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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07화 (407/470)

제407화

407화

“이곳에서 나가지 않으셨습니까.”

그야말로 지근거리에서 표월과 태혈령이 죽었는데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가 해서 묻자 그가 더 의문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단순히 두 사람이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싸움이 워낙 컸기에 그걸 모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렇다. 무슨 일이냐. 너는 누구의 제자더냐.”

이제 와서 그에게 무엇을 설명하고 자신을 누구라고 말할까 하며 서도진은 그의 혈을 점했다.

그리고 빠르게 그의 기억을 더듬었다.

서도진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는 동안 그가 가진 기억들이 떠올랐다.

현천이 자선을 죽이는 것이 보였지만 주악은 죽지 않았다.

사라졌지만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화등선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차라리 그런 편이 더 믿기가 쉬울 것 같았다.

‘대체…….’

서도진은 현천이 봤던 것을 그의 기억을 통해 다시 보고 있었다.

-뭘 하고 계십니까, 사형.

현천은 한 자리에 선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주악에게 물으며 다가갔다.

-사형.

그러나 주악은 현천의 부름에 답을 하지 않았다.

무아지경에 빠진 것인가 하며 현천은 그 곁을 지켰다.

주악은 그 후에도 잠시 더 그렇게 서 있었다.

현천은 주악이 뭔가를 생각하느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러십니까. 사형?

-사제. 사제 눈에도 이게 보이는가?

주악이 허공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나 현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기억을 같이 보고 있는 것이라서 그런 건지 서도진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사형? 뭐가 보입니까?

-이게, 사제 눈에는 보이지 않나? 여기에 적힌 글귀가?

-사형. 장난을 좋아하지도 않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그러면서 현천이 웃었지만 주악은 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 그러십니까?

현천은 그때까지만 해도 주악이 하는 말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으며 물었다.

-이계로 가시겠냐는 이 글귀가 정말 안 보인다는 말인가?

그 말을 들으며 서도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곳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도 그곳으로 넘어간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도진은 현천의 기억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형?

-아직 대답을 하지 못했네.

-가고 싶으십니까?

그때까지도 현천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했고 왜 사형이 평소에 안 하던 장난을 하는 건가 했다.

그렇게 웃고 넘어갈 줄 알았다.

설마 주악이 그렇게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 가고 싶어.

그 말을 한 직후였다.

주악의 모습이 그대로 홀연히 사라졌다.

현천은 그게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멍하니 그 자리에 있다가 주악을 불렀다.

바람으로 변해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바람은 일지 않았다.

현천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신선이 된 것인가? 이대로 우화등선을……?

현천은 그곳에 서서 한참이나 주악을 기다렸다.

갑자기 그렇게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기다리면 사형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설령 자기가 모르게 다른 것으로 변한 거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형! 사형!!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주악이 신선이 된 거라고 점점 더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선에게 알려주려고 달려갔다.

자선은 수련을 하고 있었고 현천이 가까이 달려왔어도 무심했다.

-사매. 사매. 사형께서, 사형께서 등선하셨어!

자선이 움찔하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현천은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그를 의심하는 눈빛을.

한순간 빛나던 눈에서 자선의 의심을 알아차린 현천은 기가 막혀서 더 이상 말을 하지도 못했다.

자선은 현천에게 다른 것을 더 묻는 대신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주악이 있던 곳으로 가서 그를 찾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곳곳을 찾아다니던 자선이 현천에게 돌아왔다.

-내 앞에 계셨는데 글귀가 보이지 않냐고 하셨어. 눈앞에 뭔가 보이는 것처럼 이상한 얼굴을 하고 계셨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사형이 그러셨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현천은 노기를 감추지 못했다.

설마 그 말을 전하면서 그런 의심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그가 느낀 감정은 정말 복잡했다.

억울하고 화가 나고.

처음에는 자기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하려고 애썼지만 곧 포기해 버렸다.

믿지 않겠다면 그러라고 해야지 어쩐다는 말인가.

자선을 죽인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바로 손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그 후로도 자선은 현천을 의심하는 듯이 바라보았고 노골적으로 경멸하기도 했다.

현천은 자선이야말로 가증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신선이 되기를 바라며, 신선이 되려고 수련을 하면서 정작 주악이 신선이 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질 이유는 죽음뿐이라는 듯이 현천을 노려보았다.

자선을 가두어 죽이고도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다른 자선의 제자들과 함께 태혈령을 자신의 제자로 들였다.

결국 그들 중 누구도 신선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사문의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수련하기를 바랐기에 적당한 시기에 자기 또한 사라져 주어야 했다.

그것이 그가 초암에 들어온 이유였다.

이렇게 계속 수련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신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자신의 눈앞에도 사형이 봤던 그 글귀가 나타나지 않을까.

그는 그것을 바랄 뿐이었다.

서도진은 천천히 손을 뗐다.

아직도 놀라움이 다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주악은 그곳에 가서 어떻게 됐을까.

그곳에서 헌터가 됐을까?

어느 시대였을까.

내가 있던 시기는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천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서도진은 현천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남자는 일견 무해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서도진에게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정말 그런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당장 자연지기를 사용할 수 있었고 바람이 되어서 이곳을 떠날 수도 있었다.

사문을 떠난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었고 그들을 찾으러 다니는 동안 만난 사람들을 해할 수도 있었다.

관원의 도움을 받아 가둔다고 해도 인세의 어떤 감옥이 그를 잡아둘 수 있을까.

그리고 서도진의 결단이 쉬워지도록 도와주기라도 하려고 그런 것처럼 현천이 손을 썼다.

매서운 손날이 서도진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살기가 담긴 손날은 그대로 목을 칠 기세였다.

서도진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

현천은 사라진 서도진을 찾으며 놀라워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사문의…… 사문의 제자였던 것이냐!!”

현천이 놀란 얼굴로 외쳤고 서도진이 그의 뒤에서 나타났다.

“당신은 신선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계가 죄지은 자들의 도피처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현천이 돌아보려 했지만 그는 채 몸을 다 돌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서도진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바닥을 박찼다.

왜 주악이었는지.

그는 어디로 간 것인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 * *

“희한한 일이네요. 그러면 우리도 그 사람을 봤을 수도 있겠습니다.”

서도진에게서 얘기를 들은 연월랑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가며 말했다.

“우리가 살던 곳으로 온 게 맞는 거겠지? 왠지 좀 무섭네.”

위도가 잘게 몸서리를 치며 말하자 서악이 위도를 보고 웃었다.

“아버지, 쉬 했져?”

“아니다. 인석아. 무서워서 그런 거야.”

그냥 웃기만 하는 것이, 아버지가 부끄러워서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갠찮아. 아버지.”

연월랑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서악아. 그런데 서악이 너는 어느 날 눈앞에 이상한 글자가 나타나서 물어도 절대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연월랑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서악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연월랑은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러다가 위도를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형님은 그게 다시 나타나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겠냐고 하면 안 간다고 하실 거지요?”

이제는 위도를 형님이라고 부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겉모습 따위야 어떻든 간에.

“그래야지. 나는 이제 못 가지. 우리 서악이가 여기에 있는데.”

그러면서 그는 서악을 안고 뺨끼리 문질렀다.

“아아…….”

연월랑은 생각이 깊어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은 이제 곧 자기에게도 묻겠다고 생각하면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왜 나한테는 안 물어요?”

“공자님이야 뭐라고 말씀하실지 당연히 아니까요.”

“뭐라고 말할 것 같은데요?”

“당연히 안 가신다고 하겠죠. 여기에서 서도진 공자님으로 살면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굳이 거기로 가겠습니까? 거기에는 아직도 계속 괴수가 나타날 텐데요. 우리가 없는 동안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도 모르는 거고요. 괴수들이 계속 던전에만 갇혀 있으라는 법도 없잖아요. 지금은 괴수들이 던전을 나와서 활개 치고 다닐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그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상상만 할 수 있는 거였지만 연월랑의 말 중에 틀린 것은 없었다.

아진도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동생도 안 갈 거지?”

위도가 묻자 연월랑이 한숨을 쉬었다.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제 몸을 찾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여기에서 사는 게 점점 재미있어져서 정말 모르겠어요.”

아진도, 위도도 그런 연월랑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이 연월랑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 군사님은 여자가 좋은 거죠?”

“당연하죠!!”

연월랑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자기는 여자가 좋다며 분개하듯 소리치는 모습은 여전히 어색했고 아마도 영영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거 참 문제네. 어디 여자 좋아하는 여자 없으려나? 동생이 짝을 찾으려면 그러는 수밖에는 없잖아. 애는 못 낳겠네.”

위도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자 요즘 혀 차는 것을 맹렬히 연습하던 서악이도 옆에서 같이 혀를 찼다.

연월랑은 느닷없이 그 일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는 듯했다.

“상태창은 이제 안 나와?”

위도가 묻자 연월랑이 웃었다.

“왜 안 나와요? 정말 열심히 나와요.”

“아직도 나와요?”

아진이야말로 놀라서 연월랑을 바라보았다.

“요즘에는 뭐라고 하는데요?”

“하라는 건 계속 같아요. 서 공자님을 죽이라는 거죠. 보상은 점점 더 커지는데 확 끌리는 게 없네요.”

그 말에 위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 어감이 이상한데? 확 끌리는 게 나오면 죽여보겠다는 것 같아.”

위도의 말에 연월랑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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