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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22화 (422/470)
  • 제422화

    422화

    아진이 거기에 대해 아는 게 있냐는 표정으로 린린을 보았지만 린린은 이제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 얼굴이었다.

    “하월. 좋아한다던 소저와 같이 오도록 해라.”

    하월은 얼굴이 확 붉어진 채 아진을 보았다.

    공자가 말했냐는 얼굴이었는데 아진은 억울했다.

    그리고 린린을 보았더니 린린이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그런 건 잊지 않고 말씀드리는 게 좋습니다. 그런 일을 아셨는데 폐하께서 그냥 넘어가시겠는지요. 최소한 황금 다섯 관은 내리실 것이니 그런 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나한테 고마울 테니 황금 한 관은 넘기세요.”

    하월은 깊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까지 참고 사는 나도 있으니 이번에는 공자가 참으십시오.”

    “예.”

    아진과 하월이 그러는 것을 보고 황제가 빙긋이 웃었다.

    그들이 물러나려 하자 염빈이 린린을 불렀다.

    “이린 소저는 잠시 내 궁으로 같이 가자.”

    “……예?”

    ‘예?’라고 했지만 그 말이 ‘아니. 왜 또요?’라고 들린다고 생각한 것은 아진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신지요. 마마?”

    아진이 조심스럽게 묻자 염빈이 웃었다.

    “그것은 비밀이니 서 공자는 상관치 마. 북궁세가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곳으로 보내주지.”

    “저희 누이가 궁중 예절을 잘 몰라서 마마께 심려 끼칠 일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인데요…… 제가 같이 있으면 안 될지요?”

    “응. 안 돼. 이린 소저가 그런 사람인 걸 내가 모르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 있어.”

    염빈은 굉장히 흥에 겨운 것 같아 보였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토번에서 염빈 마마를 모셔오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 * *

    하월과 먼저 북궁세가로 온 아진은 전혀 예기치 않던 술자리를 가졌다.

    술을 마시지 않겠냐는 하월의 말에 혹시 할 얘기가 있는 건가 해서 대작을 해 주었다.

    황제가 예물 얘기만 안 했어도 아진의 작고 소중한 양심이 가책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는 그럴 만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불쌍하기도 했었다.

    술이 들어가자 하월은 그동안 살아왔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얘기했다.

    “저는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는데…… 작은 형님을 죽게 했던 그때입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번에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 일이 지금도 후회됩니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진은 다른 사람이 갑자기 자기 앞에서 너무 솔직해지면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하월이라면 이런 얘기를 할 상대가 전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진 자신이라면 곳곳에 차고 넘치도록 있었고 문득 그게 자신이 받은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겠습니까. 살면서 갚아야겠지요.”

    “내가 행복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아진은 하월이 왜 그런 걸 자기에게 말하는 걸까 했다.

    자기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그러나 아진은 후회되는 일이 많지 않았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 돌아보지는 않는 편이었다.

    과거에 연연하다 보면 하지 않아도 될 실수까지 더 많아질까 봐 일부러 더 그러는 것도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더 하다가 저에게 마련된 처소로 돌아가서 명상을 하고 있는데 린린이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린린? 염빈 마마가 뭐라고 하셔? 실수한 건 없어? 왜 부르신 거야?”

    “그냥. 연회 때 입으라고 옷을 주셨어.”

    “옷을? 왜?”

    “그러게.”

    린린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황궁에 오는 게 아니었어. 그냥 한두 사람 비위를 맞춰주다 보니까 이제는 웬…….”

    염빈까지 자기를 이리저리 쥐고 흔들려고 한다고 불평을 하려는 것 같았다.

    “린린. 조심 좀 해. 그게 아무리 본심이라고 해도 항상 말을 조심해. 나는 너만 보면 무서워죽겠다. 그러다가 갑자기 폭탄을 터뜨릴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돼.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런 소리도 안 해.”

    아진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우리 정말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거야, 오라버니? 우리가 이런 것까지 들어드려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이번까지는 들어드리자, 린린. 그래놓고 돌아가서 몇 년 동안 안 오는 거야.”

    “아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 거면 괜찮지. 좋아.”

    린린은 금방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린린에 이어 이번에는 아진까지.

    황궁에서 옷이 전해졌다.

    엄청나게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옷을 받아 들고 아진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를 마음대로 꾸미려는 것 같아서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옷을 하사받으면 감격스러워할 텐데 워낙 그들 남매가 희한했다.

    아진은 그러면서 린린에게 했던 말을 다시 되뇌었다.

    이번에 내려가면 5년은, 적어도 3년은 여기에 안 온다.

    그렇게 생각하면 겨우 참을 수가 있었다.

    하월은 북궁세가의 사업 때문에 바빴는데 세가의 사업장에 다니는 동안 아진과 린린이 자기와 같이 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월도 두 사람의 평가를 듣고 싶어 했는데 아진과 린린은 그 엄청난 규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곤 했다.

    산본이 아무리 커졌다고는 해도 황성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워낙 사람이 많고 그에 따라 돈이 모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듯했다.

    상단의 규모에 두 사람이 놀라는 것을 보고 하월이 웃더니 그런 상단이 황성에만 세 개가 더 있다고 했다.

    “우리도 이참에 산본은 정리하고 이리로 올라올까, 오라버니? 돈은 여기에 다 있는 것 같은데?”

    린린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하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하게 생각해 볼 일인 것 같아. 본가는 황성에 지부만 몇 개 내놓고 있는데 여기에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아.”

    그러자 하월이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정말 진지하게 하는 말인 건지 알고 싶은 얼굴이었다.

    만약 산본의가가 움직이기로 한다면 북궁세가는 치명타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 노릇을 하는 것이라 만약 산본의가가 온다고 하면 북궁세가도 지금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서 이것이 가능했지만, 산본의가가 이곳으로 온다면 황상은 당장 산본의가를 도와주려고 할 터였다.

    그러나 북궁세가의 세력이 약화될 수도 있으니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월이 긴장한 것을 보고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고 해도 어머니께서 산본을 떠나려고 하지 않으실 거예요. 어머니는 돈을 위해서 산본에 계시는 건 아니니까요.”

    린린이 하월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말했다.

    “돈을 버는 게 목적이면 작은 도시에도 업장을 냈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잖아요. 부모님은 관리가 가능한 선에서만 확장을 하고 싶어 하시고 두 분은 산본을 떠날 생각이 없으세요. 그러니까 황성까지 더 확장을 하려고는 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아…….”

    하월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북궁세가의 사업장에서는 그런 일이 없습니까?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뇌물을 받는다거나 권력을 남용한다거나 하는 일요.”

    아진이 묻자 하월이 말도 못 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세가의 무사가 시비를 걸고 양민을 죽이는가 하면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 겁간을 하고 불을 지르고 도망치기도 하고 도박 빚을 갚는다면서 표국의 표두가 돈을 가지고 도망치는 일까지 매일 수십 건씩 일이 터지는 것 같습니다.”

    상상 이상의 이야기가 쏟아지는 통에 아진과 린린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산본의가에서 지부를 찾아다니면서 시찰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는 선을 너무 넘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아진은 북궁세가에서 어떤 식으로 방법을 찾았을지 궁금했다.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북궁세가가 먼저 특단의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황상은 북궁세가에 베푼 호의를 얼마든지 거둘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북궁세가의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될 터였다.

    하월이라면 개개인의 일탈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묻자 하월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여러 방법을 찾다가 추살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일으킨 자들을 잡아다가 피해자의 유족에게 내주었습니다. 피해자의 유족은 그자를 죽여도 됩니다. 그렇게 했더니 전보다 확실히 그런 일이 줄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워낙 많은 힘이 주어지고 사업장마다 돈이 많다 보니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북궁세가에서도 추살조를 운영합니까?”

    “예. 어쩌다 보니 요즘에는 추살조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그러면서 하월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산본의가에는 추살조가 없습니까? 그곳이야말로 생겼을 것 같은데요. 그곳이야말로 지부의 관리에 엄격한 곳이 아닙니까.”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요즘에는 통제가 잘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자 하월이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게 그럴까요?”

    아진은 린린을 보았고 린린도 장담을 하지는 못하는 얼굴이었다.

    “사람들을 믿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인간 본성일 겁니다. 남들보다 더 잘되고 싶고 남들의 위에 오르고 싶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좌절을 자주 겪다 보면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겁니다. 만약 아직 추살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공자님이 제의를 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말이 맞긴 해. 우리가 이렇게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았다면 훨씬 전에 일이 터졌을 거야.”

    린린의 말을 들으면서 아진도 어느새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해진 몸을 유지하기 위해 이제는 추살조를 만들어야 할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선제적으로 대응을 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 때문에 본체가 쓰러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냥 미루기만 할 것도 아닐 듯했다.

    * * *

    시간이 언제 그렇게 흘렀는지 모르는 사이에 연회 날이 다가왔다.

    하월은 교제하는 소저를 데리고 함께 오기로 했고 아진과 린린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연회는 황궁에서 열렸다.

    북궁세가의 가주도 초대받을 줄 알았는데 그는 잘 다녀오라며 자기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가만 보니 젊은 사람들만 초대된 듯했다.

    그 사실은 황궁에 가서 더욱 확실해졌다.

    선이남과 남이천도 초대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아진과 린린이 희한하다는 듯이 서로를 보았다.

    그러는 동안 하나둘, 연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색색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아진과 린린 또래의 선남선녀들이었다.

    “뭐지?”

    아진은 황제가 뭔가 희한한 일을 준비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이렇게 골라왔을까 싶을 정도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외양이 모두 뛰어났다.

    한 번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만한 얼굴이었는데 한마디로 물이 좋았다.

    “서 공자님이 아니십니까!”

    어디선가 우렁찬 소리가 나서 돌아보자 남궁세가의 공자였다.

    그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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