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화
424화
그 자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각자 언행을 토대로 상대에 대해 판단을 내리게 될 텐데 윤정효는 무리수를 두었다.
황상이 특별히 초대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부각될 거라고 생각하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긴장을 한 듯했다.
정사마의 후기지수들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고 때를 맞춰 하월이 나타났다.
하월은 정말 귀엽게 생긴 소저와 함께 왔는데 하월은 저런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한 번에 들었다.
“서 공자님. 서 소저.”
하월이 두 사람을 불러놓고 뻘쭘하게 서 있자 아진이 하월의 동행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하월 공자님이 어찌나 얘기를 많이 했는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것처럼 느껴졌는데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서도진이라고 합니다.”
“서이린입니다.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워요. 정말 예쁘시네요. 소저. 북궁 공자님이 침이 마르게 자랑을 하더니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연달아 좋은 말을 해 주자 잔뜩 긴장한 듯 움츠러들었던 소저가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정유선이라 합니다.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는 것이 없어서 실수가 많을 텐데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리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려요.”
“그런 거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실수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당당하게 구십시오. 그건 제 누이를 보면서 배워도 좋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제 누이가 최고지요.”
“그건 오라버니 말이 맞습니다. 그리고 한두 번 실수를 하다 보면 기대치가 낮아져서 잇따른 실수에도 다들 그러려니 하게 됩니다. 초반에 집중적으로 실수를 많이 하는 게 중요해요.”
린린이 말하자 하월이 한숨을 쉬었다.
정유선이 그런 계책이 있었던 건가! 하는 표정을 짓고 귀여운 아미에 힘을 주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것을 보고 아찔해졌다.
“북궁 공자님이 오늘 날을 잡으신 모양이군요. 보기가 좋습니다.”
윤정효가 말하자 하월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말을 걸었으니 알은척을 하기는 하지만 딱히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없는 듯했다.
내각대학사가 황제를 위해서 고초를 겪은 것을 알고 있던 아진은 그 모습이 아쉬웠다.
고생은 내각대학사가 하고 그 영광은 윤정효가 누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각대학사가 지금의 이 모습을 본다면 시름이 깊겠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하월을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정사마의 후기지수들은 그 유명한 북궁세가의 소가주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을 금치 못했다.
“오늘 이곳에 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부르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 자리에서 어떻게 있어야 할지 걱정이 많았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백씨마가의 공자가 활짝 웃으며 말하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동감이라는 듯이 그를 보며 마주 웃어주었는데 린린과 얼굴이 마주치자 금방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린린은 마가의 공자들이 처음 이런 자리에 나와서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상당히 염려스러웠다.
이건 그동안 전례가 없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은 건데 그들이 다른 곳도 다 이럴 거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다음에는 누이를 두고 오겠습니다. 누이만 없으면 훨씬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질 것 같습니다.”
아진이 말하자 백씨마가 공자가 정말 그런 것 같다며 해맑게 웃다가 다시 린린의 시선에 눈꼬리를 내렸다.
“누이야. 제발 눈에서 힘 좀 빼라. 나는 마가의 공자들이 활달해서 모두 좋은데 왜 이렇게 분위기를 망치지 못해 안달이야.”
아진이 린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말하자 마가의 공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의 누가 지존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을까 해서 그런 거였는데 린린이 화난 표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아직 황제와 염빈은 오지 않았고 그들은 한참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한쪽에서 소리가 들리고 궁인들이 수행을 하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황녀 소하였다.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황녀 전하라고 알려주고 먼저 읍하며 예를 갖추자 황녀가 고고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평소의 유순한 성격답게 자애로운 미소가 얼굴에 자연스럽게 얹어졌다.
“모두들 고개를 들도록 하세요. 염빈 마마가 돌아오신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니 모두 편하게들 얘기를 나누세요. 활발하게 얘기하는 모습이 좋아서 왔는데 모두 갑자기 조용해지니 이 사람이 민망합니다.”
어쩌면 말도 이렇게 착하게 할까.
아진은 정말 적응이 안 됐다.
목소리도 너무 부드럽고 고운 것이 정말 적응이 안 됐다.
염기 없는,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으면서 김치 한 조각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황녀 전하는 처음 뵙는 것 같아. 정말 아름다우시다. 그렇지, 오라버니?”
황녀가 윤정효 등과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며 린린이 물었다.
“착하게 생기셨지.”
“예쁘시잖아.”
“그래?”
“오라버니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건 주관적인 거니까.”
“그래서 오라버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그냥 그렇다는 거야.”
린린은 반드시 정확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이 집요했다.
“거참. 왜 이러실까?”
[확실하게 말해봐. 오라버니. 그래야 나중에 오라버니의 혼처를 알아볼 때 내가 거기에 맞춰서 고르지. 황녀 전하는 별로야?]
이제는 아주 전음으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말을 황녀가 듣고 상처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처럼.
[그런 생각인 거면 확실하게 말해야겠네. 예쁘신 건 맞는데 나는 저런 얼굴 안 좋아해.]
[왜?]
[평범하잖아.]
[저게 뭐가 평범해?]
[일단 재미가 없게 생겼잖아.]
[오라버니는 얼굴 보고 웃으려고 혼인해?]
[아, 남의 혼인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그만 물어봐! 이쪽으로 오시잖아!]
아진이 급히 웃음을 짓고 예의를 갖추자 황녀가 다가와 화사하게 웃었다.
“황궁에는 자주 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리 인사를 하는 것은 얼마 만입니까. 그래도 처음은 아니지요?”
아진도 헷갈렸지만 활짝 웃으면서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린린 소저가 맞죠? 이린 소저라고 부르는 게 좋은가요?”
“아……. 예. 황녀 전하.”
너무 과도하게 다가오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황녀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를 태울까.
황실 종친들이 황녀 소하에게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는 아진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황녀는 좋은 혼처를 얻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진은 이제 황녀가 적당히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멀리 가고 황녀는 아진에게 조금 더 가까이 왔다.
“염빈 마마를 모시고 왔다고 들었어요. 그 먼 길을. 부황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는 걸 마냥 부러워하기만 할 건 아닌 것 같아요. 워낙 믿으시니 공자님이 아니면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농담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아진은 그 말에 호응할 수가 없었다.
딸이 아버지에 대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용납이 된다고 해도 아진이 맞장구를 치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의 황제가 그에게 그러지는 않겠지만 말이 어떻게 전달될지 모르는 것이라 아진은 대답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말없이 웃기만 하는 것으로도 긍정했다고 이야기가 와전될 수도 있었다.
“나와 같이 있는 게 지루한가 봐요.”
“아닙니다. 황녀 전하.”
“다른 소저들이랑은 얘기를 잘 하던데. 웃기도 잘 하고요. 서 공자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야 저를 보신 일이 많지 않으니 당연할 것입니다. 황녀 전하.”
“그렇지 않아요. 나는 서 공자가 궁에 들어왔을 때 자주 봤어요. 그때마다 부황 폐하와 함께 있거나 선 부정과 있었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말을 건네기도 했고요. 나는 서 공자의 여러 모습을 알아요. 그때마다 주의 깊게 지켜봤거든요.”
“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대답을 해야 하고 할 말을 생각해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서 공자와 함께 얘기 나누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부황 폐하는 정말 서 공자를 많이 그리워하고 기다리시죠. 서 공자는 부황 폐하의 표정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와 서 공자의 앞에서 얼마나 다른지 모를 거예요. 서 공자는 서 공자를 보시는 모습만 봤을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정말 그래요. 그래서 나도 서 공자를 많이 기다렸죠. 처음에는 부황 폐하가 서 공자와 함께 계시면 기분이 좋아지시니까 자식 된 도리에서 부황 폐하가 기뻐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랬고 나중에는.”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염빈 마마 납시오.”
태감이 커다란 목소리로 그들의 등장을 알렸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모두 먼저들 와 있었구나. 이야기는 많이 나누었느냐. 각자가 짐이 준비한 선물이다. 그러니 서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각자의 재산으로 만들 거라. 알아두면 모두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 그렇지 않으냐.”
황제는 정말 그렇게 말할 만했다.
황제와 염빈은 제대로 차려입고 있어서 그들을 보자 연회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황제를 보고 긴장을 하며 몸이 굳은 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동안 황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즐기도록 하라며 자상하게 굴었다.
염빈도 그들에게 말을 걸어주며 분위기를 좋게 했고 아진은 황제가 왜 이 연회를 연 걸까 하며 속으로 생각을 해 보려 했다.
이유가 뭐든 간에 황제가 아니면 이렇게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한 번에 불러들이지 못할 듯했고 아진에게는 기회가 좋았다.
특히나 사련의 후계자와 만난 일은 더욱 의미가 컸다.
한 번은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기도 했는데 다른 일에 밀려 시도도 하지 못하던 것이 수월하게 풀렸던 것이다.
황제는 꼭 해야 할 일을 마친 것처럼 후련한 얼굴을 하고 아진에게로 왔다.
그때의 모습이 어찌나 후련해 보였는지 아진은 저절로 웃음을 지었다.
“어떠냐, 아진아. 소저들과는 이야기를 많이 해 봤느냐. 특별히 짐이 엄선해서 부른 아이들이다.”
“예?”
“너도 견식을 높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동안 짐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없는데 만나는 사람이 없느냐고 너만 다그친 것이 아니냐. 반성을 아주 많이 했어. 이제부터는 네가 만날 사람을 내가 찾아 주겠다. 집안은 다 좋으니 다른 것은 걱정할 것이 없을 거다. 조건은 내가 검증을 해 줄 것이니 너는 인물과 끌림만 보거라.”
“폐하…….”
정말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무슨 일을 꾸민 건지…….
아진이 그런 마음으로 그를 보고 있는데 황제는 당당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