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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23화 (423/470)
  • 제423화

    423화

    그동안 함께 얼굴을 보곤 하던 사람들은 아니었고 그들보다 나이대가 어렸다.

    그들을 보면서 아진은 그동안 자기가 같이 어울려 다니던 사람들의 연배가 자기보다 많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단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새롭게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사파의 사람들에, 천마신교의 인물들까지 오고 있었다.

    “주군!”

    천마신교의 사람들은 냉큼 달려와 린린의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들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린린이 그들에 대해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명문마가의 가주 직계들이라고 알려주었다.

    정사마 후기지수들이 모여든 곳 다른 쪽은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자리를 채웠다.

    그들은 선뜻 이쪽으로 오지 못하고 우선 자기들끼리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선은 이쪽을 향하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서 그러는 듯했다.

    “여기에는 어찌 온 것이냐.”

    린린이 묻자 단리마가의 공자가 입을 열었다.

    “황성에서 사람이 왔었습니다. 그리고 각 마가의 가주 직계들을 모두 모이게 하더니 저희를 지목하고 이날 연회에 참석하라고 했습니다. 빠져도 안 되고 늦어도 안 된다면서 엄포를 놓았습니다.”

    “무슨 일이라고 하더냐.”

    “염빈 마마의 환영을 위한 연회라고 했는데 좀 이상하기는 했습니다. 그런 연회라면 저희보다는 다른 분들이 오시는 게 더 낫지 않았겠는지요. 어른들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곳에 오게 된 것이 좋은 듯했다.

    황궁에 초대된 것도 좋았겠지만 특히나 교주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영광스러운 것 같았다.

    “뚫어지게 보지 마라. 이놈들아.”

    린린이 퉁명스럽게 말을 해도 마냥 좋은지 강아지들처럼 웃었다.

    “본좌의 오라비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뭣들 하는 것이냐.”

    린린의 말에 그들이 즉각 아진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내 누이 때문에 고생이 많습니다. 말만 이렇게 하는 것이지 속으로는 걱정을 많이 합니다. 신교를 오래 떠나 있는 것에 대해서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마음은 언제나 신교에 가 있습니다. 공자들에 대해서도 늘 좋은 말을 하고.”

    그러나 아진은 말을 다 끝맺지도 못했다.

    “그럴 리가 없으니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자님. 저희 주군이 어떤 분인지 저희가 모르겠는지요. 그래도 이번 생에는 확실히 전보다는 나으시다고…….”

    백씨마가의 공자가 신이 나서 떠들어대다가 린린의 눈초리를 느꼈는지 당장 꼬리를 내렸다.

    분위기를 좋게 해보겠다고 활달하게 나섰다가 단박에 찌그러지는 것을 보며 아진이 린린을 다그쳤다.

    “너는 왜 그러느냐.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봤으면 너도 좀 웃어라.”

    “나는 일단 이 옷을 입고 있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빠.”

    린린이 투덜거리자 마가의 공자들이 저마다 오늘은 정말 고우시다면서 린린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애를 썼다.

    “되었다.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여기에 있지 않아도 되니 흩어져라. 덥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듣고 흩어졌다가도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다시 돌아왔다.

    강아지들이 엄마 품을 떠나지 못하고 근처에서 맴도는 것 같아서 아진의 눈에는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너는 좀 상냥하게 대해줘라, 린린. 끝나면 또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잖아. 막상 눈에 보이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잘해 주지 못한 걸 후회할 거면서. 너는 왜 항상 후회만 반복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내가 너를 몰라?”

    “모르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잖아.”

    아진은 무슨 말을 하겠냐고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는 동안 아진에게 몇 사람이 다가왔다.

    권문세가의 자제들이었는데 그중에는 내각대학사의 손자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서 공자님. 윤정효라고 합니다. 내각대학사께서 제 외조부님이 되십니다.”

    그는 예의 바른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서도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할아버님께서 공자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껏 살면서 할아버님께 칭찬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저로서는 늘 서 공자님이 부럽고 질투도 좀 했습니다.”

    한눈에 봐도 수려한 얼굴인 데다 말주변도 좋은 걸 보니 웬만한 사람들은 몇 번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만 하면 호감을 느낄 것 같았다.

    “오늘 궁에 오면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라고 하시더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말을 하던 윤정효의 시선이 린린에게로 향했다.

    “서 소저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은데 소개를 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눈앞에 서 있고, 이미 린린이 누구인지도 아는 것 같은데 왜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걸까 하며 아진이 린린을 보았다.

    “인사해라. 린린.”

    “서이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린린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 전까지 자기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마가의 공자들을 훠이훠이 쫓고 난 직후라 말투가 아직 천마의 말투였다.

    본좌는 서이린이다 라고 말할 뻔하다가 급히 본좌라는 말을 뺀 자신이 기특할 지경이었다.

    “서 소저에 대해 어찌나 말을 많이 들었는지 처음 보는 게 아닌 것 같고 저는 제법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말을 하면서 윤정효가 부드러운 입매를 올리며 연신 웃음을 지었다.

    그것참.

    기분이 나쁘네.

    “황궁에 온 것은 처음입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소저. 궁중 예법도 모르고 궁의 지리도 알지 못해서 오는 길에 많이 헤맸습니다.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임관하여 황상을 보필하여야 할 텐데 아직은 갈 길이 먼 듯합니다.”

    “예.”

    린린은 가볍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 했으니 이제 우리는 그만 친해지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을 그 인사에 담았다.

    윤정효도 린린이 길게 얘기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꼈는지 다시 웃음 지으며 고개를 숙이더니 다른 사람들에게로 갔다.

    이때다 싶었는지 마가의 공자들이 다시 다가오려 하다가 린린의 눈초리에 어깨가 축 처진 채 다른 곳으로 갔다.

    “너는 정말 못됐다. 린린. 아는 사람도 없는데 좀 잘해 줄 것이지.”

    그러고는 아진이 먼저 그들에게 가서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소개해주자 마가의 공자들은 금방 기가 살았다.

    아진이 가면 저절로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소외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천마신교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어왔었기에 조금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그사이에 편견이 많이 사라져 그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서 공자님께 인사드립니다. 사련의 소련주 팽수혁이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는 남자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가와 말했다.

    체격은 린린 정도로 작았는데 틈도 없이 단단한 느낌이었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주위에 몇 사람이 함께 있다가 같이 인사를 했다.

    안 좋은 인식 때문에 사도련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못하고 사련이라고 부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이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나이에 벌써 소련주의 자리를 확고히 보장받은 것을 보며 팽수혁의 실력이 궁금해졌다.

    “표정이 워낙 없는 얼굴이라 이런 것일 뿐이고 지금 굉장히 기쁜 상태입니다, 공자님.”

    그 말에 아진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정은 잘 압니다. 저도 표정 때문에 오해를 자주 받아서 말입니다. 먼저 인사를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파의 재건에 공자님의 공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곪은 것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련의 어른들은 모두 공자님께 큰 빚을 졌다고들 말씀하십니다. 혹여 제가 인사드리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으실까 염려했는데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원망한다고 해도, 미워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텐데 먼저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 주셔서 감동했습니다.”

    팽수혁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사련의 전신이었던 사도련 때문에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산본무관의 섬풍대로 활약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함께 만남을 갖고 견식을 청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것은 제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서 확실하게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만남을 지속한다면 좋겠군요.”

    “이렇게 좋게 말씀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실은 사련이 규모를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그게 여러모로 눈치가 보이고 의도가 불순하게 비칠까 봐 속앓이가 많았습니다.”

    “사련의 순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에 정파의 어른들과 함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싶군요.”

    그러자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팽수혁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다리를 놔 주실 수 있겠는지요. 공자님. 공자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면 훨씬 편하게 성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의 의견 차이도 알 수 있고 의견 차이가 나는 지점도 알 수 있어서 그것은 아진으로서도 적극 권장할 만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었다.

    한두 마디를 하다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리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소련주님은 연치도 어린 것 같은데 사련을 생각하는 마음이 큰 것 같습니다. 많이 배웁니다.”

    단리마가의 공자가 말하자 팽수혁이 어색한 듯 손을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공자님들이 먼저 이렇게 맞아주시지 않았다면 말씀을 드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워낙 좋은 자리라서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교주님을 뵙게 된 것도 영광입니다. 인사가 계속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팽수혁은 그렇지 않아도 린린에게 바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가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그러지 못한 듯했다.

    마가의 공자들은 자기들의 교주가 사련의 소련주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진 듯했다.

    모인 사람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각자 정사마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들이 모두 모인 거나 마찬가지여서 확실히 의미가 컸다.

    황제가 무슨 이유로 그들을 전부 모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동안 그런 이야기가 계속 오고 갔다.

    “황성에 무림인이 들어오는 것이 한동안 엄격히 금지되었었는데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무림인들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윤정효가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의 근간에 깔린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서도 일단은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이라 비약을 하지는 않고 다들 그 말을 들었다.

    “무림인들이 지금처럼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세를 낮추고 황상 폐하의 명을 따른다면 태평성대가 열릴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그랬다.

    어떻게 표현을 하느냐에 따라서 위험한 말이 편안하게 들리기도 하고 어려운 말이 기껍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대놓고 상대를 깎아내리려 하면 당연히 반발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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