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8화
448화
린린까지 데리고 산본으로 가는 것은 어려울 듯해서 아진이 위도를 바라보았다.
“린린은 여기에 있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술은 잘됐지만 안정이 필요해요.”
“소련주와 흑사문의 소문주는 믿을 만한 사람들인 것 같던데 그들에게 부탁을 하면 어떻겠어?”
“저도 그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소련주에게 부탁을 하고 소문주에게도 같이 지켜봐달라고 하려고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게 낫겠다. 그럼 내가 소련주를 찾아오마.”
청수와 무린은 자기들도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듯했고 자기들이 소문주를 찾아오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아진이 웃었다.
“괜찮다. 너희는 쉬고 있어. 쉴 시간은 지금밖에 없을 거다.”
“네, 공자님.”
린린이 그렇게 된 걸 보고 사인걸이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알았을 텐데 두 아이들은 겁을 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야말로 자기들이 나설 때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 듯했다.
“무섭지 않아?”
“언젠가는 저희가 산본의가를 지켜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희가 어렸을 때 지켜주셨으니까 이제는 저희가 지켜드리는 게 맞죠.”
청수의 말에 아진이 웃었다.
청수를 처음 봤을 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아진은 청수와의 인연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계획하지 않은 일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 고맙다. 그사이에 식사라도 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공자님도 같이 가시지요?”
“나는 위도 형님을 기다리겠다. 돌아올 때 육포나 넉넉히 사 오너라. 가는 동안 식사를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예. 공자님.”
마냥 사양할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아이들은 아진에게 돈을 받고 사라졌다.
아진은 위도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도가 소련주 팽수혁과 함께 나타났다.
소련주는 놀란 얼굴로 아진을 보다가 어서 자기와 함께 가자고 하며 처소로 안내를 해 주었다.
오는 동안 위도에게서 충분히 설명을 들은 듯 린린이 깨어날 때까지 린린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했다.
“사련의 문제로 이렇게 큰일을 당하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공자님.”
“잘 부탁하겠습니다. 이 아이는 저에게 정말 소중한 아이입니다. 사인걸만 아니면 절대로 이 아이를 혼자 두고 가지는 않을 텐데 린린의 몸 상태에 그 거리가 부담이 될 것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소련주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공자님. 저를 믿어주셨으니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공자님께 받은 것을 갚을 길이 이것뿐인데 어찌 망치겠습니까. 목숨을 바쳐서라도 해낼 것이니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소련주님만 믿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말은 팽수혁에게 했지만 시선은 린린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린린. 무사해야 한다. 오라비가 곧 올 테니까 그때까지 나아있어야 한다.”
린린은 눈을 뜨지도, 아진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진은 린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가 일어섰다.
“부탁하겠습니다. 소련주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침내 그들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사인걸은 자신이 지닌 힘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천마가 그의 앞에서 꼼짝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그는 언령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계속 생각했다.
천마를 굴복시키고 산송장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 그에게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거대문파에 들어가서 문주를 죽이고 그것을 자기 앞에 복속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상태창은 그에게 서도진을 죽이면 황제가 되게 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자기 손으로 스스로 이룰 수 있을 듯했다.
도무지 무서운 것이 없었다.
‘뭘 해 볼까? 정말 거대문파에 가 볼까?’
원하기만 하면 뭐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자 뭘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는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괴수가 던전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그랬을 텐데 지금은 언제 괴수에게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된 일이었다.
그는 산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황이 만든 신법만 해도 세 개가 있었는데 내공이 부족해서 펼칠 수 없었던 신법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전 같았다면 닷새는 걸렸어야 할 거리를 반나절 만에 주파했다.
그 자신도 자기가 얻은 엄청난 힘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상태창이 다시 나오지는 않을까 하며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인걸은 그것이 아쉬웠다.
만약 상태창을 자기가 불러서 사용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언령이 전부일까? 그건 아니겠지? 언령을 할 수 있게 됐으니 다른 것도 더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던 사인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기어검과 심검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황의 동굴에 갇혀서 벽에 있는 온갖 비급을 샅샅이 읽었던 그였기에 그게 거의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기어검이 된 것도 신기했는데 심검까지 성공한 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자기가 뭘 하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 일들이 이루어졌고 그가 깨달은 것은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였다.
‘상태창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정체가 뭔데 이런 것까지 할 수가 있는 거지?’
사인걸은 그런 생각 때문에 정작 나쁜 짓을 하지 않은 채 산본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몇 개의 현 단위로 혈겁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청난 고수의 사념 같은 건가? 사황 정도는 가뿐하게 뛰어넘는 그런 사람이 죽어서 사념이 되면 상태창 같은 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랴.
사인걸은 자기가 서도진을 뛰어넘었다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았다.
‘나를 모르는 것 같았어. 나를 몰랐던 거야. 기억에도 없었던 거지. 그런데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걸? 중요한 사람들을 나에게 하나씩 잃고 나면 내 이름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겠지. 지옥에 가서도 내 이름은 기억하게 될걸?’
사인걸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등에는 추살접이 앉아 있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따라갈 것도 없이 그냥 그의 등에 앉아서 가면 족했다.
추살접이 많을 때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 모습을 알아차리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사인걸이 피우는 흉흉한 기세 때문에 감히 그를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추살접 한 마리.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파급 효과가 얼마나 큰지 사인걸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추살접이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아진이 사인걸을 찾아 나서기 전에 사인걸이 먼저 아진의 앞으로 찾아갈 것이라서.
* * *
사인걸의 앞에서 도망친 후 아진은 산본으로 돌아갔다.
린린이 함께 오지 않은 것을 알았지만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다가 천마신교로 갔나 보다고 생각하고 아진에게 그렇게 물은 사람도 있었다.
그랬기에 아진에게서 사정 얘기를 듣고 그들이 느낀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린린이 당했다.
그것이 쉽게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이던가.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지만 벽예월의 놀라움은 정말로 컸다.
“제가……. 제가 놓친 건가요? 공자님이 산본을 떠나고 나서 하루도 빠짐없이 하늘을 봤는데요……. 별을 살피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인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긴 걸까요. 왜 제가 아무것도 못 본 거죠?”
그녀는 더 이상 하늘이 자신에게 천기를 알려주지 않기로 한 것인가 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사람들도 벽예월에게 아진이 무사할지 묻곤 했고 그때마다 벽예월은 그럴 거라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사람들은 벽예월을 믿었고 그녀는 자기가 여전히 하늘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기가 본 것이 잘못되었고 사람들에게 허튼 희망을 준 거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당혹감이 들었다.
아진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인걸이 넘어온 것을 벽예월이 알고 있는지 궁금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벽예월의 말을 듣고 아진은 이번 싸움이 여러모로 불리하겠다는 걸 깨달았다.
소청은 조용히 그 곁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진의 마나도 움직이지 않고 위도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추연월은 어차피 공격형이 아니라서 어떨지 모르지만 마나를 사용하던 사람들에게는 크건 작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다른 거였지만 린린이 당했다는 사실에 저절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아진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쉽게 계획이 서지 않았다.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피하게 할 수 있으면 그게 가장 좋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러나 피할 곳이 있기는 한 건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아진은 우선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도 이야기를 들어 내용을 알고 있었고 곧 아진이 자기를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 아진아.”
“아버지. 당분간 환자들을 받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인걸이 이곳에 온다면 그 사람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그렇구나. 알겠다.”
“저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한데 혹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도 좋을 것 같구나. 사람들에게 말을 해 보도록 하겠다. 환자들이 오지 않으면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을 필요도 없겠지.”
가주는 의원과 의생, 의녀와 하인들을 생각하는 듯했다.
“아버지야말로 어머니와 함께 이곳을 피하시면 좋겠습니다. 가장 걱정되고 신경 쓰이는 사람이 가족들입니다.”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너에게 도움이 될 거다. 아진아. 이걸 너 혼자만의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에게도 가치 있는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단다. 너에게 부담만 된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다.”
아버지의 말에 아진이 웃었다.
누가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있을까.
아진은 그래도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제선문주님도 네 말을 듣지 않으실 거다. 네 어머니도 그렇고 네 형은 물론이고 형수도 그럴 거다. 이 말을 하는 건 네가 혹시나 헛걸음을 할까 봐서 그러는 거다.”
“아버지…….”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 우리끼리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벽 소저가 하늘을 읽지 못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안 아진이 네가 살던 곳에서 다른 사람이 넘어오고 그 사람의 힘이 너무 강해서 아진이 너도 막지 못한다면 그때는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의논을 했었지.”
설마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 하며 아진이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