부여하느라고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쐐기를 박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파편에 강기가 실렸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도 사인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거, 황제의 앞에서 선이남이 그 무공을 펼쳤을 때 그 무공에 황제는 흑천암우라는 이름을 친히 내려주었다.
지금 아진이 펼친 것은 그 흑천암우보다 수십 배는 위력이 높아진 거였다.
사인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흑천암우의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떠오른 파편들이 왜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떨어졌어도 벌써 전에 떨어졌어야 할 것들이 그대로 허공에 열을 지고 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아아악!!”
순식간에 사인걸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너무 허접해 보인 것이 문제였다.
완벽하게 무해해 보이는 바람에 피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강기를 입은 것들이 무서운 속도로 사인걸을 향해 쏟아져 내렸을 때 사인걸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사라져라!!”
그 순간 대부분의 파편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사인걸은 남은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사라진 것이 훨씬 많기는 했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의 언령에 틈이 생기고 있었다.
겨우 파편일 뿐인데도 그의 언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생겼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사인걸만이 아니었다.
아진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고 사인걸이 그것을 보았다.
사인걸은 초조해졌고 다시 언령을 발하려 했다.
그러나 아진이 조금 더 빨랐다.
이번에는 사인걸을 직접 노리고 폭약을 던졌고 사인걸은 언령을 하지 못한 채 몸을 피했다.
이번에도 사라지라고 외칠 수 있었겠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사인걸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지만 한계는 있었다.
처음 몸을 날릴 때 아진에게 그의 속도가 보였고 그의 몸이 어디에서 멈출지를 예상하는 것도 아주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진은 그곳을 노리고 있다가 속도를 조절해 폭약을 던졌다.
사인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서도진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건지 깨닫고 기함하며 허공을 박찼다.
그의 몸이 튀어 오른 자리에 서도진이 나타났다.
그동안 한 번도 빼 들지 않았던 검을 들고.
“죽어!”
사인걸이 소리쳤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보니 언령을 발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그리고 간절했다.
생각할 것이 많을 때는 오히려 언령을 발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게 되자 그것이 사인걸을 살렸다.
서도진은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황당해서 그런 거였다.
사인걸은 그 틈을 타서 외쳤다.
“죽어! 모두 죽어! 산본의가에 있는 자들은 모두 죽어버려라. 전부 다 죽으라는 말이다!!”
아진이 사인걸과 싸우는 동안 그를 돕고 싶어 몸이 달았던 사람들은 그때가 그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목숨을 바쳐서 막아서야 하는 순간.
아진은 사인걸이 산본의가를 습격하면 그들에게 역할을 분담해달라고 하면서 말했었다.
사인걸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붙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죽음만 속출하게 될 테니 처음에는 자기가 먼저 사인걸과 맞붙어 그가 어떤 공격을 하는지 알아내겠다고.
그러는 동안 아무리 자기를 돕고 싶어도 나서지 말고 각자가 나누어 사람들을 보호하라고 하며 그때는 목숨을 내어 놓으라고 했는데 그들은 지금 전력을 다해 기막을 펼쳤다.
그들도 사인걸이 소리칠 때마다 정말 그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인걸의 말에 힘이 있는 것 같은데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더욱 어려웠다.
언령이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뭘 해야 하는 건가.
검을 휘두르면 언령이 도달하지 못하는 건가?
그것은 아닐 것 같아 결국 기막을 쳤다.
제발 자기들이 찾아낸 그 방법이 맞는 것이기만을 바랐다.
사인걸이 언령을 발한 후 급하게 주위를 둘러본 아진은 사람들이 쓰러진 것을 보고 놀랐다가 그들이 몸을 일으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사이에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것 같았다.
사인걸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나마 기대를 했는데 그자들이 다시 일어서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확실히 언령의 힘이 나타나는 것이 처음과 달랐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는 더 조급해졌다.
“죽으란 말이다!!”
이번에도 몇몇 사람이 쓰러졌고 아진의 명을 받은 이들이 미리 기막을 펼쳤다.
사인걸의 언령에 대비하는 것은 이제 사람들에게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언제 하면 되겠다는 것을 슬슬 깨달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진은 사인걸이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도록 그를 끝장내기로 마음먹었다.
사인걸은 짜증스러운 파편이 한꺼번에 하늘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은 떨어졌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사인걸은 한 번 그것으로 인해서 위험에 처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급하게 몸을 날려 거기에서 피하려 했다.
그러나 파편의 반경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그가 안전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진이 손을 움직이자 촘촘하게 하늘을 채운 파편들이 일제히 사인걸을 향해 날아갔다.
섬전 같은 속도로, 사인걸의 몸을 찢어발기려는 기세로 날아가는 파편들을 보며 사인걸은 극성의 신법을 펼쳤다.
그러던 사인걸의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사인걸은 갈증을 느끼던 차에 물을 발견한 것처럼 눈이 빛났다.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에 나온 것이, 언령이 사라졌다는 것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헌터 추연월을 죽이고 영원한 언령의 힘을 얻으시겠습니까?]
추연월이 누구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그의 언령에 쓰러졌던 남자의 몸 주위로 하얀 기운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마나였다.
‘저자도 헌터군!’
사인걸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이미 언령의 힘을 맛본 그였다.
그 힘이 절실한 상태에서 그것을 뺏겼다.
다시 그것을 얻을 기회가 생겼는데, 그리고 이번에 그것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명령을 듣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추연월은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는 듯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는데 조그만 아이가 그와 함께 있었다.
매번 추연월이 자신의 몸으로 가리고 있어서 사인걸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이었다.
‘더 쉽겠군.’
그 아이를 왜 지키려고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렇게 어린 아이를 지켜야 하는 사람은 남보다 더 큰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사인걸이 추연월을 향해 몸을 날렸을 때 그가 뭘 하려고 한 건지 알아차린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몇몇은 사인걸에 의해 쓰러진 사람들을 구해 그들을 피신시키고 있었다.
사인걸이 극성의 보법으로 추연월에게로 쇄도해 들어가 검을 휘둘렀을 때 갑자기 검 하나가 나타나 추연월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도진은 쓰러진 가모와 북리소은을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그 모습을 보았는데 그와 눈이 마주친 하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자기에게 맡기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치료해주라는 의미였다.
사인걸에게 당한 린린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생각하자면 무공도 못 하는 일반인들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사인걸은 갑자기 나타난 하월에게 발목을 잡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극쾌검을 선보이며 하월을 압박해 들어갔다.
하월은 설마 사인걸의 실력이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가 몇 번이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몇 사람이 그곳으로 와서 하월을 도와주었다.
위도도 그곳에 있었고 나중에는 소청과 산본무관의 교두들도 함께 했다.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치료하던 사람들이 하월이 밀리는 것을 보고 속속 옮겨왔던 것이다.
그들이 함께 사인걸을 상대한다면 사인걸을 제압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늘었다.
사인걸에게 겁낼 것은 언령인데 그 언령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이제는 거의 효력이 없는 것 같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사인걸의 검술도 결코 얕잡아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경쟁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력으로 평가받던 이들이 번번이 사인걸의 검격을 맞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압도적인 내공과 흠잡을 수 없는 초식.
그가 구사하는 초식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몸에서 솟구친 방대한 기운이 순식간에 대기를 흔들어대고 내공이 검으로 휩쓸리듯이 내달렸다.
폭발적인 내공을 온전히 받아낸 검은 마침내 거친 검강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