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7화
437화
팽수혁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가 잠시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이 련주에게 말을 늘어놓았다.
“이 일은 그냥 이대로 넘어가는 것이 좋을지요. 련주님. 단순히 함구령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차라리 살인멸구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 일의 시작이 흑사문에 있지 않은지요. 흑사문을 멸문시킨다면 더 확실한 처리가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흑사문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겠지요. 즉각 사련의 무력대를 보내서 흑사문을 멸문하도록 하시지요. 련주님.”
사람들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흑사문이 사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그 자리에 있는 자들 중 흑사문을 견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이 기회에 흑사문을 치워버리고 나면 흑사문이 갖고 있던 거래처 중 일부는 자기들의 수중으로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팽수혁은 자기가 가져온 소식이 사련에 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련의 비무대회.
그것으로 인해 사련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상상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어두운 욕심이 생겨났던 것이다.
팽수혁은 다시 련주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만큼은 이 상황에서 바른 판단을 내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겠소. 함구령을 내린다고 해 봐야 선택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함구령을 어기고 입을 여는 자가 있다고 해 보시오. 이것은 사련을 위한 결단이오. 누가 나가시겠소. 무력대를 이끌고 가서 흑사문을 지울 사람이 누구요.”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 일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팽수혁은 자기가 그냥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것입니까. 흑사문이 어떤 곳입니까. 우리의 형제이고 수족이 아닌지요!”
그러나 더 이상 팽수혁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었다.
“소련주는 이제 처소로 돌아가 보는 것이 어떤가. 우선 그 옷도 갈아입어야겠고 몸도 좀 씻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네.”
거대 사도 방파를 운영하는 자가 말하며 은근히 팽수혁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했고 나중에는 련주마저 그랬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소련주. 이제 돌아가 보도록 해라. 너도 이 일에 대해 반드시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입을 다물라 했다.
함구령이 내려진 것이다.
팽수혁은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흑사문에 내려졌던 함구령이 어떻게 바뀌었던가.
함구령으로는 부족하다며 살인멸구를 계획하지 않았던가.
팽수혁은 그곳에 계속 있어봤자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일어나 자리를 나오는 동안 몇몇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들러붙었다.
팽수혁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곽설…… 내가 너를, 너희 흑사문의 혈겁을 당긴 듯하다. 어찌하면 좋으냐……!’
그는 밖으로 나간 후 뒤따르는 사람이 아직 없을 때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곧 자기 뒤에도 사람이 따를 것 같았다.
아버지는 무사하실 수 있을까.
저자들이 나를 노리고 나면 아버지까지 노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생각을 오래 할 틈은 없었다.
건물을 돌아간 그는 그대로 신법을 펼쳤다.
그동안 사용하던 신법으로는 따라잡힐 것 같아 평소 익혀오던 상승절기를 시도했고 어설프게나마 성공했다.
그러나 내공의 운용이 원활하지 않아 그것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전에서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전해졌지만 죽더라도 흑사문에 소식은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말 때문에 이러다가 흑사문에 속한 모든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사련의 손에 혈겁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해서 신법을 펼치던 그가 우뚝 멈췄다.
더 이상 계속하다가는 기어이 단전이 찢어질 듯했다.
무리해서 신법을 펼친다고 해도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개죽음을 당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직은 그에게 기회가 있었다.
흑사문의 혈겁은 막지 못한다고 해도 사인걸에 대한 것을 알릴 기회는 남아 있었다.
팽수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위에서 큰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그의 위로 내려왔다.
“……!!”
그는 그 새를 본 적이 있었다.
연회에 갔을 때였을 것이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주의 깊게 보다가 그 새가 서도진에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었다.
그러나 서도진은 그 새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그런 새가 가까이 날아오는데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을 보면서 팽수혁은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새가 서도진의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무심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 생각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팽수혁은 이미 품에서 붓과 먹물통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 전서를 적기 시작했다.
자기가 생각한 게 틀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일단 전서를 쓰고 있는데 그러는 동안 독수리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급히 흑사문의 곽설에게 전서를 쓰고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이건 흑사문에 가져다주고, 그 후에 이걸 산본의가의 서도진 공자님에게 가져다드릴 수 있겠느냐.”
말을 하면서도 그는 자기가 지금 새에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했다.
이 새가 영물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전서를 전달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암호로 쓴 것도 아니고 누구든 알아볼 수 있는 글로 써서 전서통에 넣는 건 위험 부담도 있었지만 팽수혁은 그것이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보는 자는 즉시 흑사문주에게 전서를 전할 것. 사련이 사인걸의 일로 흑사문의 멸문을 모의. 전원 대피 요망]
그 후에는 서도진에게 보낼 것을 적었다.
[이것을 보는 자는 즉시 서도진 공자에게 전서를 전할 것. 몸에 폭약이 심어진 양민들이 폭사하여 죽음. 흑사문의 총표두였던 사인걸이 관련된 것으로 보임. 사련은 흑사문을 멸문하여 이 일을 덮기로 함.]
급하기는 했지만 필요한 내용은 다 담겨야 했기에 그는 그것을 몇 번 더 확인하고 전서통에 말아 넣었다.
그리고 전서통을 각각의 발목에 단단히 매달아 주었다.
“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있는 것을 흑사문의 문주님에게 전하고 이것을 산본의가로 가져가야 한다. 서도진 공자님을 찾을 수 있으면 공자님에게 전해라. 부탁이다. 제발 성공해다오!!”
독수리는 전서통이 발목에 잘 묶인 것을 확인하듯 발목을 한 번씩 확 확 털어보더니 그대로 날아올랐다.
팽수혁은 뒤늦게 정신이 들며 얼떨떨해졌다.
그 새는 어디에 있다가 자기를 어떻게 알고 날아온 걸까.
계속 자기를 주시하고 있었던 걸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그걸 생각할 틈이 없다고 여기며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던 팽수혁이 그 자리에 멈췄다.
처음에는 흑사문으로 가려고 했는데 흑사문으로 가면 사련에서 나온 자들이 자기를 쫓아올 것 같았다.
‘그러면 도착도 못 하고 죽을지도 몰라.’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이었지만 생각할수록 그게 맞을 듯했다.
흑사문을 멸문하기로 결의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목숨이 대수로울까.
아버지에게 말을 하면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기들끼리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되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종이호랑이가 되건 허수아비가 되건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 *
제일조(第一鳥)를 가장 먼저 본 사람은 서악이었다.
“아브지. 제일조야!”
서악이 자신을 가리키는 걸 봤는지 제일조가 한 바퀴를 맴돌다가 위도에게 날아갔다.
그러고는 발목을 척 하니 내밀고 전서통을 보였다.
위도는 제일조가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뭔데 이렇게 서두르는 거냐?”
그러자 제일조가 빨리 떼기나 하라는 듯이 전서통이 달린 발목을 훌훌 털었다.
위도도 이렇게 느긋할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서둘러 전서통을 뗐다.
그러자 다시 묶으라는 듯 제일조가 또 발목을 내밀었다.
위도는 전서를 읽지도 못하고 전서통을 발목에 매달았고 제일조는 그대로 급히 날아올라 사라졌다.
자기가 날아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뭔데 이렇게 바쁜 거야?”
그러면서 전서를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마침 지나가던 추연월을 불렀다.
“추연월. 서악이 좀 보고 있어.”
“무슨 일인데요. 형님?”
그러나 이미 위도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서악아. 아버지가 왜 저러셔?”
“제일조가 왔어요.”
“제일조가 전서를 가져왔어? 그걸 가지고 저렇게 급히 가시는 거야? 무슨 일인지는 몰라?”
그러다가 알 리가 없겠다고 생각하며 추연월은 서악을 안아 들었다.
“걱정할 일은 아니겠지?”
서악은 거기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추연월 앞에서 사라진 위도는 아진을 찾아갔다.
위도는 아진이 그 시간에 산본무관에서 섬풍대와 함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곧바로 아진을 찾을 수 있었다.
아진은 청수와 무린의 조를 나누어 가르치고 있다가 바람처럼 달려온 위도를 보고 놀랐다.
“아진아. 이거 좀 봐. 제일조가 가져왔어. 이걸 나한테 주고 제일조는 곧장 또 어딘가로 날아갔어. 사련에 일이 생긴 모양이야.”
위도는 말을 하면서 자기가 본 전서 내용을 아예 아진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아진은 전서를 보기 전에 이미 그 내용을 다 알았다.
누가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이 다급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을 모아주세요. 형님. 린린이랑…… 아니. 그냥 린린만 불러주세요. 형님도 오시고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위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러자 소청이 부리나케 아진의 옆으로 왔고 청수와 무린도 눈을 빛냈다.
아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소청에게 말했다.
“소청이 너는 여기에 있어야겠다. 왠지 이번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예, 스승님.”
소청이 말하자 섬풍대의 눈에도 결연한 의지가 타올랐다.
아진이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 있을 것이고 그동안 산본의가의 안위는 자기들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청수와 무린 역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진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신법은 어느 정도냐. 두 사람. 내가 업어야 하려나?”
“아닙니다. 공자님. 신법은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이럴 때가 오지는 않을까 해서 정말 피나는 연습을 해 왔던 두 사람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자기들이 그와 함께 임무에 나가게 될 것 같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