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3화
403화
백련은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 서도진이 혼자 밖으로 나오는 걸 봤을 때는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미행을 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어려워 사제 헌정을 데려온 것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백련은 자기가 데려온 헌정을 노려보았지만 제대로 야단칠 시간도 없었다.
전각에서 나온 서도진은 갑자기 전력을 다해 북궁세가를 떠나버렸고 그때부터 백련은 서도진을 뒤쫓는 데 전력을 쏟아야 했다.
그가 자연지기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바람으로 변해 그렇게 빠르게 달아나 버릴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장차 백산선문의 후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고 있는 백련마저도 서도진을 쫓아가는 것이 버거울 정도였다.
사제는 간신히 쫓아오고 있었다.
계속 이 속도로 간다면 자기도 서도진을 놓칠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서도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헌정에게 한눈을 판 순간은 정말 짧았는데 그 틈에 그 일이 일어나 버렸다.
서도진이 내내 바람의 형태로 앞서 달리는 중이었기에 눈을 돌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실책이 뼈아팠다.
그래도 조금 더 기감을 끌어올리면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백련이 서 있던 바닥이 솟구쳤다.
“아악!”
그때까지만 해도 백련 역시 바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발목이 붙잡히자 기운의 흐름이 분산되며 본신이 드러났다.
‘어떻게……?’
백련은 땅에서 솟아 나온 손이 자신의 발목을 잡아 바닥에 내팽개치는 순간 균형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서도진의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바닥에 나뒹굴고 나서도 한동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백련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발각돼서 자신의 정체가 노출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그때까지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그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백산선문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스승은 절대 그 일을 간과하지 않을 터였다.
선문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내 죽일 거라고 생각하며 백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선문의 다른 이는 몰라도 표월의 수족이 되어 움직여왔던 백련은 알고 있었다.
백산선문이 결코 숭고하고 고결한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그곳에서 흘린 피가 얼마나 많은지도 알고 있었다.
백산선문에서 일어난 수많은 죽음에 그녀와 스승이 관여되어 있었다.
백련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의 앞에 서도진이 서 있었다.
그는 백련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백산선문을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 알고 있던 백련으로서는 그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자기가 백산선문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나를 뭐로 보고!’
이렇게 된 이상 이 자리에서 서도진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죽는다면 백산선문이 세상에 알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명령보다도 우선시되는 거였기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죽여라!”
백련이 헌정에게 소리치자 헌정이 검을 빼 들었다.
태혈령의 제자인 헌정은 검에 일가견이 있었다.
백련은 그 실력을 얕잡아 보았지만 이곳에서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헌정이 서도진을 향해 달려가 검기를 뿌렸지만 서도진은 몸을 약간 비트는 것으로 그것을 흘려보냈다.
자기를 제대로 상대하려면 그것보다는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는 듯이.
그러는 동안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저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
백련도 싸움에 가담하려고 했는데 기운을 움직이는 것이 영 쉽지 않았다.
고작 발목을 붙잡혀 내동댕이쳐졌다고 기운이 이렇게 진탕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백련은 그 상황에 경악했다.
지금껏 한순간도 마음에 든 적이 없던 사제였지만 지금은 헌정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헌정은 쾌검으로 초식을 펼치며 서도진에게 짓쳐들어갔다.
그러나 서도진은 이번에도 별 힘을 들이지 않고 공격을 피했다.
막아 내는 것도 아니고 피하기만 하는 것이 어찌나 얄미운지 모른다.
서도진은 그러는 동안 헌정의 검술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봤을 때는 백련이 더 창피해졌다.
헌정이 장법을 펼치자 그것을 피한 서도진이 몸을 반 바퀴 정도 돌려 헌정의 등을 발로 찼다.
그 바람에 헌정의 몸이 몇 장 정도 떠밀렸다.
백련은 기가 막혔다.
그녀는 헌정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절대 이런 수모를 당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서도진의 앞에서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영 힘을 쓰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심기일전한 헌정이 수십 개의 검영을 뿌렸지만 이번에도 헌정만 힘을 쓴 거였고 서도진은 가볍게 피했다.
헌정이 검을 거두고 도망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런 멍청한!’
백련은 헌정이 백산선문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거라는 생각에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헌정은 그때부터 멈추지 않고 도망쳤고 서도진이 그 뒤를 따랐다.
백련은 헌정을 막거나 서도진을 잡아 세우려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모두 백산선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아진은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던 자의 뒤를 따르면서 실소를 흘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자는 자기를 백산선문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검을 휘두를 때는 어설프기 그지없더니 신법은 신기에 가까웠다.
어느 것 하나가 특출난 일이야 많지만 이렇게까지 불균형을 이루는 것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아진은 그자가 일부러 자기를 백산선문으로 이끄는 거라고 생각했다.
‘확인하는 게 어렵지도 않고.’
아진이 멈추자 한창 급하게 달려 나가던 헌정이 멈췄다.
자기는 도망치는 중이니 그 틈을 타서 더 빠르게 가야 할 텐데 아진이 멈춘 이유를 알지 못해 전전긍긍한 모습이었다.
백련의 움직임은 확실히 달랐다.
백련은 지금이라도 아진을 묶어둬야 한다고 생각한 듯 전력으로 달려와 아진을 막아섰다.
아진은 자신의 눈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백련을 보면서 검을 빼 들었다.
“이번에는 죽인다.”
백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백련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그녀는 최소한 헛소리 집어치우라는 말 정도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진의 앞에 선 그녀는 그 말이 현실이 될 것 같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백산선문이냐.”
“……!”
백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면 살려줄 수도 있다. 나를 백산선문으로 데려가라.”
“…….”
백련은 그때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서도진은 이미 백산선문에 대해 알고 있고 여기에서 자기가 죽는다면 선문에 대한 이야기가 퍼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황궁에도 마음대로 드나들고 황상과도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서도진이라면 백산선문에 대해 제멋대로 이야기를 퍼뜨릴 수도 있을 듯했다.
‘차라리 이자를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죽이는 게 나은가?’
서도진은 혼자였고 다른 사람을 데리러 갈 것 같지도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면 하월과 함께 나섰을 것이다.
백련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우선은 자기가 먼저 상대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서는 이길 방법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공격을 하려 했다.
그러나 백련이 공격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서도진이 곧장 검강을 뿌렸다.
놀란 백련은 허겁지겁 몸을 피했다.
검강이라고 해도 위력이 저마다 다른 법인데 서도진의 검강은 피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는 그 자리에서 반드시 백련을 죽이기로 결심을 한 것처럼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이어진 공격에서는 검강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만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모든 초식이 위협적이었고 그때부터 단 한 순간도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백련이 이리저리 몸을 피하는 동안 서도진은 연달아 공격을 했지만 위력은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그는 백련을 죽이려고 공격을 한 게 아니라 함께 있는 다른 이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위해 그러고 있는 것뿐이었다.
헌정은 난감했다.
잘 따라오기에 이대로 백산선문에 데려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멈춰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백련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느 날 표월이 그를 데려가 구배지례를 하게 하고 이제부터는 자기가 헌정의 스승이라고 했다.
자신의 스승은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어디에서도 스승을 볼 수가 없었다.
표월이 좋은 낯빛을 하고 잘 대해주기는 했지만 헌정은 스승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서도 스승을 찾을 수 없었고 그러던 차에 백련의 부름을 받았다.
서도진이 그들의 기척을 알아차린 것은 헌정 때문이었다.
백련만 있었다면 아마도 서도진은 끝까지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기척을 숨기는 것은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그들이었다.
헌정은 일단 서도진을 백산선문으로 데려가면 그곳에 소란이 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틈을 노려 스승을 찾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 따라오던 서도진이 왜 갑자기 멈추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도진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마치고 다시 그를 쫓았다.
헌정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때부터 다시 백산선문으로 향했다.
헌정의 신법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진도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산본의가에서 남이천이 신법으로 특출난 것처럼 그의 앞에 가는 자도 백산선문에서 그런 자인 듯했다.
가는 동안 서도진은 백산선문에서 펼쳐질 일을 상상했다.
‘태혈령이 미행을 붙인 건가? 그때 부상을 당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건가? 자연지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월등히 실력이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것은 백련과 겨루어보고 더욱 확실히 깨달았다.
백산선문은 그동안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고 그 때문에 막연히 긴장했는데 막상 백련의 실력이 그리 높지 않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
백산선문에 가면 거기에는 그녀보다 훨씬 실력이 높은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을 듯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각각 다른 생각을 갖고 백산선문으로 향했다.
* * *
표월은 세 사람이 백산선문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이미 기척을 느꼈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한 백산선문에 찾아온 외인은 수십 년 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랬기에 그 작은 변동이 일찌감치 감지되었다.
그가 제자를 부르자 수련 중이던 제자가 바람이 되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아이들을 모아라. 침입이다.”
“예, 스승님!”
침입이라는 말에 놀란 제자가 그때부터 빠르게 경내를 오가며 종을 쳤다.
그러자 수련에 들어갔던 제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표월은 그들의 앞에 나서서 침입자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들은 놀란 얼굴로 표월을 보다가 이내 태세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