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9화
449화
가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구나. 그동안에도 너무 신나게 살아서 만약 죽는다고 해도 조금도 아쉽지 않을 거라고들 했었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너를 도울 거다. 아진아. 너와 함께 싸울 거야. 네가 다치면 너를 치료해주고 그렇게 함께 싸울 거다.”
“아버지…….”
“그러다가 끝이 나면 나는 결국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함께 얘기를 나눈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을 했었지. 우리가 모두 다 죽는다고 해도 이기는 건 우리일 것 같다고. 우리는 우리의 뜻을 지키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지키다가 죽는 것일 테니 아쉬울 것도, 미련도 없을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죽은 사람이 진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진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해 보자. 결과가 어떻게 되건. 나는 염마를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때가 되면 당연히 만나겠지만 함께 죽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린린의 아버지라고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안 하는 게 좋을까. 우리는 가끔 그 생각으로 고민을 하지. 아직도 답을 찾지는 못했다.”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버지. 저도 생각을 여러 번 해 봤는데 그건 말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역시 그렇겠지? 그래. 어차피 우리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염마가 미리 알 것 같기는 하겠지만 괜히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겠지.”
“린린이랑 같이 가면 거기에서 사는 것도 편할지 몰라요. 염마도 계속해서 화를 낼 수는 없을 테고 어느 정도 화를 내고 나면 풀리겠죠.”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다. 나도 다 생각을 해 보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거거든.”
그 말에 아진이 웃어버렸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다른 사람들도 만나봐야겠어요.”
“그래. 나도 그러겠다.”
아진은 산본무관으로 갔고 교두들을 불러 모아 사인걸에 대해서 최대한 자세하게 얘기를 해 주었다.
어느 정도로 얘기를 해 주는 게 좋을까 해서 고민을 했지만 그는 결국 린린에게 일어났던 일을 모두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본 사인걸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교두들은 긴장한 것 같았고 겁도 먹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그들이 어려운 문제를 눈앞에 두고 내린 결론은 딱 산본무관 사람들다웠다.
“그동안 누구도 사인걸 같은 자와 싸워본 적이 없었겠습니다. 이거 엄청 기대되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차피 무인의 길에 들어선 이상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인이 아니라고 해도 죽는 건 모두에게 정해진 일이죠.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정말 기대됩니다.”
“역시 산본무관에 오길 잘했습니다. 저는 사실 여기에 오기 전에 고민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저에게 와 달라고 한 문파들이 많았고 돈도 훨씬 많이 준다고 하고 장로 자리까지 제안한 곳도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로 오고 싶더니 역시 잘한 결정인 것 같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일을 마냥 걱정만 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이들을 보면서 아진은 자기가 처음에 왜 그렇게 위축됐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인걸이 산본에 오는 순간 이들은 모두 고통스럽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을 원망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다고 여긴 적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에게만은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야. 인정받고 싶었었나 봐.’
아진은 그것을 깨달았다.
그런 관계의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이제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야겠습니다.”
“그런데 문하생들에게는 선택할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진이 말하자 교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살 만큼 살았다지만 문하생들은 다르지 않은가.
아진은 문하생들만큼은 순순히 떠나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의 진심이었다.
남아서 같이 싸워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고마운 것도 사실이지만 웬만하면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산본무관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는 건가 할 정도로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곳에 남기로 했다.
“어차피 공자님이 여기에서 하실 일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돌아가시지요.”
교두들의 말에 아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터덜터덜 산본의가로 돌아갔다.
* * *
제선문주가 아진을 찾아왔다.
얼굴은 밝았고 걱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는 철방의 방주가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가 하다가 아진은 그들이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라고 생각하며 얘기를 기다렸다.
“공자. 사인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우리도 그걸 만들어봤네.”
제선문주의 말에 아진이 뭘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폭약 말입니다. 상당히 신기하게 들려서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 하다가 제선문주님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같이 얘기를 해 봤지요.”
방주가 싱글벙글하면서 말했다.
“이런 얘기는 뜸을 들여가면서 얘기를 해야 하는 건데 아쉽습니다.”
방주는 정말 안타까운 듯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이게…… 뭡니까? 정말 폭약을 만드셨어요?”
혹시라고 했지만 이미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제선문주가 누구인가.
또 방주는 누구인가.
아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생각이 마무리 지어진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사인걸이 이걸 보면 자기가 갖고 있던 폭약이 창피해서 슬그머니 감출 겁니다. 진작 제선문주님을 찾아가는 건데 그랬습니다. 우리는 진작 만났어야 했어요.”
아진은 방주의 말을 다 듣지 못한 채 몸을 날렸다.
당장 확인을 하고 싶어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뒤에서는 방주와 제선문주의 웃음소리만 들렸다.
그는 연무장으로 갔다가 다시 몸을 날렸다.
바닥에 잘 깔려 있는 돌을 보면서 그걸 깨뜨리면 어머니에게 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없는 숲으로 가면서 생각하니 지금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웃겼다.
연무장 바닥이 깨지면 안 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 연무장을 계속 사용해야 한다는 전제가 돼 있으니 드는 걱정이 아니던가.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단 말이지.’
사인걸이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진은 자기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느끼게 되는 사실이었다.
여전히 전력은 그들이 기울었지만 조금씩 희망이 생겼다.
져도 상관없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진은 목함의 폭약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펼치는 사람의 무위에 따라 같은 독도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묵 장로의 말을 떠올렸다.
폭약을 던지자 주위 십여 장이 폭삭 가라앉으며 바닥이 내려앉았고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이 먼지로 화했다.
뭐가 솟구치고 어쩌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
방주가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건지 아진도 알 것 같았다.
제선문주와 방주 두 사람이 뭉치니 차원이 달라져 버렸다는 것을 그도 인정해야 할 듯했다.
폭약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먼저 그게 얼마나 있는지 알아야 했다.
성능을 시험한다고 여기에서 다 써버리고 정작 사인걸을 빈손으로 맞이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아진은 자기가 일의 순서를 잘못 세운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아쉬운 눈으로 목함을 보았다.
‘그래도 딱 하나만 더 해 볼까?’
그러나 결국 유혹을 물리치고 산본의가로 돌아갔다.
가는 동안 폭약이 터지던 느낌을 떠올렸다.
힘을 조절하면 그렇게까지 잘게 부서져 버리지는 않을 것 같았는데 그걸 이용해서 공격을 할 수도 있을 듯했다.
‘사인걸의 공격은 분명히 위협적이다. 그렇지만 사인걸 자신은 여전히 유한한 존재지. 사인걸의 본체를 노려야 한다. 우리는 여럿이니 가능할 수도 있어.’
아쉬운 것은 린린이 없다는 거였다.
린린처럼 아진과 합격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는데 린린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이 녀석아. 그러니까 항상 조심했어야지…….’
린린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아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일단 생각을 하고 나면 걱정을 지울 수가 없어서 일부러 생각을 눌러놓고 있었는데 봉인이 풀린 것처럼 떠올라버렸다.
그래도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거는 바람에 린린에 대한 걱정을 다시 잠재울 수 있었다.
할 일을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해 주고 철방의 방주를 찾아가자 방주가 그동안 만들어놓은 폭약을 수북하게 안겼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줘야겠습니다.”
아진이 말하자 방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공자님이 사용하시는 게 낫습니다. 공자님이라서 이걸 걱정 없이 드리는 거지 다른 사람은 잘못 다루다가 자기가 폭사할 수도 있습니다. 목함에 넣었다고는 하지만 강한 충격을 받으면 터질 겁니다. 이걸 가지고 있다가 공격을 당하면 혼자만 터져 죽는 게 아니라 인근 백여 장은 초토화될 겁니다.”
그 말에 아진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감이 잡히던가요. 공자님?”
“예. 역시 대단했습니다. 성능은 다 똑같은가요?”
“초기에 만든 것도 있기는 한데 그건 이것보다 성능이 떨어집니다. 그것도 드릴까요?”
“예. 그건 그것 나름대로 쓸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예. 잠깐만 기다리시죠.”
방주가 커다란 목함을 가지고 돌아왔다.
목함에는 이십여 개의 폭약이 있었는데 아진은 그것들을 전부 잘 받아들고 철방을 나섰다.
이제 준비는 거의 끝나갔다.
사인걸이 오면 언제든 그를 맞이할 수 있을 듯했다.
* * *
산본에 도착한 사인걸은 죽립을 쓴 채 객잔에 들어가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은 사인걸이 벌써 산본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저마다 삶을 살아갔다.
사인걸은 문득 자기가 이곳에서 괴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일단 자신이 날뛰기 시작하면 그들의 평화로운 삶은 순식간에 끝이 날 터였다.
자기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 사인걸은 꽤 만족스러웠다.
‘여기에서 일을 끝내면 사련으로 가자. 그곳에 가서 그자들에게 격체전력으로 내공을 좀 더 받자. 그러고 나면 무서울 게 없어지겠지. 그 후에는 황성으로 가는 거다. 그리고 황제가 되는 거지. 그것까지 한 후에는 내가 일일이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일이 되겠지.’
그는 흡족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만 해도 수틀리게 하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아는데 다른 이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를 짜증 나게 했다.
결국 사인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조용히 나서는데 급히 들어오던 이가 사인걸의 어깨를 툭 쳤다.
그가 잘못한 거였지만 들어온 이의 체구가 아무 데서나 볼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는 사인걸이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사인걸을 노려보고 욕을 하고 지나갔다.
사인걸에게는 가소로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