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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19화 (419/470)
  • 제419화

    419화

    겉에 드러난 표식은 없었지만 그들이 파천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금령 살수들인 듯했다.

    “종주님은 아직 안 오셨는가.”

    “예. 객잔에도 여러 번 가 봤는데 안 계셨습니다.”

    “언제부터 그러시던가.”

    “황후 폐하가 연금되고 좌부도어사가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린 날 찾아가 봤는데 못 뵈었습니다.”

    “정확히 이번 살행에 나선 자들이 몇인가.”

    종주가 사라졌다는 가정하에 지금은 금령 살수가 파천에서 가장 높은 자들일 터였다.

    금령 살수로 보이는 자가 묻자 몇 사람이 손을 들었다.

    “거의 금령이군. 자네는 은령이지?”

    “그렇습니다.”

    “저도 은령입니다.”

    “저도 은령입니다.”

    손을 들었던 몇 사람이 말하자 금령 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손을 든 이가 모두 일곱.

    “모일 사람은 전부 다 모인 건가.”

    “예. 종주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였습니다.”

    “반 시진만 더 기다려보도록 하지. 종주님이 붙잡히셨다고 해도 우리에 대해 발설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셨겠지. 너희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한다.”

    모일 사람이 전부 다 모였다고 하는데 더 이상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아진이 가장 먼저 기척을 드러냈다.

    그러자 파천의 살수들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그들만 모르고 있었다.

    “누구냐!!”

    금령 살수가 소리치자 아진이 웃었다.

    “서도진이다.”

    “……!!”

    그 자리에서 그 말처럼 효력을 나타내는 말을 찾기도 어려웠을 터였다.

    “너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이번 일에 직접 관여한 자들과 금령 살수들을 제외하고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을 절단한 채 평생 뇌옥에 갇히는 것과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게 아니라면 너희가 잘하는 자결을 해도 좋다.”

    그러자 금령 살수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자의 농간에 넘어가지 마라! 너희는 모두 나를 지켜라!! 내가 새로운 종주가 될 것이다. 내가 산다면 너희도 살 수 있다!!”

    그러자 다른 금령 살수들이 더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를 지켜라!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발각되었을 때 자결하는 것은 금령 살수들에게 기대할 일은 아닌 듯했다.

    은령과 동령 살수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받아들이기에 너무 가혹했다.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이 절단된 채 사는 것도 사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건지 그들의 고민이 깊어져 갔다.

    그러나 죽음이 더욱 두려웠고 한두 사람이 투항했다.

    “너희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것이냐!!”

    금령 살수가 소리쳤지만 투항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다.

    대부분이 동령 살수들이었다.

    처음부터 서도진이 선택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자들은 이제 결사 항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주시오……!”

    살행에 가담했던 은령 살수가 말하자 서도진이 웃었다.

    “너희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너희가 단전을 복구하고 다시 예전과 같은 짓을 벌일 수도 있어서다. 세상에는 온갖 기기묘묘한 일들이 다 벌어지지. 그러니 너희가 기연을 얻거나, 다른 사람이 너희를 다시 고치지 않을 거라고 장담을 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냐.”

    동령 살수들은 새로 고친다고 해도 앞으로 일반인과 같은 삶을 살기도 어려울 터였다.

    무골을 보고서 내린 결정이었다.

    금령 살수들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몸을 날렸다.

    그러는 동안 동령 살수와 은령 살수 중에 자결하는 사람이 나왔다.

    더 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아진과 린린은 일부러 기다렸고 하월이 손을 썼다.

    그의 검에서 사나운 검풍이 날아가 금령 살수들을 휘감았다.

    살수들은 피하려고 하다가 몸이 굳은 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선이남과 남이천이 이미 한 차례 장침을 뿌리고 품 안에서 다시 암기들을 꺼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까지 나설 건 없겠군.”

    선이남이 말하자 남이천이 정말 그렇다고 하며 아예 선이남의 앞을 막아섰다.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이런 자리에까지 나서시는 건 너무합니다. 사형.”

    “나는 사제가 걱정돼서 그랬지.”

    금령 술사들은 너무 허망하게 쓰러졌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아진 역시 허망하다고 생각했다.

    실체는 이렇게나 무력하고 비굴한데 이들이 어둠 속에 숨어 있을 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던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운 좋게 황후의 행적을 밟고 진실을 일찍 파악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지 모를 일이었다.

    만약 황후가 평범하게 다른 황자의 측근들 중에 희생자를 찾았다면 이 일은 오랫동안 미궁에 있었을 터였다.

    아진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상태창을 떠올렸다.

    어쩌면 상태창도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둠에 가려 있어서, 그 실체를 들여다볼 방법이 전혀 없어서 이렇게 막연하게 불안한 것은 아닌가 했다.

    실체를 알지 못하는 동안 그렇게 위험하게 느껴졌던 파천이 실상은 실소가 나올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상태창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차피 이제는 혼자도 아니었고 함께 해줄 사람들도 있었다.

    함께 어둠을 걷어내 줄 사람들이.

    * * *

    황제는 파천의 잔당을 잡아들였다는 말에 크게 기뻐했다.

    이번에 살행에 나섰던 자들과 금령 살수들은 현장에서 죽고, 그곳에서 자결한 자들을 제외한 살수들은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을 자른 후 뇌옥에 가두었다고 하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노고를 치하했다.

    “이번에도 아진의 공로가 컸구나. 잘하였다.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을 해 보아라. 상을 내리겠다. 마음에 들 만한 상이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그것으로 주겠다.”

    “그러면 전에 주신 패에 적힌 내용을 조금 상향 조정해 주시면 어떨지요, 폐하. 그렇게 해서 그걸 두 개 정도 더 만들어서 주시면…….”

    그 말을 낼름 한 사람은 린린이었다.

    아진은 자기가 왜 린린을 데리고 왔을까 하며 붉어지는 얼굴을 한 손으로 마구 문질렀다.

    황제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해서 그걸 너에게 달라는 말이냐. 린린.”

    “꼭 저에게 주시지는 않아도 되고 그것은 오라버니의 판단에 맡기면 어떨까 합니다. 폐하.”

    “오오. 아진을 퍽 믿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하면 아진이 그것을 너에게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너는 어쩔 생각이냐. 아진아. 그게 생기면 린린에게 줄 것이냐.”

    “아닙니다. 폐하.”

    아진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하자 황제가 박장대소했다.

    “린린. 어쩌면 좋으냐. 그 소원을 말해봤자 너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겠구나.”

    “아닙니다. 폐하. 오라버니가 저를 많이 믿어서 이러는 것이고 사실 저에게는 그게 필요 없습니다. 그게 아니어도 저는 스스로 잘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눈에 습막이 맺히는 것은 왜이더냐. 린린.”

    황제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한참을 더 웃더니 일단 상은 자기가 알아서 결정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다. 이번에 염빈을 보러 가거든 염빈에게 선물을 전해 주도록 하여라. 이곳에 온 후에 줘도 되겠지만 그곳에 남게 될 사람들에게 염빈이 주고 싶은 게 있을 것 같아 그런다.”

    그 말을 듣고 아진이 빙긋 웃었다.

    염빈을 데려와 주기로 하고 그 일이 미뤄지는 듯하자 황상이 그런 식으로 은근히 압박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너를 재촉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 토번과 염빈에게 고마워서 그러는 것이다. 철광의 제련 기술을 전해 주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나는 그 마음에 답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지.”

    “예. 폐하.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누구와 갈 생각이냐. 아진아.”

    “혼자 가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폐하.”

    황제는 말은 하지 않고 린린을 곁눈질로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린린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같이 갈 것입니다. 폐하. 선물도 가지고 가려면 마차를 몰아야 할 텐데 혼자 계속 마차를 모는 것은 힘이 들 것입니다.”

    “그래.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거라. 염빈에게 보낼 선물은 금방 준비하도록 하마. 그것만 준비되면 바로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예. 폐하.”

    “그래. 가능하면 빨리 다녀오도록 하여라. 짐이 염빈을 보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아진을 데리고 있으면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아진을 언제 보내 줄 거냐고 가모가 짐에게 다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 표정이 어찌나 진지했는지 아진은 웃지도 못했다.

    황제의 앞에서 물러나며 아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린.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사고님은 스승님의 아이를 가지셨고 황제 폐하는 염빈 마마를 기다리고 있는데 너는 그냥 늙어가는 거 억울하지 않아?”

    “내 걱정할 시간에 오라버니 걱정을 하는 건 어떨까?”

    “그거 내 걱정이야. 하나밖에 없는 누이가 혼인할 생각을 안 해서 걱정인 거지.”

    “내 걱정은 그냥 내가 할게.”

    린린이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지 말고 말해봐. 이 오라비가 좋은 사람을 찾아서 납치라도 해다 줄게.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 참. 하월 공자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더라. 나중에 시간이 되면 말해달래. 소개해 주고 싶다고.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가주님한테는 아직 인사를 못 시켰대. 그 전에 내가 한 번 봐 줬으면 하더라고.”

    “왜? 오라버니가 별로인 것 같다고 하면 헤어지려고 그러나?”

    “그건 아니겠지. 그리고 헤어진다고 할 정도로 깊은 단계는 아닌 것 같던데?”

    린린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아진이 하는 말이 신경 쓰이기는 했다.

    정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짝을 찾아가는 건가 해서.

    그렇게 되고 나면 좀 심심해지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나는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태어났을 때는 정말 귀엽더라. 서악이도 귀엽고. 그러니까 아이 하나만 낳아라. 린린. 아니. 많이 낳아도 돼. 그러면 내가 정말 잘 키워줄게. 내가 아이를 잘 키우는 것 같아.”

    “그건 반박을 할 수가 없네. 오라버니가 나를 키웠잖아.”

    “……그러게. 잘 키우는 건 아닌가 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정도면 잘 큰 거지!”

    아진은 그런 소리를 계속해서 뭘 하나 하면서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날은 이야기가 그 정도로 끝이 났지만 일단 토번을 향해 길을 떠난 후에는 말할 사람이 린린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얘기를 다 꺼내서 했고 나중에는 다시 그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린린. 신교에 너 말고도 여자가 천마였던 적이 있었어?”

    “아니? 왜?”

    “천마는 천마가 되고 나서도 계속 공격을 당하잖아. 신교 내부에서도 계속 도전을 받고 말이야. 네가 아이를 가지면 평소처럼 싸울 수가 없을 텐데 그때는 어떻게 돼?”

    세상 진지한 얼굴로 아진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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