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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28화 (428/470)
  • 제428화

    428화

    “얘기를 해도 가주님이나 대공자님이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공자님은 남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얘기도 못 하시잖아요.”

    “아니에요. 벽 소저. 예전의 제가 아닌데요?”

    “어제만 봐도 그러고 계시던데 무슨 소리예요. 제가 공자님을 몰라요? 공자님은 그냥 가만히 계세요. 입을 잘못 놀렸다가 산본의가가 멸문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공자님의 입은 그런 일도 넉넉히 만들어내고도 남을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벽예월이 웃어버렸다.

    그 일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는 듯이.

    “혹시 기분 풀린 거예요?”

    “풀렸어요. 고마워요.”

    “그럼 우선 산본무관에 가볼게요. 말은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 정말 말하면 안 돼요.”

    도대체 이 황녀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가 하면서 산본무관으로 갔더니 교두들이 황녀의 수행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며 얘기를 해 주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아주 그냥 다 휘젓고 다니는구만.’

    아진이 가까이 가자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산본무관에서는 해마다 많은 수의 무관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무관으로 임관하려면 산본무관을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자자하지. 그래서 그동안 무관을 배출해오던 곳들 사이에서 불만이 아주 많지. 그래도 어쩌겠느냐. 부황께서 전적으로 신뢰를 하시는데. 그래도 산적의 왈패들을 그렇게 높은 자리에 앉히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파격적인 행보이기는 했지.”

    “한때 잘못된 길에 빠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믿음직하게 황상 폐하를 보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두가 황녀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말하자 황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를 수행하던 자들은 교두에게 호통을 쳤다.

    아진은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며 다가갔다.

    “산본의가는 참으로 희한한 곳이 아니냐. 어째 하나같이 이리들 반항적이라는 말이냐. 부황 폐하께서 너희의 재주를 좋게 여기신다고는 하나 그것을 믿고 너무 방자하게 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평소에 황실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오가기에 이렇게 방자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더 이상은 그냥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교두.”

    그러나 교두는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하지 않았고 다른 교두들도 긴장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당장 황녀 전하께 무릎 꿇고 사죄하지 못하겠느냐!”

    황녀의 호위 무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교두가 황녀를 향해 섰다.

    “제 말이 잘못된 것을 모르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러면 너를 벌할 수밖에 없겠구나. 너 같은 자가 무관의 교두라니. 산본무관이라는 것도 뻔하구나. 너를 황성으로 압송해 벌을 받게 할 것이다.”

    황녀의 말에 그녀의 호위 무인들이 교두를 붙잡으려 했고 아진은 보법을 밟아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지요. 황녀 전하.”

    아진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 돌아선 황녀는 아진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진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아진의 얼굴을 보니 전부터 본 것 같았다.

    “공자…….”

    “교두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틀린 부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두님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압송해서 벌을 내리겠다고 하시는 것은 아무리 황녀 전하라고 해도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양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지금껏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것을 황녀 전하께서 갑자기 뒤집으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공자!”

    황녀가 사나운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

    아진은 차라리 이런 모습을 하는 것이 상대하기가 낫다고 생각했다.

    기분은 그렇지 않으면서 가면을 쓴 것처럼 거짓된 감정을 드러내고 웃는 황녀를 상대하는 것은 정말 어렵고 불편했던 것이다.

    “황녀 전하는 황제 폐하께서 그토록 힘들여서 바로잡아 놓으신 것을 다시 넘어뜨리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황녀는 그 말에 얼굴이 화르르 붉어져서 아진을 쏘아보았다.

    “서 공자. 그동안 내가 서 공자를 나쁘게 보지 않았거늘 어찌 나에게 이런다는 말입니까!”

    “좋게 봐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나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좋은 얼굴로 친절을 베푸시면서 다른 사람이 애써 세워놓은 것을 쓰러뜨리고 다니면 그 사람을 어찌 대해야 하는 것인지요. 황녀 전하.”

    “……!!”

    황녀는 아진을 가만두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당장 할 말이 생각나지는 않는 듯했다.

    그녀의 곁에 있던 호위 무인들도 아진에게는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아진이라면 얼마든지 황제를 직접 알현하고 그 앞에서 자기를 위해 변호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부담이 갔던 것이다.

    아진은 황녀에게 돌아가 달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제 이 정도 되었으면 황녀가 스스로 떠나겠다고 말을 할 것 같아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아진이 그렇게 원하던 대로 황녀가 산본의가를 떠나버렸다.

    사람들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그대로 둬도 되는 것인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다가왔다.

    “괜찮을까, 아진아? 그런데 후련하기는 하다. 정말 그런 분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 아주 대놓고 못되게 구는 거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그냥 놔둘 수도 없고.”

    도종의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애로사항이 컸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황제 폐하를 먼저 뵙고 오는 게 낫지 않겠어? 황녀 전하가 말을 어떻게 전할지 모르잖아.”

    “그렇기는 한데…….”

    아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서신을 써서 선이남에게 보내놓는 것으로 했다.

    이곳에서의 일을 선이남에게 적어서 보내놓고 황궁에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면 제일조를 통해 소식을 보내달라고 한 것이다.

    “와……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이 열세 명이나 있는 거야. 아니지. 황녀 전하와 황자 전하들이 열 세분인 거고 황실 종친들까지 하면…… 거기다 고관대작들도 상대하기 만만한 사람들은 아니고…… 봐서 황실하고는 슬슬 거리를 두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해.”

    아진이 말하자 도종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진이 너는 이 일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해결 방법이 쉬울 것 같은데?”

    “뭔데?”

    “네가 혼인을 하면 되는 거야. 혼인이 싫으면 하다못해 정혼자가 있다는 사실이라도 밝혀. 그러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지.”

    “왜 결론이 그렇게 나오는데?”

    아진은 그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아서 물었다.

    “황녀 전하가 왜 그러신 것 같냐? 네 관심을 얻어보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거야. 관심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속한 곳에도 관심이 가고 그 사람이 어울리는 사람, 만나는 사람, 친하게 지내는 사람에 대해서도 궁금해지는 거거든. 그래서 한 번 알아보려고 한 건데 여기저기서 삐끗한 거지.”

    아진은 도종이 하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할지, 그러는 동안 린린이 돌아왔다.

    린린은 산본의가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진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오라버니?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누가 비무첩이라도 보냈어?”

    “비무첩을 보내면 그냥 비무를 하면 되는 거지 그게 대수로운 일이냐?”

    아진이 툴툴거리자 도종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고 린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가 그렇게 집요하지? 그래서 어쩌기로 했어?”

    “형님은 정혼자가 있다고 하래. 그러면 괜찮아질 거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린린?”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가만히 놔두면 앞으로는 더 시끄러워질 것 같아. 내가 신교에 있는 동안에 윤정효도 나를 찾아왔거든. 미친 것 같아. 내가 당장 꺼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했는데도 너무 멋지다고 하잖아.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싶은 걸 참느라고 내가 죽을 뻔했어.”

    “윤 공자가 거기에 갔다고?”

    황녀만 움직인 거면 모르겠는데 윤정효까지 린린을 찾아갔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그냥 우리가 정혼한 거로 하는 게 낫겠어.”

    린린이 말하자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아진은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했다.

    “뭐?”

    “그렇잖아. 이렇게라도 안 하면 두 찰거머리한테 벗어날 방법이 없어.”

    “그래도 인마. 우리는 남매잖아.”

    그러자 도종이 아진의 어깨에 팔을 떡하니 걸쳤다.

    “네가 계속 삽질을 하니까 린린이 추진하기로 한 것 같다. 그냥 린린 뜻대로 해. 나는 이 혼인 찬성한다.”

    “아니. 형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야. 아진아. 너는 정말 바보 같아. 그리고 누가 네 형님이냐? 나는 너랑 피 한 방울 안 섞였고 내 동생은 오직 린린뿐이야.”

    “아니. 형님. 정말 이러기야?”

    아진이 말을 하다가 린린을 힐끔 바라보았다.

    린린은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아진을 보고 있었다.

    “아니. 야. 린린.”

    린린이 싫은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아진은 이런 식으로 떠밀리는 게 싫었다.

    자신은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 더 감정에 둔한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기교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린린이 소중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꾸 묻는다고 급하게 자신의 안에서 답변을 찾아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다 보면 오히려 반발심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린린도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아닌가?

    린린의 얼굴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진은 그저 헛웃음이 났다.

    “린린. 너는 정말 아무렇지 않냐?”

    “자꾸 말 시키지 마. 나도 오라버니가 딱히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야. 그놈의 윤 공자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린린의 작고 소중한 양심은 그나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 * *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백씨마가의 공자인 백운표였다.

    백운표는 어렸을 때부터 천마신교의 꾀주머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영특했고 주위 분위기 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

    황궁 연회에 초대받은 백운표는 다른 마가의 공자들과 함께 연회에 갔다가 교주를 보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었는데 그곳에서 본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다 대단한 것 같았다.

    한동안 백운표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교주와 서 공자 사이의 분위기가 묘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 한 삼십 년은 부부로 지낸 것처럼 어떤 긴장감도 없이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 각각 다른 사람들이 들러붙었다.

    서 공자의 옆에는 황녀가 붙었고 교주의 옆에는 윤 공자가 붙었다.

    그들 외에도 다른 소저와 공자들이 엉겨 붙었지만 두 사람이 워낙 독보적이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은 힘을 못 쓰고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백운표의 눈에 황제와 염빈이 들어왔다.

    그들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서 공자와 교주를 지켜보았다.

    백운표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분명히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백운표는 대담하게 걸음을 옮겨서 황제와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감을 펼쳐 황제와 염빈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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