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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25화 (425/470)
  • 제425화

    425화

    고마우면 고맙다는 말을 마음껏 해도 된다는 것 같아서 아진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폐하. 정말 이런 것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저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자리에서 형식적으로 웃고 얘기를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만남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고 신교와 사련에서 사람들을 초대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남은 좋지만 소저들과 만나는 것은 싫다?”

    “……예.”

    딱 그렇게 말을 하면 아진도 딱 그렇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 된다. 앞으로도 계속 방치하면 몇 년이 지나도 짝을 찾지 못할 거고 그러면 가모가 반드시 짐을 원망할 것이다.”

    “아닙니다. 폐하. 어머니는 저희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어차피 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짐은 계속 이렇게 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너만을 위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다. 린린의 나이가 벌써 몇이더냐. 너를 따라다니느라고 린린도 나이만 차고 있지 않으냐. 너는 너라고 해도 린린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마침 일이 잘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황제가 고개를 돌리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아진도 그곳을 바라보자 린린의 주변에 윤정효를 비롯해 수많은 공자들이 서서 말을 걸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제외되고 황성의 유력한 집안 자제들이 집중적으로 그녀와 함께 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말을 걸고 있었다.

    “린린도 즐거운 것 같구나.”

    황제의 말에 아진은 도대체 어느 부분이 그렇게 보이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린린은 그 어느 때보다 지겹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지 린린의 곁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린린에 대해 그동안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린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고 같이 있는 동안 한마디라도 더 하기 위해서 혈안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멀리서 보는 린린은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당연히 그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린린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린린을 얼마나 좋게 생각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염빈이 이번 연회를 위해서 린린에게 특별히 선물한 옷은 린린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단한 미모의 린린이 지금은 더욱 화사하게 빛났다.

    “저것 보아라. 린린도 웃지 않느냐. 린린도 분명 지금 이 시간이 좋은 것이다.”

    황제가 말했지만 아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그 웃음은 분명히 비웃는 거였는데…….

    그걸 다른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지 린린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정말 즐거워하고 감격스러워하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농담을 하는 듯했고 좋은 집안의 자제가 얘기를 하면 별것도 아닌 내용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교적인, 예의 때문에 웃어주는 웃음이었다.

    “하월에게 가 봐야겠군.”

    황제가 하월과 정유선에게 가자 황녀 소하가 다시 다가왔다.

    “부황 폐하의 기분이 정말 좋아 보여요. 염빈 마마가 돌아오시고 특히나 그러시죠.”

    소하는 정말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진은 소하가 염빈을 진심으로 환영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하의 어머니를 비롯해 황실 사람들 중 염빈이 돌아온 것을 좋게 여길 만한 사람은 없었다.

    황후의 자리가 비었다.

    그러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테고 자기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얼마쯤 기대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쟁에서 일찌감치 배제되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 자리를 노리는 것 같은 형국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염빈의 귀환은 아무리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동안 토번과의 성공적인 외교에 염빈이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에게 모두 알려져 있었다.

    그 공만 해도 결코 적지 않은데 황제의 정도 각별했다.

    그 멀리 있던 염빈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도 아닌 아진을 보냈고 그것만 해도 황상이 염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거였다.

    아진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은 채 황녀가 하는 말에 가끔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황녀는 아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운 듯했고 다른 사람이 다가와 인사를 하거나 대화에 함께 참여하려고 해도 은근히 거리를 두었다.

    “지금은 서 공자와 얘기를 하고 있으니 나중에 말을 나누도록 하지요.”

    온화하게 웃으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정리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아진은 황녀와 그러고 있는 시간이 점점 아까워졌다.

    그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이 다시 모여 자리를 갖는 것도 어려웠고 하다못해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얘기를 더 나눌 필요가 있었는데 황녀는 그 자리에서 아진을 자신의 옆에 세워놓고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듯했다.

    한두 번은 장단을 맞춰주었지만 끝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황녀 전하. 잠시 이야기를 나눠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하의 얼굴이 일순간 붉어졌고 늘 옷처럼 자연스럽게 걸치고 있던 웃음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 시간이 정말 짧아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할 정도이기는 했지만 아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안력은 웬만한 사람을 능가했고 강호에서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해도 오히려 그게 더 어려울 터였다.

    아진이 붙잡혀 있는 동안 자기들끼리 모여서 외딴 섬처럼 방치되고 있던 사련과 마가의 공자들은 아진이 다가가자 여명을 보는 것처럼 표정이 살아났다.

    “황제 폐하를 뵌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저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서 공자님은 이런 자리가 정말 익숙하신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황제 폐하도, 황녀 전하도 서 공자님을 편하게 생각하시고 아끼시는 게 눈에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전적으로 신임을 받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이런 모임은 저희와는 잘 안 맞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한 번 두 번 참가하다 보면 분위기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림인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을 말했다.

    “공자님. 산본의가 비무대회는 이제 다시 안 하시나요? 전에는 저희가 참가할 수 없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참가하고 싶은데 말이지요. 사정마가 함께 친목을 도모하고 화합을 한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사정마가 전처럼 대립하는 관계도 아니니 말입니다.”

    팽수혁의 말에 마가의 공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사련에서 참가하지 않았었군요. 우리 신교에서는 많은 분들이 나가셔서 뚜렷한 성과를 냈었지요.”

    그들은 마선을 자랑했고 금방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마가의 공자들도 산본의가 비무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신교는 거기에 참가라도 했었다며 자랑스러운 듯 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진은 팔이 안으로 굽기는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린린의 사람들이라고 그런 모습도 마냥 귀엽게만 보였던 것이다.

    “저는 다른 사람도 다른 사람이지만 섬풍대를 꼭 보고 싶습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실력을 지녔고 근성은 어른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라고 해서 저희 사련에서는 섬풍대를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팽수혁이 걸리는 게 있는 듯 아진을 보았다.

    “다른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닌데 혹시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섬풍대가 사도련의 제물이 되었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아닙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맞기도 할 겁니다. 나 역시 섬풍대에 큰 기대를 갖고 있고 앞으로 섬풍대가 강호에 한 획을 그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해 놓은 일이 있어서 무슨 말을 하건 눈치를 봐야 하지요. 무슨 꿍꿍이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하면서 의심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것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팽수혁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각자 나름의 입장이 있었고 거기에서 생기는 고민도 있었을 터였다.

    이야기를 깊이 나누다 보면 서로 막연한 의심이나 원망을 풀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진은 앞으로 이런 자리를 더 자주 만드는 것이 중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개인 간의 원한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여도 그것이 이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일로 번진다면 세력 간의 다툼으로, 그리고 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 밑에 있는 사람들도 같이 휘말리게 되는 것이라 책임감이 크게 느껴졌다.

    아진이 그런 이야기를 하자 함께 있던 이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은 역시 다르십니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계실 거라는 건 몰랐습니다만 그 부분도 미리 생각을 해야 하는 게 맞겠습니다.”

    다들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 모습들을 보였고 아진은 상당히 흡족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산본의가의 비무대회로 하지 말고 사련에서 그 일을 추진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한다고 하면 우리 산본의가에서도 대회에 참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진이 말하자 팽수혁이 깜짝 놀라며 함께 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이게 웬 횡재인가 하는 듯했다.

    솔직히 아진에게는 속셈이 있기도 했다.

    사파를 의도적으로 방치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한 번 알아볼 필요도 있었던 것이다.

    화산파와 북궁세가의 추살조를 보고 들으면서 산본의가에도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아진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였다.

    팽수혁은 그것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고 성공적인 비무대회를 통해 얻게 되는 이익과 영향에 흥분이 되는 듯했다.

    “정말 약속해주시는 것인지요. 공자님. 공자님이 참가해주신다고만 한다면 당연히 좋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성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소련주님이 련주님의 신임을 듬뿍 받고 계신 모양입니다.”

    단리마가의 공자가 부럽다는 듯이 말하자 사련에서 온 사람들이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련주의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덧 린린도 그 자리에 같이 와 있었고 소련주는 린린에게도 비무대회에 참가할 건지 물었다.

    “그래야지요. 우승을 하려면 일단 참가는 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리고 신교에서 부상을 지원하겠습니다.”

    “부상까지요. 그냥 참가만 해 주신다고 해도 감지덕지할 것 같은데…….”

    팽수혁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말했고 마가의 공자들은 역시 교주님이라면서 자랑스러운 표정을 했다.

    “린린 소저가 참가한다면 저도 가서 응원을 해야겠습니다. 저도 부상을 준비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어느새 나타난 윤정효가 자연스럽게 린린의 옆으로 가서 그윽한 시선으로 린린을 한 번 바라보더니 팽수혁에게 물었다.

    “서 소저라고 하거나 천마라고 부르시오. 윤 공자.”

    “하나 가까운 분들은 린린 소저라고 부르지 않는지요.”

    “잘 아십니다. 가까운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만 윤 공자가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깝기로 하자면 마가의 공자들이 훨씬 더 가깝습니다만 이 아이들이 나에게 린린 소저라고 부르던가요?”

    “소저…….”

    윤정효는 한 번 친한 척 좀 해 보려고 하다가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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