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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29화 (429/470)

제429화

429화

“이번에는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좀 알면 좋을 텐데.”

“폐하. 그런데 폐하가 잘못 생각하신 것은 아닐까요? 두 사람은 그냥 서로를 오라버니와 누이로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 않은지요? 지금 두 사람을 보면 서로에 대한 마음은 그냥 딱 그 정도인 것 같은데요.”

황제와 염빈은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었다.

“아니야. 두 사람이 워낙 그런 쪽으로 맹탕이라서 그런 거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못 들었어? 아진은 헌터였어. 거기에서 거의 사십 년을 살았는데 좋아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잖아. 린린은 또 어떻고? 그래서 두 사람은 자기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할 거야.”

“신첩은 잘 모르겠습니다. 잘되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런데 소하 황녀는 정말 서 공자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저러다가 상처받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윤정효도 린린에게 정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그래요. 두 사람이 상처받을 것 같아요.”

염빈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황제는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원래 대의를 이루려고 하다 보면 희생도 나오고 그러는 법이야. 어쩔 수 없는 거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염빈. 내가 하는 말이 틀린 거라고 생각해? 그럼 내기를 해 볼까?”

내가 하는 말이 틀린 거라고 생각하냐는 말이 나왔을 때 백운표는 황제가 염빈에게 대노하고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가 내기를 해 보겠냐는 말에 경악했다.

그가 그동안 황제에 대해서 들었던 말은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폭군이 따로 없다고 했는데…….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교주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백운표는 서 공자와 주군을 보았다.

그리고 황제와 염빈이 나누던 얘기에 비추어 그들의 관계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러고 나자 그의 눈에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는 동안 서 공자는 자주 교주를 살폈다.

윤 공자가 교주의 옆에서 얘기를 하는 동안 교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서 공자는 계속 그런 교주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황녀가 말을 걸면 다시 황녀를 보면서 대답을 하거나 같이 말을 이어 나가거나 했는데 그러고도 금방 시선이 교주에게로 향했다.

교주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윤 공자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자기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건 알아차리지도 못한 건지 계속 얘기를 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백운표는 교주가 서 공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다른 사람과 있는 동안 짓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서 공자와 함께 있는 동안 주군의 표정이 얼마나 환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교주도 가끔씩 서 공자를 보았다.

그때마다 교주의 눈에 다른 빛이 떠올랐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던 눈에 기분 나쁜 기색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서 공자의 옆에 황녀가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확 상한 것 같았다.

교주에게 황녀는 어떤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교주의 뜻에 맞지 않으면 황녀 하나를 처리하는 것은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교주라는 것을 백운표는 잘 알고 있었다.

백운표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진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확실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한다고.

그때부터 백운표는 혼자서 계획을 세웠다.

두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는 천재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일지 모르지만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드러내고 확인하는 것만큼은 천치라고 할 만했다.

그는 즉각 사람들을 모았다.

마가의 공자들이었다.

그는 자기가 느낀 것을 말했고 공자들은 그의 말에 수긍했다.

그동안 신교에서 백운표가 해왔던 활약 덕분에 더욱 쉽게 믿어주었다.

린린이 갑자기 산본으로 가지 않고 신교로 방향을 틀었던 것은 그들 때문이었다.

교주님을 신교로 모시고 가서 작전을 세우자는 백운표의 말에 마가의 공자들이 합심을 하고 나섰다.

백운표는 신교에 흉흉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말하고 주군이 아니면 풀 수 없을 것 같다고 해서 린린을 천마신교로 데려가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신교에 가자마자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들켰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교주는 백운표의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한동안 그를 노려보았다.

죽일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백운표는 당당했다.

자기가 본 게 맞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백운표는 교주님도 교주님의 감정을 모르시는 거냐고 했고 교주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고 백운표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윤정효가 온 것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말한 것은 백운표의 생각이었다.

사실 윤정효는 연회 이후 황성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교주는 그럴듯한 생각이라고 여긴 듯 고개를 끄덕였고 백운표는 작전을 세워주었다.

돌아가시면 윤정효가 신교까지 따라와서 자신의 마음을 받아달라고 했다고 말을 해 보시라고 했고 교주는 그 계획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 계획에 맞춰 돌아왔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교주는 실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과감하게 질러버렸던 것이다.

* * *

“그러니까 내가 오라버니를 지켜줘야지. 가만히 놔두니까 별별 사람이 다 꼬이잖아.”

황녀가 무슨 일을 벌이고 갔는지 듣고 나자 린린은 짜증이 확 치밀었다.

“황녀가 황상의 총애를 받는 사람인가?”

린린이 묻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몰랐는데 그런 것 같았다.

“아. 짜증 나네. 신교로 안 가고 여기로 오는 거였는데.”

린린이 말했지만 아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린린이 신교로 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 건가 하는 생각을 아진은 정말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고 이곳에서 황녀와 마주쳤으면 린린은 아마 씻기 어려운 죄를 지었을 것이다.

린린이라면 그런 짓을 가뿐히 짓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수틀린다고 윤정효에게 협박을 한 전력도 있지 않았던가.

그것도 황상이 연 연회에서.

아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희한하게 일이 진행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다가 황녀가 하는 대로 휘둘리느니 차라리 린린의 정혼자 역할을 하는 게 훨씬 나았다.

“계약 결혼 같은 거네?”

아진의 말에 그건 또 무슨 말이냐며 린린이 물었다.

“말 그대로야. 계약으로 혼인 관계를 이어가는 거지. 너랑 나랑 모두 그럴 이유가 있잖아.”

“그렇지.”

“그래. 그러니까 서로의 정혼자 역할을 하는 거야.”

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 놈의 오라버니가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건지.

정말 자기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아니라고 백운표가 말을 해 주었다.

다만 서 공자님은 자신의 감정에 워낙 관심이 없고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인 것 같으니까 그냥 교주님이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될 것 같다고 확신에 차서 말을 했던 것이다.

서도진이 원래 살던 곳에서 어떻게 살았었는지 알고 있어서 린린도 그 말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는 제대로 정혼자 노릇을 해 보겠다고 별렀다.

‘재미있겠잖아?’

정혼자들끼리 뭘 하는지는 몰랐지만 일단 하월이 정 소저에게 하는 것처럼 해 주겠지? 하면서 은근히 기대를 해 보기도 했다.

백운표는 잘 모르는 게 있으면 벽예월 소저에게 도움을 청하면 될 것 같다고 했는데 린린은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여겼다.

린린은 벽예월이 아진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짓을 한다는 말인가.

그것보다는 그냥 차라리 북리소은에게 묻는 게 나을 듯했다.

린린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진 역시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정혼자 노릇을 하기로 하고 아진은 과연 잘한 짓인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기는 어려웠다.

린린이 가만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그 자신도 그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린린…… 좋지.’

린린은 자신의 누이가 아니었고 도종의 말대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

혈육을 떠나서 그런 사람은 린린이었다.

혈육을 포함하고서도.

아니. 혈육이라고 할 사람도 이곳에 없기는 했다.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자신에게 맡겨두고 있었으면 그 일은 영영 끝나지 않았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두 사람이 모두 그 문제로 고민을 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정혼자인 척을 하기로 했다는 것일 뿐 다른 건 모두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정혼을 한 것처럼 하기로 했다는 것도 나중에는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한 번 그 말이 오갔다는 것 때문에 가끔씩 서로를 보면 좀 애틋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피식 웃음이 나와버리기도 했고.

선이남에게서는 한 번 서신이 전해졌는데 황녀가 돌아간 후 황궁이 조금 시끄럽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황녀는 자기가 크게 모욕을 당했다고 하면서 황제에게 산본의가에서의 일을 고했지만 황녀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선이남에 의해 그 일의 전말이 황제에게 고해진 상태였다.

선이남은 황제에게 황녀가 거짓으로 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 두었고 황제도 그럴 거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황녀에게서 거짓이 튀어나오자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황녀 소하는 자기가 말을 하면 부황이 당연히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을 예뻐해 준다고 생각하면서 함부로 굴었다가, 자기가 그간 부황의 진면목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황제는 황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가 한 말 중에 거짓이 없냐고.

네가 딸이라고는 하지만 황제를 기망하는 것은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황녀는 멈칫거리다가 결국 실토할 수밖에 없었고 황제는 노여움을 금치 못했다.

실토한다고 하면서 한 말도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빼놓고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왜곡했다.

황제가 미리 듣지 않았다면 황녀가 하는 말을 듣고 황녀가 산본에 가서 서러운 일을 겪고 왔다고 생각하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었을 터였다.

황제는 미리 소식을 전해 준 아진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자기가 큰 실수를 할 뻔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너를 잘못 알았구나. 내가 너를 잘못 키웠다. 너를 아꼈거늘 너는 나에게 이리 갚는구나.”

황제가 한 말은 황녀의 가슴에 무섭게 박혔다.

“나는 네가 아진의 짝이 되면 좋지 않을까 했다. 그렇게 해서 아진이 내 사위가 되면 좋겠다는 상상도 했고 좋은 꿈을 꾸었다. 그런데 네가 이리 나에게 갚는구나. 소하야.”

“폐…… 폐하…….”

황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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