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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33화 (433/470)
  • 제433화

    433화

    아진은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처음에는 놀라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해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린린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도대체 이 녀석은 염마에게 무슨 짓을 해 놨기에. 얼마나 겁을 줘 놨으면 염마가 그 말을 들어준 거야?’

    린린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초조해서 아진은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서성였다.

    * * *

    제일조는 린린이 자기와 같은 속도로 신법을 펼치는 것을 알아차리고 몇 번이나 움찔했다.

    그러다가 린린의 등에 흑주가 바짝 붙어 있는 것을 알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린은 아진이 자신을 급히 찾는다는 것을 알고 정신없이 신법을 펼치고 있었다.

    모든 내공을 끌어 써서 일단 북리세가에 도착하면 그대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쉬지 못했다.

    린린의 뜻을 알아차린 흑주가 린린에게 붙어 내공을 불어넣고 있었다.

    소청이 섬풍대와 수련을 하는 동안 산본무관에서 놀고 있던 흑주는 제일조가 급히 날아가는 것을 보고 뭔가 일이 있나 보다고 생각하며 몸을 날렸다가 린린을 발견했다.

    흑주는 린린이 이렇게 서두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린린은 흑주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는 더욱 내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무리 바빠도 서신은 써 줄 것이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린린은 그저 아진에게 아무 일도 없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무사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속도로 달리자 어느새 북리세가에 이르렀다.

    그 거리를 원래 그렇게 빠르게 주파할 수 있는 거였던 건가 하면서 린린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제일조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린린이 북리세가로 들어가자 위사들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온 건지 물었다.

    한눈에 봐도 린린이 다급해 보여서 산본의가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했던 것이다.

    린린은 대답을 할 힘도 없어서 아진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고 그들은 아진이 머물고 있는 객당으로 린린을 데려다주었다.

    린린이 왔다는 소식은 금방 전해졌는데 린린이 다른 사람들은 보지도 않고 곧바로 객당으로 갔다는 말에 사람들의 걱정이 커졌다.

    특히나 북리소은은 산본의가에 문제가 생긴 건 줄 알고 깜짝 놀라서 객당으로 왔다.

    그러나 그녀는 린린을 보지 못했다.

    그곳에는 아진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두 사람이 어디로 간 거예요?”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을 할지 알지도 못한 채 아진은 린린을 데리고 북리세가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가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경험상, 객당에 머물고 있으면 언제든지 사고와 스승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엄청 빨리 왔네?”

    “흑주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흑주도 같이 왔어? 흑주는 어디에 있어?”

    “그러게. 모르겠네? 먹을 게 있는지 찾으러 갔나? 그런데 무슨 일이야?”

    린린의 말에 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린린. 내가 말을 해도 너는 못 믿을 거다. 아니. 나는 너한테 정말 놀랐어. 정말 존경스럽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소리를 하려고 나를 급하게 부른 건 아니잖아.”

    “린린. 너. 설 루주 기억하고 있지?”

    “설 루주? 설인정? 설인정은 갑자기 왜?”

    “너, 설 루주한테 염마 얘기한 적 있지?”

    린린은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다가 기가 막혀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아니야. 말이 돼.”

    “설마…….”

    “설마가 맞아. 사고님의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지. 그런데 루주였어. 루주가 염마에게 말했나 봐. 그리고 염마가 정말 루주 말을 들어 준 모양이야.”

    “말도…… 말도 안 돼. 세상에…….”

    린린은 깜짝 놀라서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린린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설인정이 아니었다면 린린이 신교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신교에서 린린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아진과 린린이 갈 때까지 혼자서 교주와 맞섰던 설인정이 돌아왔다.

    독고소영의 몸속에,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의 아이로.

    “그런데 루주도 웃긴다.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었을 것 같은데 네 주위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혼인을 할 생각을 안 하니까 참다 참다 그리로 간 모양이야. 그럴 거면 황제 폐하의 아이가 되지. 아닌가? 스승님의 아이가 더 나은가? 황제 폐하의 아이가 더 편할 것 같기는 한데.”

    “아니지. 나라고 해도 북리세가에서 태어나고 싶을 거야. 그러면 오라버니의 사매가 되는 거잖아. 햐. 나 정말 멋진 것 같아. 염마를 한 번 제대로 잡아 놓은 게 제대로 적중했네.”

    “그러게 말이다. 나도 죽으면 네 오라버니라고 말해야겠어.”

    “자주 써먹으면 안 좋을걸? 염마도 엄청 성격 안 좋은데.”

    그러다가 린린이 아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다른 분들도 알아?”

    “아직 말씀 못 드렸어. 싫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설인정을 왜? 신교라서?”

    그게 무슨 흠이 되는 거냐는 듯 린린이 말했고 아진은 그런 린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이해해줘. 스승님이랑 사고님이 그러셨다는 건 아니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건데 나는 이걸 우리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중에 꼭 말씀드려야 하는 게 아니면. 그리고 루주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모르잖아. 너도 생각을 해 봐.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아직 태어나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내가 비밀을 폭로해버리면 기분이 좋겠냐?”

    린린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무공을 전부 다 가르쳐줘야겠어. 설인정이 그건 정말 못 했는데 이번에는 태어나자마자 내가 온갖 좋은 걸 다 해 줄 거야.”

    “그래. 그러자. 나도 가르쳐줄게. 엄청 귀엽겠다. 그런데 너 울었냐?”

    “울기는 누가 울어?”

    “울었네, 뭐. 우니까 물만두 같네.”

    린린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 만두 타령을 할 거냐고 했고 아진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말도 없이 나와버려서 스승님이 걱정하시겠다는 말을 하고서.

    * * *

    아진이 돌아갔을 때 흑주는 기력이 쇠해져서 북리의천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스승님. 흑주에게 내공을 넣어주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어쩌겠냐. 영 힘을 못 쓰는데. 흑주한테 목숨을 빚진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아진이 오자 흑주는 아진에게로 휙 날아갔다.

    도움을 받아도 풍족한 집에서 도움을 받는 게 그나마 덜 미안하다는 듯이.

    아진은 저에게 온 흑주에게 마나를 마음껏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림자 용은 계속 그 안에서 버티고 있는 모양이구나. 죽지도 않고.”

    스승의 말에 아진도 흑주의 안에 들어있는 그림자 용을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이제 흑주를 제 집으로 여기는 듯했다.

    “아진아, 언젠가는 그림자 용이 너를 위해서 싸울 수도 있을까?”

    “그런 날은 오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런 날이 온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요.”

    “그래. 그림자 용이 나올 일은 영영 생기지 않으면 좋겠다. 그런데 린린은 왜 그렇게 급하게 왔다고 하더냐. 린린은 어디에 있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린린이 들어왔다.

    아진을 따라서 바로 오려고 했는데 북리소은에게 붙잡혀서 늦어졌다.

    북리소은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린린은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새 자기가 보고 싶어서 그런 모양이었다고 대충 둘러댔고 북리소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서 오너라, 린린.”

    린린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독고소영의 배를 보았다.

    “만져보고 싶으면 만져봐도 된다. 린린.”

    독고소영이 웃으며 말하자 린린이 그녀의 배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보았다.

    북리의천은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자기가 생각하기로 린린은 독고소영이 그렇게 말을 해도 배를 만져보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때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독고소영의 눈이 커진 채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발로 차. 그냥 차기만 하는 게 아니라 몸을 들썩거리는 것 같아. 린린이 손을 대준 게 좋은가 봐.”

    “아이가 린린을 좋아한다고? 나도 해 보자.”

    북리의천이 그새를 못 참고 독고소영의 배에 손을 댔다.

    나란히 앉아서 남의 배를 만지기에는 자세가 편하지 않아 린린이 잠시 물러났더니 독고소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리의천도 아이가 뛰지 않는 것을 보고 같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기는 린린이 더 좋은가 봐.”

    “그러면 서운한데?”

    그러면서도 북리의천은 린린에게 다시 만져보라고 했고 린린은 독고소영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배를 만졌다.

    그러자 아기가 다시 들썩거렸다.

    독고소영은 아기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아기는 의천이 싫은가 봐. 의천은 만지지 마.”

    북리의천은 허허 웃더니 아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배를 만져주게 했다.

    “희한하네. 왜 린린을 좋아하지?”

    린린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졌던 것이다.

    아진에게 듣지 않았다고 해도 린린은 자기가 바로 그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설인정이었다.

    * * *

    지독한 난산이었다.

    산통은 이틀이나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여태껏 그렇게 끔찍하게 산통을 겪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들 했다.

    북리소은과 아진이 독고소영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만약 아진이 계속해서 독고소영에게 내공을 주입해주지 않았다면 독고소영은 도중에 의식을 잃었을 것이다.

    그녀가 힘을 주지 않으면 아기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긴장감은 시간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아기가 무사히 태어날 거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고소영은 별개의 문제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에 그녀의 아기가 설인정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진은 그 자체로 기뻐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가 간과한 게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염마가 설인정의 환생에 조건을 건 거라면?

    설인정이 환생하는 대신 사고가 죽어야 하는 거라면?

    그러나 그는 그런 거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진이 아는 설인정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고소영이 린린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텐데 그랬을 리는 없을 듯했다.

    “사고님. 조금만 힘내세요. 사고님은 무사하실 것입니다. 아기도 반드시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

    “그래. 아진아.”

    독고소영은 가까스로 말을 했다.

    한 번씩 산통이 몸을 휩쓸고 지나가면 그녀는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냥 그대로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기도 태어날 수가 없기에 독고소영은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버텼다.

    다른 생명.

    그녀의 안에서 자라는 새로운 생명이 독고소영을 무섭도록 강해지게 만들고 있었다.

    독고소영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고 몇 번은 얼마간 실제로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곧 정신을 되찾았다.

    아진이 주입해주는 내공의 덕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이나 혼미해졌을 터였다.

    아진은 북리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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