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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26화 (426/470)

제426화

426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린린이 갑자기 그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린린은 그때까지 정말 많이 참은 거였다.

염빈이 준 옷이라서 입고 오기는 했는데 뭐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고 파리떼가 꼬이는 것처럼 계속 재미없는 인간들이 주변에 모여드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신히 떼어내고 왔더니 또 자연스럽게 와서 헛소리를 하는 게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본심이 튀어나왔다.

윤정효는 그런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했다.

“린린 소저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 많이 긴장하신 모양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다른 분들도 그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이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윤 공자.”

린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린린을 아는 사람들은 윤정효에게 깊은 애도를 표했다.

“본좌는 너에게 이미 경고를 하였다. 지금 본좌에게 도전을 하고도 네놈이 살아날 수 있을 성싶으냐.”

윤정효는 아무리 그래도 그런 상황은 생각하지 못한 듯 깜짝 놀라며 린린을 보았다.

그러나 윤정효의 패거리 외에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 정도면 린린답지 않게 정말 많이 참은 거였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윤정효가 선을 넘어도 한참 전에 넘은 거였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황상께서 같이 계시는 자리만 아니었다면 네놈은 이미 전신 모공에서 피를 쏟았을 것이다.”

“……!!”

윤정효는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린린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이곳의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염빈을 바라보았다.

염빈도 일이 실패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선남선녀들을 잔뜩 불러놓고 연회를 열면 자연스럽게 소저와 공자들이 아진과 린린에게 다가갈 거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진과 린린이 경각심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꾸민 일이었는데 이 인간들은 무슨…….

아진은 무림의 후기지수들과 비무대회를 논하기 바빴고 린린은 윤정효를 죽이네 살리네 하고 있는 것을 보며 황제와 염빈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우리가 괜한 짓을 한 것 같구나. 염빈.”

“그런 듯합니다. 폐하.”

황제는 황녀 소하를 한 번 바라보았다.

소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아진이 있는 쪽을 힐끔거렸다.

아진이 마음에 있는 것 같은데 대차게 까이고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만약 아진이 린린에게 정말 관심이 없는 거라면 소하는 좋은 패라고 생각했다.

서도진이 사위가 된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진을 제 식구로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저절로 흥이 났다.

그러나 린린을 며느리로 들이려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말렸던가.

황제는 도대체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어 약이 올랐다.

왜 자꾸 주위 사람들에게 기대를 하도록 만드는 건가 해서.

* * *

산본으로 돌아간 아진은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추살조의 문제와 사련의 비무대회 문제로 수뇌부와 논의를 하느라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린린은 산본으로 오지 않고 마가의 공자들과 함께 신교로 돌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천마인데 한 번씩은 가 봐야 하지 않겠냐며 떠난 참이었다.

추살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수족을 제거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일단은 감찰을 강화하고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으로 각 사업장의 수장들이 결단을 내렸고 그 와중에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보고를 하기로 하고 그 일은 우선 일단락되었다.

사람들마다 크게 부담을 갖는 것을 보며 아진도 아주 몰아붙이지만은 않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분한 자정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화산파와 북궁세가에서 일어난 일이 산본의가에는 해당 사항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마냥 낙관적으로만 생각할 일은 아니기도 했다.

그 문제가 그렇게 처리되자 그다음에는 사련의 비무대회에 참가할 사람을 정하는 일로 분주해졌다.

산본의가는 각 사업장에서 비무대회에 참가하고 싶어 하는 신청자들을 받고 그들 사이에 간단한 비무를 해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내보내기로 했다.

산본의가 비무대회는 참가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어서 일단 원하는 사람은 모두 참가를 할 수 있도록 했었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산본무관이나 산본표국에서 그 이름을 걸고 참가했는데 예선에서 떨어지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무관과 표국의 명성과도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산본의가 비무대회가 열린 후 우승자와 본선 진출자들이 속한 세력은 크게 발전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산본의가에는 다시 활기가 넘쳤다.

‘청수랑 무린이는 잘 하고 있나?’

생각이 난 김에 두 사람이 수련하는 곳에 찾아간 아진은 두 진영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격전을 벌이는 모습을 목도했다.

한쪽은 청수가 이끌었고 다른 쪽은 무린이 이끌었다.

기본적으로는 섬풍대의 아이들이 검진을 만들고 청수와 무린이 빈 곳을 채우거나 빈틈을 노리며 수비와 공격에 가담하는 형식이었다.

상당히 놀랍고 감탄이 나왔지만 그중에도 허점은 있어서 아진은 그것을 잘 보아두었다.

아진이 온 것을 알아차린 교두가 먼저 다가와 아진에게 느낀 것을 알려달라고 했고 아진은 그 말을 들은 후에 아이들에게 얘기를 해 주었다.

“이것은 공자님이 아니면 절대로 하실 수 없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제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거든요.”

교두가 말하며 시간이 나는 대로 아이들을 같이 지도해 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했고 아진은 그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말 실력이 월등히 늘었구나. 이 정도까지 하려면 뼈를 깎는 훈련을 했을 텐데. 애썼다.”

아진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말하자 아이들은 그간의 노력이 모두 보상받은 것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아진이라면 그것을 전부 다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들은 얼마든지 참아가면서 훈련을 해나갈 수가 있었다.

아진은 교두들에게 사련의 소련주를 만난 이야기를 해 주었고 소련주가 섬풍대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교두들은 혹시 사련에서 섬풍대 아이들에게 이상한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니냐고 걱정하며 물었고 아진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 데려온 아이들 중에는 몸이 벌레에 먹히고 몸에서 괴물이 튀어나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잠시 동안이라도 사기에 완전히 장악되었을 거고 몸에 사기가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정순한 심법을 배우고 내공을 축기했지만 나중에는 그 기운이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도록 계속 마나를 불어넣었는데 아이들이 사기를 느껴보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가보는 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자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났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실 저는 그런 걸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그 기운이 지금도 몸에 남아 있다는 것은 몰랐거든요.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교두님들은 정말 잘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아이들이 지금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게 해 주셨고 그게 아이들을 안정시켰을 겁니다.”

교두들은 섬풍대 아이들에 대해 더 각별한 관심을 쏟게 될 듯했다.

* * *

급한 문제들을 어느 정도 처리하고 산본의가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을 때였다.

산본의가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사람은 모두 나이가 들기 마련이었고 그러면 아무리 건강하던 사람들도 몸에 문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밀려드는 환자의 수는 전보다 더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크게 줄지도 않은 듯했다.

다만 의원들이 워낙 숙련되고 의학당에서 배출된 의원의 수가 많아서 처리하는 속도가 빨라져 전보다는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일단 아진이 나타나면 의원들은 아진을 알차게 써먹었다.

아진도 일단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빼지 않고 열심히 진료를 했다.

마나를 사용해서 고치기보다는 연월랑에게 배운 것을 사용해서 치료했고 그것들이 점점 숙달되는 것을 느꼈다.

잘 안 되는 것은 좀 더 연습을 하기로 하고 자기가 벽에 부딪치면 그것은 연월랑에게 물어보았다.

연월랑은 그때마다 능숙하게 대답을 해 주었는데 아진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오래전에 배운 것일 텐데 이런 게 다 떠오릅니까?”

“아니죠. 잊어버린 게 정말 많아요. 그런데 여기에 있으면서 새롭게 배우게 된 게 많아서 그 간격이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연월랑은 이제 이곳에서의 삶에 각별한 정을 느끼는 듯했다.

“요즘에 서악이 때문에 웃겨 죽겠습니다.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자기 마음에 든다 싶은 여자가 있으면 우리 숙부님 어떠시냐고 하면서 저한테 자꾸 끌고 와요. 숙부라고 하면서 저한테 데려오니까 아이가 장난하는 줄 알고 다들 웃더라고요. 서악이가 보통 귀여운 게 아니잖아요? 잘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진은 상상도 못 한 얘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성과는 좀 있습니까?”

“전혀요. 서악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데려와서 내 마음에는 안 드네요. 린린 소저나 벽 소저처럼 생긴 사람을 데려와 달라고 했는데 자기 생각에는 그 사람들이 린린 소저랑 벽 소저 같았대요. 안면 인식 장애가 있는 것 같아요.”

아진은 한참이나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또 모르잖아요. 우리가 살던 곳에서도 동성애의 비율이 낮지도 않았고요. 여기에서도 분명히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요.”

좋게 생각을 해 보려고 하는 것 같더니 연월랑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역천마의가 소식을 전해왔는데 한번 시도를 해 보겠냐고 하더라고요. 일단 짐승들을 가지고 대법을 연습해봤는데 지금까지는 다 됐대요.”

“그래도 역천마의가 포기는 안 하고 계속 생각을 해 오고 있었나 보네요. 바쁜 사람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얘기를 듣고 고맙더라고요. 기대도 조금 생기고.”

“그래서 해 보겠다고 하셨습니까?”

“네. 해 보려고요. 확률은 반반이라고 하는데 만약에 잘 안 돼서 죽으면 공자가 살려주세요.”

“그러면 되겠네요. 역천마의가 그렇게까지 말을 했으면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역천마의는 린린이 가장 믿었던 사람이죠. 역천마의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연 군사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 테니까 최선을 다할 겁니다.”

연월랑은 갑작스러운 말에 적응이 안 되는 듯이 아진을 보았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갔다.

정작 그 말을 한 아진은 엄청나게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뭘 이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진은 주저하지 않고, 자기에게 소중한 많은 사람을 만들었다고 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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