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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21화 (421/470)

제421화

421화

“왜? 아직도 말을 하지 않은 거야?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건 다들 아는 일인데. 그 후로 그 일이 궁금해서 사신이 오갈 때마다 열심히 물었지. 폐하께서도 내가 그걸 궁금해하는 걸 아시고 그 일을 자세히 적어서 보내셨고 말이야.”

염빈은 그 반응이 더 놀랍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마,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희는 남매입니다.”

아진이 정신을 차리고 말하자 염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한심한 사람이 다 있나. 서 공자. 헛똑똑이군. 헛똑똑이야.”

“아니. 대체 어느 지점에서요. 마마?”

“아니. 그보다 이린 소저. 이린 소저야말로 그렇게 안 봤는데 맹탕이야. 서 공자는 눈치가 없어서 그렇다 쳐도 이린 소저라도 나섰어야지.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말을 못 하고 있다가는 나처럼 된다고. 나를 봐. 얼마나 허무해? 좋은 시절을 그냥 다 날려버렸잖아. 서 공자가 가져다준 귀한 약 덕분에 이나마 유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젊었을 때 욕심을 부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아니. 마마. 그건…….”

린린은 어쩌다가 자기가 혼이 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런 당혹스러운 얘기가 나오면 바쁜 일이 있어서 다음에 오겠다고 하면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국경도 못 넘었는데 여기에다 염빈을 내버리고 갈 수도 없는 일이고.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염빈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아니. 왜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는 거지?’

‘오라버니가 말씀 좀 잘 드려봐!’

두 사람은 서로 눈으로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염빈은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정말 좋아하고 있어. 그건 내가 잘 알아. 두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걸 알 수밖에 없을걸? 내 말이 틀린 것 같으면 지금부터 생각을 해 봐. 불붙은 전각이 쓰러져 내리는데 서 공자가 그 안에 있어. 이린 소저. 들어갈 것 같아. 못 할 것 같아?”

“당연히 들어가죠. 그런데 저에게는 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마마.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 안에 계신다고 해도 그럴 거고 큰 오라버니나 랑랑이 있다고 해도 그럴 거예요. 역천마의가 있어도 그럴 거고요. 그럴 사람이 천 명 정도는 될 것 같은데요? 저는 죽는 게 두렵지 않거든요. 죽으면 염마를 만나서 좋은 자리로 한 번 더 부탁한다고 말을 해도 되고요.”

염빈은 자기가 예를 아주 잘못 든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이린 소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에잇! 뭐라고 예를 들어야 하는 거야? 좋아. 염마가 바뀌었다고 해봐. 염마가 죽고 후계가 자리를 이어받아서 이린 소저하고는 얘기도 안 통한다고 해 봐. 그리고 죽는 게 아주 두렵다고 해.”

염빈은 열심히 설명했지만 린린의 눈이 썩은 명태 눈처럼 된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말로 염빈 마마가 포기하는가 보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착각이었다.

“세상이 텅 비었는데 단 한 사람만 그 세계로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그곳에 누굴 부르고 싶어?”

염빈이 물었다.

아진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소청요.”

린린도 같은 속도로 말했다.

“역천마의요.”

“에라이!”

염빈은 화가 났다.

이 두 바보가 언제쯤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을까 해서였다.

“이린 소저. 그러면 내가 혼처를 주선해도 돼?”

“아뇨. 마마. 저는 혼인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하고 그 마음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내가 서 공자의 혼처를 주선해도 돼?”

“예. 물론이죠.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마마. 그건 저도 정말 바라는 일입니다. 오라버니에게는 오라버니를 잘 알고 오라버니를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 정말 그렇다는 거지?”

“네. 큰오라버니도 혼인하고 랑랑을 낳고 정말 행복해하고 있거든요. 저는 작은오라버니도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 잘되었군. 그러면 돌아가는 대로 황상께 말씀드려서 서 공자의 혼인을 추진해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서 공자를 탐내는 사람이 많다고 폐하께서 몇 번이나 서신에 써서 보내셨던데. 우리는 오해를 했지 뭐야?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당연히 서 공자를 황실 사람으로 만들었을 텐데.”

아진은 얘기가 어쩌다가 그렇게 급진전 되어 버리는 건가 했다.

“돌아가면 황녀들을 부르도록 해야겠어.”

“아…… 마마. 그런데 저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아진은 어쩌다가 화살이 저를 향하게 된 건가 했다.

왠지 염빈이 호승심을 느낀 것 같은데 황녀들은 아직 나이도 어렸다.

그런 황녀들과 혼인을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됐는데 잘못하면 황녀들이 자랄 때까지 혼인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황제의 기행은 숱하게 봐 오지 않았던가.

아…….

그러고 보니 열일곱 살이 된 황녀가 있긴 했다.

얼굴도 예뻤다.

성격은 유순했고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한다고 했고 황제도 가끔 황녀를 칭찬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황녀에 대한 얘기를 넌지시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천천히 생각하자 그동안 자기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친 신호가 여럿 있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딱 염빈이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

“소하는 어떤가, 서 공자?”

“화, 황녀 전하…… 말씀이시지요…….”

아진은 엉성하게 웃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관심 없다.

같이 있으라고 하면 어색해서 죽어버릴 것 같다.

그는 그 세 문장을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할 생각을 했고 성공했다.

염빈은 그 말을 듣고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지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진은 염빈이 어떤 결론에 이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 이야기만 나눴는데 수천 명과 사흘 동안 싸운 것보다 더 지치는 것 같았다.

“리, 린린……. 오라비가 소피가 마려워서 그러니 잠시 있거라.”

린린도 아진이 불쌍해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은 일단 그렇게 자리를 내뺐다.

염빈은 다른 건 다 좋은데 가끔 이렇게 이상한 사명감에 불탈 때가 있는 것 같았다.

말을 타고 가면서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아진의 기분이 전염됐는지 터덜터덜거리면서 정말 무기력하게 걸음을 옮겼다.

세상이 텅 비었는데 그곳에 한 사람만 불러낼 수 있다.

아진은 그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린린이었다.

당연히 린린이지.

소청이는 그렇게 외로운 세상에 불러내면 안 되지.

그 세상에 소청이 없다면 그때 소청은 어디에 간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세상은 정말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울 것 같고 절대 소청이를 불러내면 안 될 듯했다.

‘그래. 린린이지. 린린이 옆에 있으면 별로 심심하지도 않을 것 같고.’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린린은 역천마의라고 했지? 그런데 역천마의 생각도 좀 해 줘야지.’

이번에도 이렇게 린린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불려나오고 싶을 것 같지가 않았다.

* * *

염빈이 오고 환영 행사가 거창하게 준비되었다.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연회에 초청할 거라고 말하면서 하월에게 연회에 참석할 사람들의 선물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월의 옆에 서 있던 아진은 하월의 얼굴색이 하얘졌다가 파래졌다가 하는 것을 구경했다.

황제라는 건 얼마나 대단한 건가.

하월에게 한 짓이 있으면서도 태연하게 그걸 농담으로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하월은 황제의 앞이라 차마 한숨을 쉬지는 못했지만 정말 얼마나 한숨을 쉬고 싶을지 알 것 같았다.

“농담이야. 농담. 그리고 그 돈은 전부 다 이자까지 쳐서 갚지 않았나.”

“아! 받았습니까?”

아진이 신기해하며 묻자 하월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을 안 했던가요?”

“네. 그러면 지금 엄청 돈이 많겠는데요?”

“그럼요. 황성에서는 본가가 가장 이름이 높지 않습니까.”

“그건 알았지만 그 돈을 받았다는 건 몰랐습니다.”

“나는 더 받을 만하죠. 내가 폐하의.”

하월이 말을 하다가 말았다.

목숨을 살렸다고 하려고 한 것 같은데 그러면 필연적으로 황제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라 그런 듯했다.

아내와 아들이 작당을 해서 자신을 죽였었으니 그 기억은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을 터였다.

“말을 하다가 멈추는 것이 더 얄밉다. 하월. 그리고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를 죽인 게 하월이었지.”

“아니. 폐하. 그것은 폐하께서 명령하신 거였고…….”

하월이 급히 말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황제가 웃는 것을 보고 이번에도 말려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물은 준비할 필요 없다. 이번에는 대단한 연회를 열 것이다. 산본의가 비무대회만큼이나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회자될 연회가 될 것이야. 거기에 초대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정말 영광스럽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선물은 따로 주지 않아도 된다.”

도대체 뭘 준비했기에 그렇게 자신만만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건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이제 산본으로 돌아가 보겠다고 슬슬 인사를 하려고 했다.

황제의 명을 수행하느라고 너무 오래 그곳을 비웠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테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진이 말을 하기도 전에 황제가 선수를 쳤다.

“아진. 그리고 린린. 두 사람도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

“저는…… 왜인지요. 폐하? 오라버니는 본가에 없어도 되는 사람이지만 저는 그러면 안 돼서 이제 본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린린의 말에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세상의 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황제는 혼자서 폭소를 터뜨렸다.

“린린이 아니면 누가 짐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린린을 보면 나는 짐이 얼마나 자애로운 군주인지 생각하며 흐뭇해지지.”

그 말은 분명, 린린이 선을 넘었다는 의미였는데 린린은 왠지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작은 기쁨을 드리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폐하.”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고 그러는 건지,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그 때문에 린린과 함께 있으면 수명이 몇십 년씩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산본의가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짐의 임무를 수행한 것에 대해서는 몇 배의 보상을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린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 연회는 정말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야. 그동안 아진과 린린은 황성에 자주 왔으면서도 권문세가의 권속들과 어울린 적이 별로 없었지. 이번에는 그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자들만 부르면 어색할 것이라 편하게 어울릴 사람들도 초대할 생각이다.”

“폐하. 염빈 마마의 귀환을 환영하는 자리가 아닌지요.”

“그래. 맞다. 아진아. 그래서 염빈이 가장 보고 싶어 할 것을 준비했지.”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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