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0화
420화
“나는 혼인할 생각도 없고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어.”
린린은 자기가 이 얘기를 한 백 번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했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는 마.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아서 같이 키우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 그때는 내가 너를 지켜줄게. 린린. 네가 약해져 있을 때. 네가 스스로 지킬 수 없을 때 오라버니가 너를 지켜줄게. 네가 내 조카를 낳으면 그 녀석도 같이 지켜줄 거고. 와. 정말 귀엽겠다. 조그만 만두같이 생겼겠지?”
반죽을 조금만 떼서 빚은 만두를 생각하자 정말 귀엽겠다는 생각에 아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라버니야말로 혼인하지 그래? 나는 내 조카를 잘 키워줄 자신은 없지만 천하제일인으로 키워줄 자신은 있어. 내가 정말 잘 키워줄 수 있어. 제자로 받아줄게. 아! 그거 좋겠다. 내가 스승이 돼 줄게. 오라버니.”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걸 왜 너한테 맡기겠냐? 바보냐?”
린린은 자기가 아진과 말을 해서 뭐 하겠냐고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던 두 사람이 그대로 마부석에서 튀어 올랐다.
누가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국경을 향해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러 마차를 몬 지 여러 날이었다.
그런 곳에서 사람의 기척을 느낀 것도 신기했지만 살을 찌르는 것 같은 살기 때문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그리고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격전이 벌어지고 몇 사람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그들이 언제 나타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들을 죽인 이들의 소매에 매화가 수놓아져 있었다는 거였다.
‘화산파?’
어느덧 그들은 서로 노려보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른 자들이 아진과 적대할 마음이 없는 듯 검을 거두었다.
“혹시 검신 대협의 제자이신 서도진 소협이 아니십니까.”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가 물었다.
모두 3, 40대로 보였고 하나같이 날렵한 몸을 하고 있었다.
“맞습니다만.”
“이리 만나게 되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이미 짐작하셨겠습니다만 우리는 화산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살생을 하신 것입니까.”
“이 사람들은 한때 저희의 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산한 이후에 사람들을 함부로 살생하고 부녀자들을 겁간하며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어왔습니다. 이들의 무위가 결코 낮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이들을 막을 수가 없어 장문인께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화산에서 가르친 무공으로 힘을 얻어 양민을 괴롭힌 죄를 우리가 막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우리는 화산의 추살조입니다.”
“아…….”
아진은 그들이 왜 민망한 얼굴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라서 수치스러웠을 터였다.
“죄송합니다.”
“소협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불찰이지요. 소협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하필 이런 자리라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웃으면서 만나고 견식을 청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말입니다.”
“다시 기회가 있겠지요.”
“그렇게 말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더 있습니까?”
아진은 그렇게 묻고 아차 싶었다.
그 말을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화산의 추살조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더니 먼저 떠났다.
그 모습을 보고 린린이 말했다.
“문파가 클수록 통제되지 않는 사람은 많을 수밖에 없을 거야. 남의 일이 아니지. 우리도 마찬가지일 거야.”
“우리가 왜? 산본무가는 믿을 만하잖아.”
그러자 린린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우리 천마신교 말이야.”
“야. 우리라고 하면 본가를 말하는 거 아니야?”
“나는 천마야. 왜 이래?”
린린의 당당한 말에 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는 동안 아진은 생각이 많아졌다.
추살조.
함께 했던 동문을 죽이기 위해 쫓아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고통이 얼마나 클까 해서였다.
“신교에도 추살조가 있어?”
“당연하지. 추살조만 해도 여러 개야.”
“추살조는 어떤 식으로 운영돼? 추살조는 강해?”
“당연하지. 웬만한 사람이 도망가는 건 신경 안 써도 돼. 그런데 아까 화산파 추살조가 그런 것처럼 그 정도로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면 나설 수밖에 없잖아. 다른 곳에서는 그 문파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만으로도 끝까지 쫓아가서 단전을 못 쓰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같은데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닌가? 우리도 그러나? 그건 잘 모르겠네? 어쨌건 나 때는 그렇게까지는 안 했어. 추살조가 하는 일까지는 안 챙겨서 잘 모르기는 하겠다.”
아진은 생각하지 않았던 얘기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 사람들 운명도 참 희한하다. 동문을 죽여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추살조는 상시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이 추살조에 투입되기도 해. 특정한 사람을 쫓아가서 죽이는 일을 명령받는 거지. 그럴 때는 그 사람을 잘 아는 동문이 뽑혀. 잘 알아야 대응을 하기가 쉬우니까. 오라버니도 그렇잖아. 내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사라졌어. 그리고 나가서도 나쁜 짓을 해. 그러면 나를 잡기 위해서 누구를 보내겠어?”
“내가 가야지.”
“거봐. 그런 거야.”
린린은 자기가 이해를 잘 시켰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늦게 기분이 나빴는지 아진을 노려보았다.
“은근히 기분 나쁘네? 오라버니는 눈감아 줄 거지? 없더라고 하고, 못 찾았다고 거짓말 해 줄 거지?”
린린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얘기나 들어보자는 듯이 물었다.
“그러면 안 되잖아. 너라면 어떻게 할 건데?”
“오라버니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면?”
“아니지. 나는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러게. 그러지는 않겠지. 그런데 오라버니가 그런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래서 내가 추살조가 돼서 오라버니를 찾아내서 죽이라는 명령을 들으면…….”
린린은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까? 나한테 그런 명령을 내릴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절대 그런 명령은 내리지 않으실걸? 그 말을 믿지도 않으실 거야.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조를 이뤄서 알아보고 오라버니를 구해오라고 하시겠지.”
아진이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던 것이다.
“오라버니도 대답해봐. 오라버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지.”
“너도 마찬가지지. 네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잖아.”
산본의가의 누구를 생각하건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누구도 그런 짓을 하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우리는 추살조를 만들 필요가 없겠지. 린린?”
“그렇지. 아마도? 조직을 이탈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그곳에서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거나 조직에 대한 불만이 쌓였거나 다른 곳에서 자기가 더 큰 뜻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겠지. 그런데 산본의가를 떠나서 다른 곳 어디에서 그 뜻을 이룰 수 있겠어? 우리처럼 기회를 마음껏 제공하는 곳이 어디 있다고? 바보가 아니면 떠나려고 하지 않을걸?”
“그렇다고 해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탈하려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건 잘 모르겠어.”
그리고 린린도 그 경우를 상상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건 신념의 문제겠지? 강해지는 것도, 부유해지는 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념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일 거야. 그런 사람이 산본의가에 들어왔다가 목적을 이루고 떠난다…….”
목적을 이룬다는 말에 아진이 섬뜩해져서 린린을 바라보았다.
“야.”
“어…….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못 들은 거로 해.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 하필 추살조를 만나서.”
두 사람은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서둘렀다.
그 후의 일정은 거칠 것이 없었다.
* * *
염빈은 두 사람이 올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들을 통해 황상의 뜻을 전해 듣고 오열했다.
아진은 누군가를 그렇게 그리워할 수도 있는 거라는 생각에 새삼스럽게 감격했다.
‘하긴. 스승님도 그러셨고 사고님도 그러셨지. 흐뭇하네.’
염빈의 그런 모습을 보자 고생하며 그곳까지 온 것이 전혀 헛되지 않았다.
염빈은 황상이 챙겨준 선물을 받고 더 기뻐했고 남겨질 사람들에게 기꺼이 선물을 전해 주었다.
그것은 황상이 염빈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했지만 토번의 군주에게 준다는 의미가 더욱 컸을 것이다.
토번의 군주는 염빈을 극진히 아꼈고 황제가 염빈을 기다리며 가장 총애하는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염빈이 갑작스럽게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며칠이라도 더 있다가 가라고 했지만 그녀가 기다릴 수 없는 것 같았다.
염빈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아진과 린린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느라 바빴다.
두 황후에게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얘기해주자 염빈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황제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상께서는 마음이 여리셔서 그런 일로 많이 상처를 받으실 텐데…….”
그 말을 듣고 아진과 린린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그런 사람이라니 혹시 염빈이 아는 황제가 자기들이 아는 사람과 다른 사람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서 공자. 철방은 어찌 되고 있는가.”
염빈은 너무 황제 얘기만 했다고 생각했는지 뒤늦게 그것을 물었고 아진은 철방이 융성하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염빈 마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을 일이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마.”
“무슨 말인가. 서 공자가 우리를 위해서 해 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버님께서 서 공자가 드린 검을 아주 흡족해하시네. 사람들이 올 때마다 매번 그걸 자랑하시지. 아버님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 그것이 되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제련 기술을 전해 주신 게 내키지 않는 것 같았는데 기술을 전수하고 보검을 얻었다면서 좋아하시더군. 게다가 곤오철도 함께 보내서 더 좋아하셨지.”
염빈은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흐뭇해지는지 환해진 얼굴로 말했다.
“다른 이야기도 해줘. 궁금한 게 정말 많아.”
아진과 린린은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 가면서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중에는 마른걸레를 짜는 것처럼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아서 서로 눈치를 주었고 그때마다 린린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가 하월에게 좋아하는 소저가 생겼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쯤 됐으면 염빈도 눈치를 챙기고 어지간히 할 얘기가 없나 보다고 생각했어야 할 텐데 그때마다 정말 그러냐며 전부 다 흥미로워했다.
린린은 염빈이 조금 불쌍해졌다.
그동안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런 얘기에도 그렇게 열렬히 반응을 하는가 해서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언제 혼인을 하는 거지?”
염빈의 말에 아진이 린린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 것 같냐는 눈빛이었는데 린린 역시 알지 못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두 사람 말이네. 서 공자와 이린 소저.”
“……예?”
린린은 눈이 동그래졌고 아진은 갑자기 기침이 나와 콜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