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415화 (415/470)

제415화

415화

어떤 말을 할 것인지 궁금했던 아진은 지금부터 재미있게 되겠다고 생각하며 기대했다.

“신첩은…… 신첩은 잘못이 없습니다. 폐하. 신첩은 아무 일이 없게 하려고…… 행여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어찌하나 해서…….”

“황후. 급할 것 없다. 천천히 말을 해 보도록 하라. 짐이 그대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하나 빠짐없이 고하도록 하라. 행여 거짓을 꾸며낼 생각은 하지 말고 황후가 어디에 갔다가 오는 것인지,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것만 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그것이.”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조금 전만 해도 대단한 기세로 말을 할 것 같더니 황제가 일단 말을 끊고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짓자 흔들리는 듯했다.

온화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그가 경고한 것은 확실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황후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황자의 안위도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지금쯤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고 있을까.

아진은 황후가 가여웠다.

그렇게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기다리고 있으면 2황자가 태자가 됐을 거라거나 결국 황위에 오를 거였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안 될 일은 안 될 거였다는 의미였다.

“폐하…….”

“그래, 황후. 말을 하여 보아라. 어디에 갔던 것이냐.”

“…….”

그러나 어렵사리 황제를 부르고도 그녀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황후에게 황제가 말했다.

“좌부도어사의 장원에는 황후가 무슨 일로 간 것이냐. 그자와 사통하느냐.”

그 말에는 아진도 놀랐다.

사통이라니?

“……! 폐, 폐하.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황후는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말을 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사실대로 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대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어떤 소리를 듣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하는 거라면 그냥 있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후가 입을 열려는 순간에 황제가 한발 빠르게 말했다.

“뭘 그리 놀라느냐. 그자의 전임이 왜 죽었는지 아느냐. 황후와 통정을 해서 그런 것이니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황제를 보면서 황후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자기가 그렇게 쓰러져 버리면 황자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작금에 황성에서 하도 흉흉한 일이 벌어지는지라 좌부도어사가 무사한지…… 그자가 황자를 아껴 주기에…… 아니. 신첩의 뜻은…….”

무슨 말을 하건 그 말이 제 발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커다란 함정이 된다는 것을 결국 황후도 알았을 것이다.

“건방진 것이 아직도 나를 기망하려드는구나.”

황제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 폐하……!”

황후는 그를 부르면서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사통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저질러 온 살인에 대해 모의를 할 것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던가.

황제는 그대로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고 황후는 황망한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아진은 황제가 처소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몸을 감추다가 처소에 이른 후에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아진의 기척을 느낄 수가 있겠구나.”

“제가 온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폐하.”

“그래. 하월이 재미있는 얘기를 하더구나. 그런데 그것을 어찌 알았느냐.”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기를 바라고 혹시나 하면서 지키고 있도록 한 거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살종의 종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월의 눈이 커졌다.

“알아냈습니까?”

“예. 객잔의 점소이로 분하고 있더군요. 공자도 그곳을 알 것입니다.”

아진은 그 객잔에서 북궁마영을 처음으로 봤었다는 얘기를 해 주었고 하월은 갑자기 큼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북궁마영을 죽이도록 명한 것이 그였으니 황제의 앞에서 그 얘기가 나온 것이 달갑지는 않았을 터였다.

황제도 그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짐이 용서했으니 괘념치 말거라. 그리고 아진이가 눈치 없이 이러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하월이 아진이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소신은 어쩌다 한 번 당하는 것이지만 산본에 있는 사람들은 매일 이런 일을 당할 테니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 말에 황제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진은 황제가 지금 웃을 기분이 아닐 텐데 일부러 그러는 건가 하면서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황제도 눈치를 챘는지 한숨을 쉬었다.

“짐은 끝까지 이런 일을 당할 운명인가 보다.”

“폐하…….”

“괜찮다. 그래도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 실은 황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책봉을 해 놓은 터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는데 다행이지. 가만 보면 짐은 운이 나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따지지 마라. 아진아. 그냥 조금이라도 좋게 생각하려고 이러는 것이다. 그냥 염빈에게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요즘은 누구도 믿지를 못하겠구나.”

그러다가 하월이 섭섭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을 보고 얼른 말을 정정했다.

“너희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다. 내 개인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믿을 사람이야 너희도 있고 선 부정도 있고 이리저리 많지.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이것도 다 너희 덕분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아니었으면 영영 진심을 알 수 없었을 사람들이었는데.”

황제가 흐뭇하게 말하자 하월이 고개를 저었다.

“서 공자 때문이지요. 저도 서 공자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서 공자가 아니었으면 소신도 폐하께 실망을 안겨드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아진이가 그런 것을 잘하기는 하지.”

아진은 황제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물었다.

“폐하. 염빈 마마가 그리우십니까.”

“아니다. 어차피 염빈에게는 정인이 있지 않았느냐. 혼인을 하였겠지.”

“그것은 아닙니다. 산본철방의 운영 때문에 본가가 그곳과는 계속 왕래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염빈 마마는 혼자십니다.”

그러자 황제의 눈이 빛났다.

“정말 그렇다고 하더냐. 그런데 왜? 정인이 혹시 죽었다고 하더냐? 아니면 먼저 혼인을 했다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염빈 마마께서 폐하를 잊지 못하시고 남은 시간 동안 혼자서 살겠다고 하신 것으로 압니다.”

“염빈이 그랬어?”

황제는 다시 들인 황후에게까지 뒤통수를 얼얼하게 맞은 후라 염빈이 새삼스럽게 더 그리워진 듯했다.

“폐하. 폐하께서 염빈 마마를 그리워하신다면 다시 부르셔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염빈 마마께서 본국을 위해서 하신 일이 많습니다. 염빈 마마는 그 일을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만.”

아진은 일단 여기까지 말이 나온 이상 못 할 건 또 뭐일까 하면서 그간의 일을 주절주절 말해주었다.

토번이 지금까지 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염빈의 노력이 컸고 염빈이 아니었다면 토번과의 사이에 몇 번 정도 불화가 생길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염빈은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잘 지나갔으니 황제가 토번에 대해 원망을 품지 않기를 바랐다고 하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짐은 염빈을 다시 부르고 싶구나. 그곳에 가서 잘 살고 있다면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염빈이 돌아왔으면 한다. 이제 나이가 드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황제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염빈이 이제 와서 아이를 낳지는 못할 것 같으니 황위는 황자 중에 적당한 아이에게 물려주고 나는 염빈과 기대고 살까 한다.”

황실의 인간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지려던 찰나에 나온 염빈의 이야기가 황제에게는 꽤나 흡족하게 들렸는지 단번에 말이 거기까지 진행이 되었다.

워낙 즉흥적으로 나온 말인 것 같아서 그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그가 염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성과였다.

다음에 토번에 가게 되면 그 이야기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듯했다.

“정빈은 어찌 지낸다고 하더냐.”

“정빈 마마는 잘 계신다고…….”

“혼인을 하였나 보구나. 그래. 잘되었다. 정빈이 잘 살고 있다니 좋구나.”

황제가 진심으로 흐뭇한 듯이 말했다.

하월은 신기하다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황제가 대노하고 황실에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폭풍이 쥐도 새도 모르게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황후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응징이 따르겠지만 원래대로였다면 그보다 훨씬 더 큰 피바람이 불었을 텐데 순식간에 황제의 감정이 가라앉고 훈풍마저 불고 있었다.

도대체 서도진은 뭘 하는 자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 * *

황후는 당장이라도 금의위가 황후전으로 들이닥칠 거라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징후는 없었다.

곧 뭔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다.

그사이 황후는 황후전 밖으로 한 발자국도 가지 못했다.

그랬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섣부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황후가 변복을 한 채 황궁을 나갔다 황제에게 발각되었다는 이야기가 황궁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다음 날은, 황후가 몰래 다녀온 곳이 좌부도어사의 장원이었다는 사실까지 퍼졌다.

사람들마다 모여서 수군거리는 것을 좌부도어사만 듣지 못할 수는 없었다.

그 일에 관련되었던 자들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좌부도어사가 돌아오던 길에 공격을 당했다는 것은 들었지만 설마 그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결국 좌부도어사와 그 일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스스로 죄를 청했다.

전부 다 알고 있으면서 황제가 죄를 묻지 않는 상황이 더 목을 옥죄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 의해서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이 낱낱이 밝혀졌지만 파천은 찾을 수가 없었다.

종주는 객잔에서 몸을 감춘 후였다.

간신히 몸을 내뺐다고 생각한 종주는 자색 나비 떼가 자신의 뒤를 따라 날아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추살접의 추적을 받게 되는 이들이 어떤 운명에 처해지는지 그 소문을 익히 들었음에도 나비들로부터 몸을 완전히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파천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두고 산본의가의 사람들이 모였다.

산본의가에 있는 여러 무인들은 살행을 했다고 파천을 응징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쉽게 답을 내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