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0화
450화
그때까지는 조용히 지냈지만 이런 일이 생겼는데도 참을 이유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전에 언령을 다시 시험해 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죽어라.”
사인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언령을 하기 위해서 큰 소리를 낼 필요도 없었다.
사인걸은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채 나갔고 그 남자는 갑자기 숨이 멎어 그 자리에 쿵 쓰러졌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사인걸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남자에게 모여드는 것을 보지도 않고 산본의가로 향했다.
그가 산본의가 쪽으로 가는 것을 알고 몇몇 사람이 말했다.
“혹시 산본의가에 가는 길이면 거기는 지금 진료를 하지 않습니다. 가봐야 헛걸음이에요.”
사인걸은 자기에게 말한 사람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말한 대로입니다. 산본의가는 지금 진료를 안 해요. 벌써 며칠 전부터 그래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문을 닫았어요.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안에 의원들은 있는 것 같은데 그런다고 하더라고요. 진료를 안 한다고 했는데도 고집을 부리고 온 사람들이 진료를 해 달라고 했는데 끝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대요. 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그런 건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거기 가봐야 진료 못 받으니까 돌아가세요.”
사인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계속 산본의가 쪽으로 가자 사람들이 혀를 찼다.
“아이고. 고집은. 그래 봐야 헛걸음이라고 하는데 그러네.”
“놔둬. 갔다가 문이 닫힌 걸 보면 다시 오겠지.”
‘겁먹은 모양이군.’
사인걸은 그 이야기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산본의가의 정문을 지키던 무인들이 사인걸을 먼저 알아보았다.
산본의가에 찾아오는 환자들과는 한눈에 봐도 기세가 달라서 그가 사인걸인 것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사인걸을 발견한 무인들이 산본의가로 달려가려고 하는 순간 사인걸이 언령을 발동했다.
멈추라는 말에 경비 서던 무인들이 그 자리에 멈췄다.
사인걸은 그냥 그들을 멈춰 세워두기만 하고 산본의가로 유유히 들어갔다.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불필요하게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그런 것뿐이었다.
거대한 문을 밀기 전에 사인걸은 거창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산본의가와 그곳에 딸린 사업장의 현판을 모두 황제가 써줬다는 얘기는 그도 들은 적이 있었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자 안에서 분주하게 오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인걸을 본 사람들은 낯선 이의 방문에 곧장 같은 생각을 했다.
“누구시오!”
“침입이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고 사인걸은 더 이상 힘을 숨길 필요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듣고 산본의가의 무인들이 그곳으로 달려왔다.
사인걸은 피할 생각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네놈이 사인걸이냐!”
한 손 거들기 위해 미리 그곳에 와 있던 산본표국의 국주가 소리치자 사인걸이 웃었다.
“굳이 내 소개를 할 필요도 없겠군. 나는 찾을 것이 있어서 왔다. 너희를 전부 죽이는 게 나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사도련에서 데려온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놈들을 내놓기만 하면 나는 이대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산본의가가 말은 의가지만 어떤 무가보다도 더 많은 무인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니 사람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건지 끝도 없이 나오는 것 같았다.
진료를 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는 겁을 먹고 내빼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서도진이 나에 대해서 얘기를 제대로 안 한 건가? 도망칠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텐데 왜 여기에 이대로 남아 있었던 거지? 바보들인가? 아니면 서도진이 겁을 먹고 제대로 말을 안 해 준 건가?’
어떤 거라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이제부터 그들에게 스스로 깨닫게 해 주면 그만이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때는 대답을 하고 싶어질 거라고 생각하며 사인걸이 말했다.
“꿇어라.”
“……!”
“……왜, 왜 이게……!!”
사람들은 자기들이 왜 그러는 건지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찼다.
사인걸은 그들이 꿇는 것을 보고 그들의 사이를 지나갔다.
서도진은 아마도 안쪽에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을 내세우고 자기는 숨어버린 건가 해서 가증스러웠다.
사인걸이 채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더 나왔다.
그중에는 위도와 하월도 있었다.
그는 위도를 알아보았다.
위도가 사인걸을 막아서는 동안 하월이 몸을 날리려 했다.
산본무관에 있는 서도진을 데려오려고 했던 것이다.
“멈춰라.”
사인걸이 손을 움직이지도 않고 그냥 그 말만 중얼거렸을 때 하월은 설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몸을 꼼짝할 수 없게 된 것을 깨닫고 황당함을 금하지 못했다.
사인걸은 전각에 숨어 있는 자들을 전부 끌어내기로 했다.
힘없고 약한 자들이 다른 이들의 발목을 잡으면 제가 할 일이 훨씬 쉬워질 터였다.
“전각마다 불타오르고 무너져 내려라.”
그러자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고 전각에 숨어 있던 이들이 모두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전각이 무너지며 그들은 전각이 없는 곳으로 도망쳤고 자연스럽게 사인걸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제일조가 날아가지 않았다면 서도진은 산본의가의 모든 사람이 당하도록 그곳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산본무관에서 함께 수련을 하던 아진은 급히 날아온 제일조를 보고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제일조는 날아와서 아진에게 따로 뭔가를 할 필요도 없이 다시 산본의가로 향했다.
산본무관의 무인들도 역시 아진의 뒤를 따랐다.
사인걸은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눈에 두려움과 절망이 떠오르는 것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인걸의 가공할 힘에 압도되고서도 그들의 표정이 희한했던 것이다.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놀랍다고 여기기는 하는 것 같았지만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인걸이 당혹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뭐지?’
혹시 자신의 언령에 실제로 당한 것이 아니라 당한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랬다.
그렇다면 이제는 확인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흉내 낼 수 없는 명령을 내리기로 했다.
죽으라는 것과 같은 명령을.
사인걸이 조금만 서둘렀다면 그는 그 일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도진이 조금 더 빨랐다.
사인걸은 자신의 뒤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며 몸을 날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가 무너지며 하마터면 바닥으로 끌려 들어갈 뻔했다.
사인걸은 언제 서도진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자 그곳에 서도진이 서 있었다.
“죽어라!”
사인걸은 일을 어렵게 풀어갈 생각이 없었다.
할 수 있는데, 한 번에 끝내버릴 수 있는데 어렵게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객잔에서만 해도 성공했기에 그는 이번에도 넉넉하게 성공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일어난 일은 사인걸이 생각한 것과 달랐다.
아주 해를 입히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생각한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은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인걸은 의문을 느꼈다.
상대가 너무 강해서 언령이 통하지 않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천마조차도 그의 언령에 순응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천마에 비하면 무위가 확실히 떨어졌다.
아진은 아진대로 놀라고 있었다.
사인걸이 이상한 방식으로 공격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미리 대비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러고도 사인걸이 명령을 내렸을 때 실제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아진이 사인걸과 대치하는 동안 사람들이 움직여, 바닥에 쓰러진 이들을 데리고 피했다.
사인걸은 그들이 그대로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일 때문에 그 역시 동요했다.
사인걸은 서도진을 노려보았다.
우선은 서도진을 먼저 처리하자.
이자를 죽이지 않으면 다른 일을 성공하고 나서도 결국 이자가 발목을 잡을 것이다.
사인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서도진을 보고 언령을 발했다.
“죽어라.”
아진은 린린에게 일어났던 일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심장에 느껴지는 통증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거였다.
아진은 사인걸의 말대로 자신의 몸이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아진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사인걸은 그때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서도진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져버리자 깜짝 놀랐다.
그가 바람이 되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인걸은 자신의 언령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한시적으로 주어진 능력.
그 능력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서서히 들었다.
‘그래도 일은 끝내고! 서도진은 죽이고 사라져야 하잖아!!’
그는 언령의 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서도진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죽어라, 서도진!”
이렇게 된 이상, 언령의 대상을 정확하게 정하고 구체적으로 명령을 내리자고 마음먹었다.
그 순간 서도진의 모습이 나무 위에서 드러나더니 그가 떨어졌다.
사인걸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잡은 것 같군. 서도진. 이제 그만 도망 다녀. 그러려고 해 봐야 소용도 없다.”
사인걸이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웃으며 서도진에게 다가갔다.
아진은 이번에야말로 위기라고 생각했다.
‘절대명령?’
언젠가 그것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모르겠고 그게 무림 세계에 온 후의 일이었는지, 원래의 세계에 있을 때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어쨌건 그는 절대명령을 내릴 수 있는 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전설로 치부되었고 아진도 실제로 그런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왜 그게 없다고 생각했을까.
역천마의와 린린의 섭혼술만 해도 대단한 명령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몸에 명령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릴 수도 있었다.
‘별것 아니네.’
지나친 두려움에 위축되면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도 패하곤 한다.
아진은 지금 자기가 그런 상태라고 생각했다.
‘너는 지금까지 이런 공격을 숱하게 당해왔어. 그리고 그때마다 빠져나갔고 이겼고 결국 네가 살아남았어.’
아진의 생각이 꼭 맞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의 공격은 아진에게 거의 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통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아진에게 먹힌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인걸의 명령은 그에게 통했다.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의 생명을 위협했고, 죽이려고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인걸은 아진이 동요한다고 생각하며 그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죽어라!”
사인걸의 말에 아진의 몸이 바닥에 눌렸다.
‘사인걸이 말하면 말하는 대로 돼. 결국에는 돼. 지금은 내가 저항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저대로 되는 모양이야.’
사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진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사인걸이 명령을 내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