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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27화 (427/470)

제427화

427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을 지키던 위사가 급하게 달려와서 아진을 찾았다.

“공자님. 공자님. 세상에……! 화, 황녀 전하가 오셨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요?”

“……예?”

아진은 황녀가 여기에 왜 오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위사는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고 믿고 흥분해 있다가 아진의 표정을 보고 좋은 손님이 아닌가 보다고 생각했다.

“저 없다고 하시면 안 될까요?”

“이미 계신다고 말씀을 드려놨는데요…….”

위사는 아진이 왜 황녀의 방문을 싫어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나쁜 분인가요, 공자님? 지금이라도 안 계신다고 할까요? 제가 잘못 알았다고 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요.”

“……아뇨. 그냥 제가 가겠습니다.”

황녀를 속인 죄로 위사에게 불똥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진은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아진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아진은 황녀 전하가 오셨다는 말을 전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빠르게 상황을 간파했다.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아진은 황녀가 왔다는 소식에 기운이 축 빠졌다.

아진은 황녀를 싫어한다.

황녀는 황궁에서 여기까지 올 정도로 의욕이 대단하다.

일단 거기까지만 정리를 해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있었다.

“힘내라, 아진아.”

도종이 주먹을 쥐어 보이자 아진은 자기가 도대체 어떻게 힘을 내야 하는 건가 하면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정문이 있는 쪽으로 가자 황녀가 먼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수행의 수만 해도 서른 명은 넘는 것 같았는데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아진에게 다가왔다.

황녀 전하께서 오셨으니 예를 갖추라는 뜻을 말과 표정으로 전하기에 아진은 황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서 공자님. 연회에서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은 게 아쉬워 이리 한 번 와 봤어요. 반가워하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산본의가, 산본의가 해서 한 번 와 보고 싶기는 했거든요.”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전하. 혹시 불편하신 곳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요.”

“그건 아니에요. 연회에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왔잖아요. 그 사람들을 보고 나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더군요. 그래서 외유를 하고 싶다고 부황 폐하께 말씀을 드렸더니 허락을 해 주셨어요. 행궁에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행궁보다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와 보고 싶었어요.”

“예. 전하.”

그러는 동안 가주와 가모가 나왔고 산본의가 내에 머물고 있던 지휘부가 거의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민폐였다.

황녀가 왔으니 안 나와볼 수도 없고, 환자를 보거나 다른 업무를 하던 사람들이 그 일을 그만두고 황녀에게 왔던 것이다.

황녀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여기는 듯 인자한 얼굴을 하고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반겨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환영받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답니다. 산본의가 분들에 대한 얘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요.”

아무래도 황녀는 눈치가 없는 것이 확실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아진이 그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황녀 전하. 진료를 하다가 오신 것이라 오래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군요. 어서들 돌아가 보세요. 환자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요.”

황녀는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지만 아진은 그녀의 얼굴이 잠깐 굳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전에도 그랬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고 있다고 해서 기분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거나 이해했다고 믿으면 안 되는 거였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듯 모두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 다 진료를 보는 건 아닐 텐데요. 가모도 진료를 하나요?”

황녀가 웃으면서 물었다.

그건 아닐 텐데 너무 과장한 게 아니냐는 것처럼.

“그건 아니지만 산본의가의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가 됩니다. 그리고 병의 치료를 다루는 것이라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지요.”

“내가 일부러 방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요. 서 공자. 내가 부른 게 아닌데 그 사람들이 인사를 하겠다고 온 거잖아요.”

“네. 맞습니다. 전하. 그런데 전하께서 오셨는데 나와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쩌라는 거죠?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서 공자는 내가 하는 일이 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에요. 연회 때도 그런 기색이더니. 도대체 얼마나 부황 폐하를 믿으면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황녀는 화가 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성격에 따라서 크게 폭발하며 소리를 지를 수도 있을 상황인 듯한데 그래도 그동안 교육을 잘 받고 스스로 자신을 통제해서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 저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정말 죄송하지만 이 말씀은 제가 드려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녀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아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와서 부담스러운가요?”

어떻게 그렇다고 말을 할까.

아진은 정말 갈등을 느꼈다.

“아닙니다. 전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본가 사람들이 오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왜요?”

“본가 사람들은 집중해야 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황녀 전하에 대한 대우를 소홀히 한다고 생각하실까 봐 걱정이 됩니다.”

“나도 그런 건 알아요. 대접 받으려고 온 것도 아니고요. 단지 이곳에 있고 싶었어요. 얘기도 나누고 싶었고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고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불편했다.

그러나 그 말은 앞으로도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게 더 불편했다.

“불편하게 하지 않을게요. 서 공자도 할 일이 있으면 그 일을 보도록 하세요.”

“…….”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가모와 벽예월이 왔다.

그사이에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하고 급하게 돌아온 듯했다.

“황녀 전하. 쉬실 곳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내가 불편하게 하는 모양이에요. 서 공자가 많이 언짢은 것 같습니다. 무서워요.”

황녀가 눈꼬리를 축 내리고 투덜거리듯이 말하자 가모가 깜짝 놀라며 긴장한 얼굴로 아진을 보았다.

그것은 벽예월도 마찬가지였다.

황녀는 장난을 한 거였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로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진이가 원래 말을 완곡하게 하는 법을 모릅니다. 전하.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지요.”

“나도 아진 공자라고 부르고 싶은데 그건 싫은 모양이에요. 산본의가 사람들은 모두 고집이 세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것 같아요. 이린 소저도 그랬답니다. 린린이라고 불렀다고 내각대학사의 손자에게 협박을 했지요. 그 자리에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부황 폐하까지도 계셨는데 말이지요.”

황녀는 정말 재미있지 않냐는 듯이 웃어가면서 얘기를 했지만 가모는 얼굴이 희게 변했다.

“전……하. 송구합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게 나에게 할 말인가요? 내각대학사의 손자인 윤 공자는 창피했겠지만 내가 당한 일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게 집안 내력인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그런가 보다고 이해했어요.”

그러면서 방긋 웃는데 아진은 속으로 마음을 굳혔다.

절대로 가까이 할 사람은 아니라고.

마치 예전의 하월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고 가까이 있다가는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릴 듯했던 것이다.

벽예월이 서둘러 황녀를 처소로 안내하자 가모가 슬쩍 빠져서 아진에게 다가왔다.

“아진아. 너는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왜요, 어머니? 그래도 제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황성에서만 사셔서 그런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러면 그때마다 네가 나서서 말씀을 드리려고?”

그러면서 가모가 웃었다.

아진은 어머니가 화가 난 건 아닌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그나마 마음을 놓았다.

“너는 이런 걸 모르지. 다른 건 다 잘하는 애가 이런 건 정말 둔하지. 황녀 전하는 아무래도 네가 마음에 든 것 같다. 그래서 너하고 잘해 보고 싶은 것 같은데 네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화가 나는 듯해. 마음은 급하고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자꾸 실수를 하시게 되는 모양이다.”

“여기에 얼마나 계시려고 하는 걸까요?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어머니.”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 네가 옆에 있으면 불안해서 안 되겠다.”

“그래도 제가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 낫지 않아.”

그러고는 아예 아진을 돌려세우고 등을 밀었다.

아진은 제발 황녀가 빨리 좀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황녀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황녀를 보면서 아진은 깨닫는 것이 많았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도 누군가의 앞에서 그렇게 눈치 없이 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황녀는 왜 그런 건지 연월랑이 자기와 말이 잘 통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연월랑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연월랑이 원래는 헌터였고 남자였다는 사실을 떠나서 그는 산본의가 의학당의 교수였다.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산본의가 의원들이 처리하지 못하는 어려운 수술도 집도를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황녀가 그런 연월랑을 붙잡고 있으려고 하면서 곳곳에서 차질이 생겼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황녀에게 그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아진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는 가모도 아진을 말리지 않았다

자기가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서 할 말이 없었다.

아진이 황녀를 찾아갔을 때 황녀는 그곳에 없었다.

이제는 또 누구에게 가 있는 건가 해서 아진이 황녀를 찾아다니자 벽예월과 함께 있는 걸 봤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곳을 찾아가자 시무룩한 얼굴의 벽예월이 혼자 있었다.

“벽 소저. 황녀 전하는요?”

“사라지셨어요.”

“어디로요?”

“산본무관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면서 가셨어요.”

“고마워요. 벽 소저.”

그러고 산본무관으로 가려던 아진은 벽예월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게 신경 쓰여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세요. 벽 소저? 혹시 황녀 전하가 이상한 말을 했어요?”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데요? 말해 보세요. 벽 소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저를 좋아하냐고 그러셨어요?”

벽예월은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을 안 하려고 해도 말할 때까지 아진이 계속 그곳에 있을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벽 소저. 이번에야말로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릴 테니까요.”

“안 돼요. 공자님. 공자님은 남의 기분 생각해서 말하는 법을 모르시잖아요. 잘못하면 큰일 나요.”

“왜 이러세요? 저도 이제 배려하면서 말을 잘 한다고요.”

“누가요? 공자님이요?”

벽예월은 웃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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