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2화
402화
“황실에 가서도 한번 확인해 봐. 오라버니. 자연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황상 폐하께 돌려 달라고 해.”
산본의가에서 확인이 끝나자 린린이 말했다.
“정말 그래야겠는데?”
그건 확실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냥 태혈령이 단순히 자기를 찾아왔다가 돌아간 거라고 하면 걱정할 문제가 아니겠지만 뒤에 백산선문이 버티고 있다면 조직적인 공격에 대비할 방법을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할 듯했다.
“연 군사랑 함께 가. 오라버니. 거기에서 자연지기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데리고 와야 하잖아. 그 사람들을 데려오면 황상이 서운해할 수도 있으니까 연 군사를 인사시키고 정신을 빼놔버려. 연 군사의 의술을 보여드리면 황상은 거기에 정신이 팔리실 거야.”
“악랄하네. 그러다가 연 군사를 궁에 두고 싶다고 하시면? 나 같으면 연 군사를 황의로 두고 싶으실 것 같은데.”
“안 된다고 해야지. 우리가 안 된다고 하면 황상도 고집을 부리지는 않으실 거야.”
그도 그럴 것 같기는 했다.
린린과 얘기를 나누고 연월랑을 찾아가 그 이야기를 나누자 연월랑은 생각이 복잡해지는 듯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잡히면 어떻게 하죠? 제 미모가 너무 뛰어나다 보니 걱정이 되는데요…….”
아진은 어떻게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연월랑을 바라보다가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의와 상관없이 북천에서 7년이나 잡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러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연 군사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아뇨. 한 번 가 보죠. 황상이 저를 데리고 있으려고 해도 공자가 데려올 수 있죠?”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됐네요. 황성 구경 한다고 생각하고 가면 될 것 같아요.”
연월랑은 확실히 좋은 패였다.
황제는 연월랑을 신기해했고 연월랑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연월랑이 황제와 함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진은 편하게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자연지기를 파악해갔다.
자연지기를 가진 사람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백산선문에 대한 기록이 서고에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며 아진이 서고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그 일을 돕도록 하월을 보내 주었다.
하월은 그간의 일을 모두 듣고 꼼꼼하게 기록을 살폈다.
서고를 관리하는 사람보다도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아진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보자 하월이 그렇게 볼 것 없다며 황상의 명령으로 계속 그 일을 해 오고 있었다고 했다.
그곳을 맡은 사람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황상은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서고 안에 있는 책의 내용을 알고 필요할 때 바로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고 했다.
“이런 일은 오감이 뛰어난 사람이 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하월은 오랜 경험으로 숙련된 자였고 황제의 곁에 있는 사람 중 그 일에 적격이었다.
아진의 말을 들은 후에 하월이 책을 찾는 방식은 희한했다.
서가를 이리저리 다니며 한두 권씩 빼서 확인을 하고 그중 몇 권을 아진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이미 머릿속에 내용이 어느 정도 들어있다가 검증을 한 후에 가져오는 듯했다.
그러나 정확히 백산선문에 대한 내용은 아니었고 도학과 다른 선문에 대한 책들이었다.
“백산선문에 관한 건 아니군요.”
“예. 백산선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백산선문이라는 이름은 아니어도 그곳에 대한 기록이 있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진은 하월이 가져온 책을 뒤적여 보았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뭘 찾으려고 하는 건지도 헷갈렸다.
그러자 하월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진에게 말했다.
“이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격입니다.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찾은 것으로 뭘 하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산선문이 어떤 곳인지 알고 공격에 대비하려고 하는 거라면 이 시간에 차라리 수련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모르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아진이 말하자 하월이 한숨을 쉬었다.
“공자를 보면 원망이나 불평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힘든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공자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말이지요.”
“그럴 것 없습니다. 그래도 일 년에 며칠 정도는 평화로운 날도 있어요.”
말을 하고 나니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한 건가 해서 서글퍼졌다.
“선문을 중심으로 파고들어 갈 게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파보면 어떨까요? 공자의 어머니 나이를 추산해서 말입니다. 공자의 어머니가 백산선문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아뇨. 일단 나이부터 추산이 되지 않습니다. 산본에 왔는데 이십 대의 모습이더군요. 벽예월 소저가 미리 말을 해 주지 않았다면 내 생모라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나보다 더 나이가 어려 보였어요.”
“아…….”
하월은 다시 길이 가로막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까요?”
“산본에서 지키고 있으면 다시 찾아올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왜 혼자 온 걸까요? 온 이유가 뭐였다고 생각합니까, 공자? 갑자기 피에 끌려서 온 건 아닐 것 같은데요.”
“그건 전혀 아니죠.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요.”
하월은 내내 느껴지던 이상한 기분이 뭔지 그제야 깨달았다.
서도진은 어느 상황에서도 일정 범위 이상으로 감정이 널을 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던 것이다.
처음에 하월은 서도진이 지금껏 만나왔던 것과 전혀 다른 적을 상대하게 돼서 그런 건가 보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공포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가 이제 그게 깊은 증오와 경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의도치 않게 서도진이 차지하게 된 몸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서도진을 죽이려고 왔다는 것을 알고 본신에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 그럼 아버지는요?”
하월이 갑자기 묻자 아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요?”
“예. 서 공자의 아버지요. 그 몸의 원래 주인을 태어나게 해 준 아버지 말입니다. 그 사람은 평범하게 나이를 먹지 않았을까요?”
아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한숨을 쉬었다.
“아닙니다. 이거야말로 바늘 찾기예요. 이제부터는 그냥 부딪치겠습니다.”
“예. 아무래도 그러는 게 낫기는 하겠습니다.”
서고에서 돌아갔을 때 황제는 연월랑의 얘기를 들으면서 계속 질문을 하고 있었다.
아진이 돌아갔는데도 우선 연월랑에게 물었던 이야기의 답을 먼저 들으려고 했을 정도였다.
연월랑은 아진을 힐끔거리며 불안해하는 듯했다.
황제가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바람에 자기가 황도에 묶이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안 그래도 지금껏 산본의가의 인재들을 데려온 마당에 연월랑까지 여기에 있으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아진이 간다고 하기 전에 궁금한 것들을 최대한 물어보려고 그러고 있는 거였다.
“왜 이리 빨리 온다는 말이냐. 하월. 아진을 데리고 가서 같이 놀고 있거라. 나는 아직 연월랑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단 말이다.”
“드릴 말씀은 거의 드린 것 같습니다. 폐하.”
연월랑은 자기가 왜 그렇게 얘기를 재미있게 한 건지 후회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진과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도 신기하고 북천의 군사였다는 것도 그런데 성별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아진과 함께 다니는 동안 상태창이 다시 나타나는 걸 본 적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이야깃거리가 많은 아진조차도 연월랑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할 판이었다.
“연월랑. 며칠간 황도에 머물면서 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안 되겠느냐. 아진이 요즘에는 통 짐을 보러 오지 않는다.”
연월랑은 이렇게 될 것 같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황제는 연월랑이 그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번에는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매달려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진이 먼저 나섰다.
“폐하. 연 군사는 산본의가에서 하는 일이 많습니다. 연 군사를 두고 저만 돌아가면 제가 어머니 눈치를 봐야 합니다.”
황제는 아진을 노려보았다.
반박할 수 없는 공격에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연월랑. 세상은 넓다. 산본의가에서만 뜻을 펼치려고 하지 말고 언제든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도록 하라. 짐의 옆에서 함께 큰일을 도모하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예. 폐하. 가모님께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걸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혼자 생각하거라. 혼자.”
가모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고 연월랑이 탐이 나기는 해서 황제는 진땀을 흘렸다.
연월랑도 그 분위기를 눈치채고 신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산본의가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가모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만으로 이렇게 쩔쩔맬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황제의 앞에서 물러난 아진이 북궁세가에서 하월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공자. 연 군사를 산본에 데려다줄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서 공자는 산본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예. 할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하월이 원래 남의 일에 관심을 갖는 성격은 아니지만 서도진의 일은 퍽 궁금했다.
[한동안 확신이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확신이 듭니다. 나를 따르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하월이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한 그대로입니다. 백산선문과 관계된 자인 것 같은데 신기하군요. 이렇게까지 기척을 숨길 수 있다니.]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월은 놀라서 물으면서도 주위를 함부로 돌아보지는 않았다.
아진은 대답을 하지 않았고 하월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아진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며 그도 긴장한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월 자신은 지금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진도 몰랐다는 것은 진심으로 놀랍고 긴장이 됐다.
[연 군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 공자님. 산본까지 무사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하월의 허락을 받은 후 아진은 연월랑에게 전음을 보냈다.
[연 군사. 북궁 공자가 군사를 산본까지 데려다줄 겁니다. 미행을 처리하고 뒤따라가겠습니다.]
연월랑이 놀라며 고개를 돌렸을 때 아진은 이미 그곳을 나선 후였다.
자기가 북궁세가에 왔다는 이유로 북궁세가가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며 미행과 함께 그곳을 떠나려 했던 것이다.
연월랑이 깜짝 놀란 얼굴로 하월을 바라보았다.
“편하게 식사를 마치시지요, 연 군사님.”
“하지만 서 공자님이…….”
“서 공자님이 알아차렸으니 이제는 걱정할 일이 없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연월랑이 계속 불안해할 것 같아 일단은 그렇게 말을 해두었다.
산본까지 연월랑을 데려다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서도진도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이 더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이 일을 실패할 수는 없었다.
믿고 맡겼는데 이 일을 제대로 못 하면 아마 십 년은 족히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잔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들을 수 있겠지?’
잔소리를 듣는 것도 일단은 무사히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