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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01화 (401/470)
  • 제401화

    401화

    태혈령은 자선의 제자였지만 자선마저 선계에 이르면서 현천을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재능 있는 제자들을 자신의 밑에 두기 위해서 현천이 두 동문을 죽인 거라는 말이 은밀히 나돌기도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들은 전부 사라져 버렸고 현천은 그들이 우화등선했다고 말했다.

    스승인 현천은 늘 웃는 상을 하고 있었다.

    큰 소리를 내서 화를 낸 적도 많지 않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제는 그 자리를 표월이 대신하고 있었다.

    태혈령을 죽지 못해 사는 꼴로 만들고도 그는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혈령이 작심하고 애정을 가진 채 키웠던 제자들을 자신이 거두기로 결정하면서도 표월은 웃는 낯빛을 지우지 않았다.

    이번에야 태혈령이 확실히 잘못을 했다지만 그 일로 인해 태혈령에게는 그동안 잊고 있던 의문과 기억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그러고 보면 사문에는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과 제 스승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여섯 달 동안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뇌동에 가두고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진 후 태혈령은 좁은 뇌동에 갇힌 채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저를 바라보며 곧잘 웃던 사형이 내린 명령이라고는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잔인한 벌이었다.

    그러나 염화로 자신을 태워 버린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좁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을 당겨 두 팔로 감쌌다.

    자세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좁은 곳에서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처음은 아니었다.

    태혈령은 종종 문제를 일으켰고 사형은 그 문제를 수습했다.

    문제를 수습하는 일이 어렵지 않으면 여전히 웃음을 짓고 태혈령을 다독이면서 뒤처리를 했지만 태혈령이 일으킨 문제가 너무 크면 표월은 폭발했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여섯 달이라니.’

    태혈령은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산본의가에 다시 찾아가서 자기를 이렇게 만든 녀석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표월이 자신을 가둔 이유가 바로 그것을 염려해서 그런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태혈령의 생각은 산본의가를 떠나지 않았다.

    태혈령은 좁고 낮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지루해서 자연지기를 모았다.

    빙백의 기운이 모이자 그녀의 몸에서 푸른 기를 품은 밝은 빛이 일렁거렸다.

    그러자 어둠이 조금 밝혀졌고 태혈령은 그곳에 처음 갇혔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울퉁불퉁한 벽에는 피로 쓴 글씨가 있었다.

    ‘현천.’

    표월의 스승이자 나중에는 태혈령 자신의 스승이 되었던 이의 이름이었다.

    글씨에 감정이 담길 수도 있다는 것을 태혈령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태혈령은 그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스승인 자선의 글씨를 태혈령이 몰라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뇌동 안에서 자연지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 힘을 사용해 뇌동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연지기를 새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이곳에 계속 갇혀 있으면 결국 모든 힘을 잃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태혈령은 깨달았다.

    욕심이 사납기는 했지만 자신을 좋아했던 사형이 이렇게까지 한 것을 보면서 태혈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본의가가 도대체 뭐기에?

    자기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빙백기의 밝은 기운을 거두며 태혈령은 제 스승에 대한 생각도 거두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에게 남은 자연지기를 함부로 낭비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태혈령이 뇌동에 갇혀 상념을 풀어내고 있을 때 표월은 제자들을 불러들였다.

    모두가 십 대 중반에서 이십 대 초반으로나 보였기에 그들을 한 사문의 사조와 제자들로 보는 사람들은 없을 터였다.

    “당분간은 모든 활동을 멈추고 수련에 힘쓰도록 하라. 백련만이 활동을 계속하며 산본의가의 이공자 서도진에 대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내도록 하라. 인원이 더 필요하다면 자의로 얼마든지 사용하도록 하라. 백련의 임무를 받지 않은 자는 모두 폐관수련에 들라.”

    표월의 엄한 명령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보면 앞으로 피할 수 없는 큰 전쟁이 다가올 것 같았다.

    산본의가의 이공자 서도진.

    그들 중 외부 활동을 허락받지 못한 자들은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래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각자가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백련의 명을 받은 몇 줄기의 바람이 사문을 떠났다.

    * * *

    린린이 뭔가 엄청난 것을 깨달은 듯이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서 그랬던 거네. 오라버니는 자연지기를 사용할 수 있는데 나는 왜 못 하는 건가 했더니 오라버니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내가 그걸 못 하는 것도 잘못된 게 아니고. 오라버니는 그런 체질을 타고난 거잖아.”

    그까짓 자연지기쯤이야 조금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줄 알았더니 사실은 오래오래 마음에 담아두었는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그 생각 하고 있었냐?”

    “아니. 지금 막 생각났어.”

    그래도 그걸 깨닫고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그러면 그건 처음부터 그런 체질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소청이 묻자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아니지 않을까? 마선님도 익히기는 하셨잖아.”

    “아아. 그럼 사고님 문제이기는 한 거네요.”

    소청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린린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오라버니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무시하니까 소청이도 저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 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서 아진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누가 자연지기를 익힐 수 있는지 모른다면 여러 사람에게 시도를 해 봐서 누가 익힐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백산선문에서 제자를 들이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백산선문을 세운 자선과 주악은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는 아이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선계의 존재에게 대가 없이 받은 총애의 징표였기에 수련으로 계발(啓發)되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자연지기를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자선과 주악은 천하를 떠돌아다녔고 그 과정을 통해 제자를 들였다.

    현천은 그런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 표월은 달랐다.

    표월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얼굴빛을 통해 그가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는 자인지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표월이 태혈령을 마음에 두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는 태혈령의 능력 때문이었다.

    지금은 사용할 수 있는 자연지기가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는 언젠가 그녀의 능력이 모두 각성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세상의 누구도 그녀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선계의 존재들에게 받은 총애.

    비록 태혈령 자신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야말로 그런 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아진은 그런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말했고 린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런 건 어떻게 알아봐야 하지, 오라버니?”

    “시켜 보면 되겠지. 바람이 멈춘 곳에서 바람을 일어나게 하거나.”

    “오라버니. 그거 원래 막 쉽게 되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아진이 너무 간단하게 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린린이 말했다.

    “응. 알아.”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괜히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자연지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마다의 가슴에 솟구쳤던 것이다.

    소청은 언제부터 알아볼 거냐고 직접 물었고 랑랑도 빨리 시작하면 좋겠다며 의욕을 드러냈다.

    아진은 그 두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막연한 감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하기로 한 이상 뒤로 미루기만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진은 그 일에 다른 사람을 동원하기보다는 자기가 직접 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괜히 불러서 알아봤다가 능력이 없는 것 같다며 돌려보내면 실망스럽지 않겠나 해서였다.

    헌터로 각성하고 자신의 실체를 처음 알게 됐을 때의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은 먼저 소문이 퍼져갔다.

    아진이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특별한 무력부대를 만들 거라는, 웬 근본 없는 뜬소문이 날개 돋친 듯 퍼졌던 것이다.

    그중에는 린린과 소청이 나눈 대화가 한몫했다.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넉넉하게 나오면 그 사람들로 무력대 하나를 새로 만들 수도 있겠네요, 사고님?”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그 무력대는 정말 대단하겠다. 오라버니가 직접 훈련을 시켜 주겠지?”

    그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그것이 기정사실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소문을 퍼뜨렸고 그 결과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은 뜻밖에도 섬풍대의 청수와 무린이었다.

    청수와 무린은 눈앞에서 자연지기를 사용한 사람을 직접 봐서 그 힘을 구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건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단번에 성공했다.

    내공을 사용해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많은 무림인들도 가능했지만 내공을 움직이지 않고 자연지기를 사용해서 그 일에 성공하는 것은 오직 선택받은 소수만 가능했다.

    먼저 청수와 무린이 그것에 성공하자 섬풍대는 엄청나게 흥분하며 아진에게 들이닥쳤다.

    아진은 아이들이 왜 이러는 걸까 하면서 지켜보았고 그 앞에서 청수와 무린이 자연지기로 흙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틈도 없이,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이 자연지기를 일으킨 두 아이를 보면서 아진은 자기가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부터는 적극적으로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발굴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청수와 무린이 잇따라 성공하자 자기들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에 들떠 있던 섬풍대의 아이들은 섬풍대에서 나올 사람은 그게 끝이었다는 것을 알고 너무 속이 상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도전하고 아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채 고배를 마시자 갈수록 상황이 재미있게 되었다.

    소청과 린린부터, 위도와 도종, 랑랑도 자연지기를 사용하지 못했고 산본의가와 그 사업장에 속한 사람들 중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전부 실패했다.

    아진은 특별히 산본의가 사람들에만 제한을 두지 않았고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으면 폭넓게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청수와 무린뿐이었고 그 때문에 처음에는 자연지기를 가진 사람이 나타날 확률이 엄청나게 높았다가 꾸준히 내려가다 결국은 바닥을 찍었다.

    연월랑은 이번에도 꽝이었는데 자기 인생이 늘 그렇지 하면서 이제는 딱히 낙심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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