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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18화 (418/470)

제418화

418화

그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지금껏 찰나의 순간 차이로 목숨을 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일단 한 번 어떤 생각이 들고 나면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누구보다 빨랐다.

그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채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렇게 서둘렀어도 장원을 나서지 못했다.

정원에 내려선 두 사람은 그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인생의 정점에 서 있는 것 같은 젊은 두 남녀.

게다가 남자는 그대로 몸을 날려 곳곳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의 곁으로 가 한 손을 시신에 붙이고 있었다.

검을 빼 드는 여자의 얼굴은 귀찮아 죽겠다는 기색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런 남녀가 누구인지는 그도 알고 있었다.

서도진과 천마.

‘어떻게 이자들이…….’

그러다가 나비 떼에 다시 생각이 이어졌다.

역시 그랬다는 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비 떼에 쫓겼고 결국 그것들이…….

역산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다.

시선은 자꾸만 남자에게로 향했다.

저자가 서도진.

역산은 서도진에 대해 질리도록 들어왔지만 이런 식으로 그와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도진은 그저 시신에 손을 가져다 댄 것뿐이었다.

그가 죽은 사람들을 숱하게 살렸다는 말을 들었지만 황성의 시신들은 살리지 못하기에 다 헛소리라고 치부했는데 그의 눈앞에서 분명히 시신이 움직였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지금도…….

역산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며 린린이 검을 앞으로 뻗었다.

“네가 말을 안 해도 오라버니가 네 기억을 긁어내서 알아내기는 하겠지만 편하게 가는 건 어때? 파천의 살수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종주가 객잔에서 점소이 노릇을 한 걸 보면 파천도 따로 한곳에 모여서 살종의 영업을 하지는 않았던 건가? 하긴. 살종에게 그런 장소가 필요할 것 같지 않기는 해. 의뢰가 들어오면 그때마다 살수들에게 일을 배정하면 끝일 테니까.”

린린이 혼자서 떠들어대는 동안 서도진이 살려낸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

역산은 지금 자기가 그런 모습에 한눈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이렇게 요란하게 하고 있어서 네놈을 죽이는 데 일말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잖아? 아. 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천마가 언제부터 가책을 느꼈다고. 다 오라버니 때문이잖아.”

서도진은 그 말에 피식 웃고 있었다.

“정신이 들면 죽은 사람들을 이쪽으로 옮겨와 주십시오.”

서도진이 말하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서서히 정신이 들고 기억이 떠오르는지 깜짝 놀라며 칼이 베고 지나간 자리를 만졌다.

“아……!!”

짧은 비명이 지나고 서도진을 보며 고맙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을 옮겨왔다.

자기들이 어떻게 살아난 건지 의문이 드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듯했다.

역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는 이곳에서 도망칠 방법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직은 그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지만 존재가 발각되는 것도 금방일 터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바쁜 것 같은데 내가 섭혼술로 알아낼까? 어차피 이자를 오래 살려둬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딱 보니까 고집도 세 보이는데 빨리빨리 해치우고 가지? 파천 살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두 놈은 아닐 것 같은데.”

“그래. 그렇게 해.”

의외로 서도진에게서는 대답이 간단하게 나왔다.

역산은 린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그렇게 해봐야 얼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붙잡힐 것 같았다.

도망치다 붙잡히는 끔찍한 공포를 잘 알고 있어서 그는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엄청 얌전하네? 이보다는 더 날뛸 줄 알았는데.”

린린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며 다가왔다.

역산은 정신없이 고개를 저어댔다.

“왜 자꾸 고개를 젓지?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자 누군가 역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저, 저놈이다! 저놈이 아직!!”

소리친 사람이 역산을 향해 달려왔다.

린린은 검을 휘두르려고 하다가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는지 검을 어깨에 걸친 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역산은 자기가 이곳에서 그들을 해치우고 도망칠 가능성이 있을까 고민했다.

가능성이 높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덤벼드는 이들에게 가만히 몸을 내주고 있을 수도 없었다.

달려들던 자들이 역산에게 맞고 나가떨어졌고 한두 사람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신중해졌다.

옆에 무림인이 있는데 자기들이 나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았다.

“린린. 섭혼술로 살수들이 있는 곳만 알아내. 그러고 보니 추살접들이 오래 굶었어.”

“아아. 정말 그러네. 알았어.”

역산도 그 말을 들었지만 그게 무슨 말인가 했다.

그러나 말을 할 틈도 없이 린린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다가와 그의 머릿속을 훑었다.

역산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자고 마음먹고,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새 혈을 점했다는 것인가.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온 린린을 똑바로 볼 수는 있었다.

비뚜름한 웃음이 걸린 얼굴은 소름 끼치게 잔혹해 보였다.

이렇게 젊은 여자를 보면서 자기가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 세상에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지.”

과거의 기억을 헤집으면서 지금 떠올리는 기억도 알 수 있는지 린린이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이는 날이 있어서 말이야. 안 그랬으면 우리가 빨빨거리고 쫓아다녀야 할 뻔했잖아.”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듯 서서히 일어나는 기운.

그것이 제 정신을 뒤덮는 듯하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서도진에 의해 다시 목숨을 건진 이들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침입자에 의해 장원에 혈풍이 불었고 곁에서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다시는 과거의 영화로움을 꿈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시간이 돌이켜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누구신지요. 저희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겠습니까. 고인(高人)의 존성대명을 알려주십시오.”

누군가 말했지만 서도진은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누구입니까?”

“살종 파천의 종주입니다. 황성에서 여러 건의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치다가 이리로 온 듯합니다. 이제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서도진이 말을 하는 동안 갑자기 자색 운무가 끼는 것처럼 주위가 온통 보라색으로 물이 들었다.

사람들은 나비 떼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신기한 광경에 입을 벌렸다.

생전 그렇게 황홀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게 그렇게 낭만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날아올랐던 나비 떼가 일제히 역산의 위로 내려앉았다.

처음에는 꽃에 나비가 날아앉은 것처럼 평화로운 장면을 상상했지만 일어난 일은 그런 것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머…… 먹고 있어……!!”

누군가 낮게 신음을 토하며 뇌까렸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나비 떼는 포식을 시작했고 역산의 모습이 마침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고도 그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온통 나비 떼에 뒤덮인 그는 흡사 나비 인간처럼 보였다.

아름답기만 하던 나비들이 벌인 살인. 아니 식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비척비척 뒤로 물러섰다.

“돌아가자. 돌아오지 않는 녀석은 두고 갈 것이다.”

서도진이 말하자 나비 떼들이 급히 서둘렀다.

그러다가 자색 구름이 떠올랐을 때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역산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것을 발견했다.

포식을 마치고 얌전해진 추살접은 얌전히 서도진의 품속으로 날아갔다.

그런 짓을 한 나비 떼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영 찝찝할 것 같은데 그에게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몸조리들 잘하시고 건강하십시오.”

말을 마친 서도진은 사람들의 인사를 채 듣지 않은 채 사라졌다.

린린은 그보다 먼저 사라진 후였다.

* * *

“다행이야. 시간이 딱 맞아서. 만약에 하루만 늦었으면 꼬박 한 달을 기다려야 했을 텐데.”

매달 초일, 파천의 회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아내고 린린이 말했다.

그들이 모이는 곳은 역산이 점소이로 위장한 객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수 근처였다.

살수의 숫자는 대략 쉰.

그들을 처리하는 것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미리 모인 사람은 적지 않았다.

하월을 비롯해 선이남과 남이천까지 와 있었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서 부른 것은 아니었고 모두 심심해서 자원하고 나섰던 것이다.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기척을 숨긴 채 파천의 살수들을 기다렸다.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여섯 사람이 먼저 모였지만 그들은 각자 자리를 잡았을 뿐 서로 말을 걸지도 않았다.

어쩌다 보니 같은 살종에 몸담고 살수로 활동하는 것뿐이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유대감은 없는 듯했다.

그러다 요란한 복장을 한 사람이 나타나자 그때부터 조금 시끄러워졌다.

“모두들 먼저 와 있었군. 그런데 종주님은 어디에 가신 거야? 일이 어떻게 되는 건지 알아보려고 몇 번을 갔는데도 계시지 않던데. 다른 사람들은 종주님과 연락이 됐어?”

“나도 못 봤수. 처리하라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기다리라는 연락을 받은 후에 아무 연락이 없지 뭐요. 이거도 그 서도진이라는 자가 관련된 거 아니오?”

“소문 들으면 몰라? 황후 폐하랑 좌부도어사까지 다 걸려들었다는데 지금 살행이 중요하게 생겼어? 잘못하면 우리가 연관된 게 들통날지도 모르는데. 기다리라는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고 해도 내빼야지. 돈 몇 푼 벌겠다고 하다가 목숨 걸 일 있어?”

“이번까지만 하고 손 떼려고 했는데 찝찝하게 됐습니다.”

한두 사람이 얘기를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 주위로 모여들었다.

공통의 관심사인 데다 그들의 운명도 거기에 같이 걸려 있는지라 그런 얘기를 모른 척할 수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종주님은 왜 안 보이지? 다른 때는 일찍 나오셨는데.”

“혹시 종주님도 잡히신 건 아니겠지요? 아무에게도 소식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신 게 영 마음에 걸립니다.”

“설마 종주님이 그러실 분인가? 이번에도 낌새가 이상하니까 먼저 몸을 숨기신 거겠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이 더 왔다.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을 보고, 먼저 온 사람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기도 했다.

늦게 나타난 사람들은 그런 대우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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