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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35화 (435/470)

제435화

435화

설인정이 린린을 못 알아본다…….

그걸 상상하자 왠지 린린이 불쌍해졌다.

그런데 설인정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면 그다지 나쁘기만 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린린의 두 생애를 거쳐 설인정이 보인 애정이 얼마나 컸던가.

지고지순하다고 할 만한 마음이었는데 그 마음은 단 한 번도 보답받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린린의 잘못이 아니라 설인정의 잘못이었을 것이다.

왜 하필 린린을 좋아해서.

[아마 안 믿을 거야. 안 믿을 것 같아. 그런데 루주에게는 잘된 일이야. 이번에는 루주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루주도 행복하게 살면 좋은 거잖아.]

[그래. 맞아. 오라버니 말이 맞는 것 같아. 이번에는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으니까 설인정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좋겠어.]

[그래도 이번에는 네가 가까이에서 지켜봐 줄 수 있으니까 루주도 기쁠 거야.]

[약 오르기는 해. 자기 주군도 기억을 못 한다니. 그게 말이 돼?]

[루주라면 그래도 되지. 심술 좀 그만 부려.]

아진이 말하고 린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기가 반짝 눈을 떴지만 잘 만큼 자서 그런 건지, 두 사람의 전음에 반응을 하는 건지 그것은 알 수가 없었다.

* * *

전서구 한 마리가 창가로 날아들자 탁자 앞에 앉은 남자가 전서통을 빼냈다.

사련에 소속된 흑사문의 소문주 곽설이었다.

‘…….’

전서구는 임무를 마치고 홀가분하게 날아갔지만 전서를 본 곽설의 얼굴은 안타까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추살 3조 임무 실패. 사도련 본성 인근에서 전원 시신으로 발견됨. 다른 임무 지원으로 시신 수습하지 못함.]

임무에 나간 추살 3조가 돌아오지 않아 그들의 행방을 찾도록 조를 꾸려 보냈더니 그들이 전서를 보내왔던 것이다.

추살 3조는 전원 일류 고수로 구성된 특임대였다.

그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보낸 것이었는데 설마하니 그들이 임무에 실패하고, 게다가 죽기까지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무인을 불러들였다.

“총관에게 내가 보잔다고 하세요.”

“예, 소문주님.”

무인이 가고 곽설이 급히 문주전으로 향했다.

문주전 앞을 지키던 무인이 곽설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이고 안에 고했다.

“문주님. 소문주입니다.”

“들어오라 하게.”

곽설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주 패혈산은 말없이 곽설을 바라보았다.

그도 추살 3조가 나간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곽설이 자신을 찾아왔다면 추살 3조의 소식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곽설의 표정을 살피고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염려하던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실패라고 하더냐.”

“예. 아버님. 모두…… 죽었다 합니다.”

문주에게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모두 다 말이냐.”

“예.”

“그들은 모두 일류 고수들이 아니더냐. 그런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이냐. 어찌 죽었는지도 보고가 들어왔더냐.”

“그것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문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추살 3조가 모두 나갔더냐.”

“예, 다섯 명이 모두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곽설도 문주가 왜 그것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

일류 고수 다섯 명이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가 전원이 죽었다.

실패를 예상하지 못했는데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알았다. 달리 할 일이 있을 테니 가 보도록 해라.”

“예. 아버님.”

소문주전으로 돌아가자 총관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추살 3조가 모두 죽었다 합니다.”

곽설의 말에 총관이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3조가 말입니까, 소문주님.”

“예. 그곳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3조가 모두 죽었다면 소문주님도 위험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소문주님의 무위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3조가 죽었다면 간계나 술수를 쓴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런 수법이 사용된다면 소문주님께서도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소문주님, 혹 사련의 소련주님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떠신지요. 소련주님이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총관은 그 말이 소문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은 아닐지 걱정하며 물었다.

그러나 곽설은 자존심 같은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다.

사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자존심이야 얼마든지 무너져도 상관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사련으로 전서구를 보내주십시오. 저는 먼저 그곳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신이라도 수습을 해야지요.”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소문주님.”

곽설은 나가면서 가까이에 있던 무인에게 적무단주를 부르도록 했다.

적무단은 흑사문의 문주와 소문주만을 위해 움직이는 무력대였다.

사업을 확장해 나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경쟁 관계가 만들어지고 흑사문을 시기하는 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적무단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오늘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했다.

일각이 지나지 않아 적무단주가 왔고 곽설은 전서를 받은 일을 알렸다.

적무단주 역시 추살 3조의 전멸 소식에 크게 놀랐다.

“그곳으로 가려 합니다. 수행을 부탁합니다, 단주님.”

“예, 소문주님. 일각 안에 준비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곽설에게도 준비가 필요했기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처소로 돌아갔다.

징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단지 그것을 놓쳤을 뿐이었다.

추살 3조가 쫓던 사람은 표국의 총표두였다.

흑살문 표국의 표행 경로에서 부녀자들이 간살당하고 작은 마을이 혈겁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사건 자체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시신을 은폐하는 바람에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만약 오래 쌓인 눈으로 산에서 먹이를 찾지 못한 짐승들이 마을로 내려와 땅을 파헤치지 않았다면 그 일은 더 오랫동안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이 있었다고 곧바로 그것을 표행의 경로와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것은 어려웠다.

곽설이 우연히 객잔에서 그 일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그리고 표국의 장부를 주기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관련성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장소가 겹쳤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무공을 익힌 자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시작된 의심으로 끈질기게 조사를 한 끝에 각각의 표행에 전부 따라나선 사람을 찾을 수가 있었다.

총표두 사인걸.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곽설이 얼마나 놀랐던가.

곽설은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조사를 해나갔다.

그는 자신의 표국에 속한 사람들이 혹시라도 정체 모를 흉수와 마주쳐 희생을 당하지 않을지 그것이 걱정되어 조사를 했던 것인데 그토록 걱정하던 강아지가 사실은 괴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인걸이 어떻게 그 일을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행적이 들통난 것을 알아차리고 표국에 불을 지른 후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려 황금과 전표를 훔쳐 도망쳤다.

표국에 고수들이 있었지만 사인걸은 그들 모두를 따돌리고 신출귀몰한 재주로 표홀히 사라져버렸다.

국주는 사인걸을 돕는 이들이 있었다고 했고 그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못한 채로 곧바로 추살조를 꾸렸다.

그러나 추살조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곽설은 추살 3조를 보냈다.

‘더 신중했어야 했다. 더……. 추살조가 실패했으면 이유를 듣고 대책을 강구했어야 했다. 마냥 그렇게 서두르기만 할 일이 아니었어…….’

후회는 뼈아팠다.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적무단이 먼저 모여 있었다.

단주와 조장 두 명, 그리고 조원이 여덟이었다.

“가도록 하지요.”

더 이상 다른 말은 없이 각자가 말을 타고 그곳을 떠났다.

* * *

소식을 들은 소련주 팽수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서에 적힌 내용은 흑사문이 추살에 실패해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거였다.

친우로서 도움을 청한다는 대목에서 사련의 개입보다는 팽수혁 개인의 무위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문주에게 묻지 않고 소문주가 전서를 보낸 듯했다.

흑사문은 사련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컸다.

그런 흑사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팽수혁은 그 일을 벌인 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흑사문 표국의 총표두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팽수혁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자기가 잠시 사련을 떠날 거라고 말했고 흑사문의 곽설이 도움을 청했다는 정도로만 얘기를 해 두었다.

만에 하나 자기에게 일이 생길 경우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는 알려야 해서였다.

팽수혁은 늦지 않게 곽설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곽설은 팽수혁과 만나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전서로 다 전할 수 없었던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흑사문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내키지는 않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그곳까지 와준 팽수혁에게 감출 것도 없었다.

팽수혁은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들었다.

팽수혁도 흑사문의 실력을 알고 있었고 특히 추살 3조에 대해서는 들은 이야기가 많았었다.

그런 추살 3조가 전멸되었다는 말은 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인걸은 어떤 사람인가.”

“사실 나도 잘은 몰라.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은 전부 꾸며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전부 거짓 정보라고 봐야 할 것 같아.”

“무위의 실력은?”

곽설은 거기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절정 초입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그저 막연한 추측이었다.

“확실히 알아 두었어야 하는 거였는데…….”

곽설이 자책하는 것을 보며 팽수혁이 그를 달랬다.

“서두르지.”

“이 일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야. 우리 선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팽수혁도 곽설이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파에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버리고 그 사실이 드러나면 사파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떨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사파의 본성이고 태생적인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곽설은 그것 때문에라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팽수혁 역시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서 곽설의 청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팽수혁은 자기들이 사인걸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만약 찾을 수만 있다면 그자를 그 자리에서 죽일 터였다.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추살 3조가 전멸당했다면 자신에게도 흉사가 닥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일은 사파에게 주어진 기회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할 수도 있었다.

‘비무대회를 보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건 내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군.’

팽수혁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크게 다치거나 죽더라도 흉수는 죽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고 그의 머릿속에 다른 욕심은 없었다.

곽설도 팽수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했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하필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인걸을 죽이고 같이 비무대회를 준비하지요. 대협들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소련주의 말에 적무단의 무인들은 비장한 기분을 느꼈다.

단순한 비무대회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사파의 앞날이 걸려있는 비무대회였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소련주님.”

결연한 의지를 다진 사람들이 흙먼지를 피워올리며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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