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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12화 (412/470)
  • 제412화

    412화

    “황상께서 요즘 황성의 일로 성심이 많이 어지럽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번에 서 공자를 부르신 것도 그것 때문인 것 같은데.”

    “예. 폐하.”

    향화문을 통해 이미 소문이 널리 퍼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아진이 황후의 말에 답했다.

    “어찌 이런 흉흉한 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황궁에 큰일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어진 황상께서 다스리시니 이 일도 곧 잠잠해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요. 그리되어야지요. 황상께서 이 일로 다시 성심이 어지러워지지 않기만 바랄 뿐이에요.”

    “그러실 것입니다. 폐하.”

    아진은 황후가 자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변죽은 그만 울리고 얘기를 해 주기를 바랐다.

    “이렇게 서 공자를 부른 건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에요. 서 공자도 이번 일에 대해서 얘기를 들었겠지만 나는 이 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몰라요.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문제겠죠. 시간이 지나면 이 일은 해결이 될 거예요. 그런데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내 사람들이 계속 쓰러져 나가지는 않을지 걱정이 돼요.”

    “부디 성심을 굳건히 하십시오. 폐하.”

    황후가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보다는 더 구체적인 위로가 나오기를 기대했던 것 같았다.

    “살수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믿어왔던 사람들이 많이 쓰러졌어요. 나는 이 일이 2황자를 노리고 벌어진 게 아닌가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의 측근도 변을 당했지만 그건 눈가림을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서 공자도 봤으면 알겠죠. 서 공자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몇 군데 다니지 못해서 아직 사실 관계를 다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대로예요. 이번에 죽은 사람들 중에는 2황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누군가 2황자가 황상의 총애를 받지 못하도록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위축돼서 2황자를 지지할 수 없을 거예요. 점점 손을 뻗어오는 걸 그들도 알 수 있을 거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2황자에게도 변고가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아진은 황후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바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서 공자를 보면 그렇지 않아도 말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 나에게는, 그리고 2황자에게는 서 공자의 도움이 절실해요. 서 공자가 2황자를 지지해 준다고만 하면 황실이 권력 다툼으로 내분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제 2황자가 태자가 되는 것은 정해진 이치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 말씀은 저에게 하시면 안 됩니다. 황후 폐하. 황상께서 저에게 그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특별히 명을 내리신 터라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선이남과 남이천에게 내려진 명이었지 아진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진은 자기 역시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다.

    황후는 아진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죠. 나와 2황자에게는 아무 배경도 없고 뒷배도 없어요. 우리 가문은 보잘것없고 우리를 지지해 주던 사람들은 변고를 당했지요. 앞으로도 이 일은 계속될 거고 우리가 사라지면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황후가 되고 태자가 될 거예요. 그런 식으로 계속 내분이 일어나는 것이 황실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서 공자?”

    “황후 폐하. 저는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황자 전하를 지지해 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저에게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기라고 하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찌 그리 말을 하는 건가요. 서 공자.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서 공자가 더 잘 알 텐데 말입니다.”

    “이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빠르게 해결을 할 것입니다. 폐하. 폐하께서 이 일로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것이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자는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배후에서 그 일을 조종한 자 역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황실의 권력 다툼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폐하께서 좌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황후는 아진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인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황제의 명이라고 하며 방벽을 세워버리자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도 어려웠다.

    “서 공자는 2황자를 어찌 생각하나요?”

    잠시의 침묵 끝에 황후가 물었다.

    “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황상께서 저를 믿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황자 전하들 개개인에 대해 제 의견을 갖는 것은 황상께서 바라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것뿐이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후 폐하.”

    황후가 아진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다니 할 수 없군요. 그럼 이제 돌아가 보도록 해요.”

    아진은 황후의 앞에서 물러났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궁인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드러났다.

    아진은 황실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황제를 보는 것이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때라도 스스럼없이 황제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특권인지 아진은 서서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간 그에게 태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서 공자님. 혹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는지요.”

    “누구십니까?”

    “서월궁의 태감입니다.”

    그를 필두로 자기들이 모시는 후궁에게 아진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아진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혹시라도 자기들이 모시는 후궁이 이 일로 의심을 받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어 사전에 아진과 먼저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아진은 그들에게 목숨이 달린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벌인 일인지와 상관없이, 누가 의심을 받고 배후로 지목될지 걱정이 돼서 조금이라도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후궁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자기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아 아진은 그들의 청을 물리치지 않았다.

    각자의 처소에서 일 이각을 머문 것뿐인데도 시간이 꽤 오래 지났다.

    밖에서 일어난 일로 모두가 걱정을 하며 혹시라도 불똥이 튀지는 않을지 겁을 먹은 모습들이었다.

    “서 공자. 혹시 우리를 의심할까 해서 하는 말인데. 나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황자와 황녀를 낳았지만 아직 출산이나 잉태를 하지 못한 이들도 있잖아요? 그들일 수도 있는 거예요.”

    그 말은 19황자를 낳은 후궁에게서 나왔는데 19황자가 끝이 아니라는 건가 해서 아진은 아찔해졌다.

    그리고 그 말이야말로 신빙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막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으면서 잉태는 하지 못한 사람은 조급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황상께서는 지난 일 때문에 우리의 친정 가문이 힘을 갖는 걸 극도로 꺼리세요. 그러다 보니 누구도 확실하게 지위가 보장되지 않고 있죠. 그러니 새롭게 황상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도 자기들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감히 이런 흉악한 짓까지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차차 밝혀내야 하겠지만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녀는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그 점도 염두에 두고 조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후궁은 그 말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는 듯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대비해 다른 이들과 차이가 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아진은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수확이 상당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특별히 자기를 부르지 않은 사람까지도 전부 찾아갔고 그들과도 시간을 들여 얘기를 나눴다.

    모두와 얘기를 나누고 났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 * *

    하월은 저녁 늦게 들어간 아진을 붙잡고 자기가 알아낸 것들을 열심히 말해주었다.

    나름대로 수확이 많았다고 생각했는지 아진을 본 때부터 쉬지도 않고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그 부분을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복합적이라는 것 말이지요. 누구를 지지하는지, 그게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다고 하신 것도 딱 맞았습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거참.”

    아진은 하월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지만 요약하면 간단했다.

    겉으로 보기에 다른 황자를 지지하는 것 같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2황자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하월은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가 황후와 2황자라고 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이대로 계속 두다가는 두 분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하월은 아진의 대꾸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혹시 이럴 거라는 걸 미리 생각하고 계셨어요?”

    “아닙니다.”

    그러고는 아진이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창문은 왜 여세요? 덥습니까?”

    “아뇨. 기다리는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뭘요?”

    그러나 아진은 대답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침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제일조가 그곳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하월은 그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아진을 보았고 아진은 그런 하월을 힐끔 보며 말했다.

    “가 볼 곳이 있습니다. 같이 가실 거면 놓치지 말고 따라오십시오.”

    “어디에 가는데요?”

    “제일조가 가는 곳으로요.”

    “아니. 대체 무슨 일…….”

    그러나 제일조가 다시 날갯짓을 했고 아진이 그 뒤를 따르자 자기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문 채 신법을 펼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진은 제일조가 왜 영물인지 점차 확실하게 깨달아갔다.

    제일조는 아무리 먼 곳에 있다가도 아진이 필요로 하면 아진에게로 왔다.

    자신이 주인으로 정한 사람과 연결된 영물이 있다더니 제일조가 꼭 그런 격이었다.

    일부러 소리를 내서 부를 필요도 없었다.

    소리를 낸다고 해서 들릴 거리도 아니었지만 제일조는 아진이 원할 때마다 눈앞에 나타났다.

    아진이 황성에서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온 제일조에게 아진은 부탁을 해 두었었다.

    선이남의 곁에 함께 있다가 선이남이 보내면 자기에게 와 달라고.

    제일조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지금쯤 선이남은 황후를 따라 이동하고 있을 것이다.

    황후전을 지키고 있다가 황후가 황후전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면 자기에게 말을 해 달라고 했으니.

    아진이 그 말을 했을 때만 해도 제일조가 곁에 없었기에 선이남은 자기가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하는 건지 물었었고 아진은 제일조가 올 거라고 했다.

    선이남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지만 아진의 곁에 있으면 이해되지 않는 일은 숱하게 생긴다는 것을 떠올렸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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