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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99화 (399/470)

제399화

399화

하룻밤의 만남이었지만 억지로 잊으려고 해도 그 얼굴이 쉬이 잊히질 않더니 그 자리에 그가 있었던 것이다.

흡정대법으로 죽여 버린 그 남자일 리는 없고.

산본의가 이공자. 서도진.

드디어 모든 조각이 태혈령의 머릿속에서 맞춰졌다.

‘네놈이구나.’

그녀의 얼굴에 싸늘한 표정이 깃들었고 태혈령이 있던 나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 *

“공자님!”

아이들이 아진을 향해 달려갔다.

“너희.”

아진이 청수를 먼저 보더니 아이들을 하나씩 살폈다.

“무슨 일이냐.”

아이들에게 물었지만 그는 기감을 먼저 펼쳤다.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강력한 기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렬한 기운이 느껴져서 밖으로 나왔던 것인데 그 기운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감을 제법 넓게 펼쳤지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방향이 어디인지는 알 것 같아서 쫓아가면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자기가 떠난 후에 그 여자가 돌아와서 아이들을 다시 공격할 수도 있을 듯했다.

이런 곳에 와서 기운을 방출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을 것이고 다시 돌아와서 살인멸구를 하려고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들자 제일조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린린을 데려와라.”

아진이 말하자 제일조가 사라졌고 곧 린린이 나왔다.

그러는 동안 아진은 청수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의 눈을 고쳐주고 있었다.

린린은 아이들의 눈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흙먼지가 솟구쳐 올랐어요. 저희 시선을 가리려고 그러는 것 같아서 계속 봤죠.”

당당하게 말한 아이는 하무린이었다.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어차피 말을 해 봐야 이 녀석들은 절대로 듣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지금 꽤나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터였다.

“이리 와라.”

아진은 오랜만에 마나를 사용해서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

각막이 찢겨서 하마터면 시력을 잃을 수도 있었는데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진이 한숨만 쉬고 있을 때 린린이 따끔하게 충고를 했다.

“너희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되면 나중에 긴박한 전투가 벌어질 때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은 비게 되겠지. 그러면 우리는 아쉬워하게 될 테고.”

린린의 말은 즉각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 보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일단은 그렇게 해서 뭘 봤는지나 말해봐.”

린린이 말하자 아이들은 앞다투어 이야기를 쏟아 냈다.

“바람으로 변해서 사라졌어요. 젊은 여자였는데요. 그 여자도 자연지기를 사용하는 것 같았어요. 실제로는 젊은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요. 여자가 아닐지도 모르고요.”

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건 연월랑을 보면서 생긴 의심이었다.

이제는 겉만 보고 쉽게 여자라고 믿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팽배해진 것이다.

“내 어머니라는 것 같던데.”

아진이 말하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자님?”

“벽 소저가 말해 줬거든. 나를 낳았던 여자가 나를 찾아올 거라고. 나랑 닮은 것 같았어?”

아진이 묻자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지 닮은 것 같다는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그 여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정확히는 태혈령이 아진을 이공자‘님’이라고 안 부르고 이공자라고 부른 순간부터 마음에 안 들었었기에 두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너희. 진을 펼친 거야?”

“네. 엄청났던 것 같아요. 저희 정말 대단했어요. 멀리 있었는데도 저희가 부르는 걸 듣고 이 녀석들이 왔고요.”

청수가 말하자 아이들도 그 틈을 타서 자기들의 활약상을 말하느라 바빴다.

“허공답보는 처음 해 보는 거였는데 그게 됐어요. 그동안 번번이 실패만 했는데 조금 전에는 바로 되더라고요? 형이랑 애들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더니 저절로 됐어요.”

아진은 아이들을 보며 진심으로 놀랐다.

언제 이렇게 자란 건가 했던 것이다.

“잘했다. 잘했다고 안 해도 너희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으니까 그냥 잘했다고 하는 거야.”

아이들은 아진이 말하는 바를 알고 흐뭇하게 웃었다.

아진이 자기들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자기들이 아진을 지켜 줬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앞으로 저희도 믿어 보세요. 공자님. 저희 정말 엄청난 것 같거든요.”

무린이 말하자 청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정말 맞는 것 같다고 했다.

평소에는 진중하고 침착한 청수가 자기들의 진면목을 깨닫고 놀란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 재미있게 보였다.

“그런데 왜 공자님을 찾아왔대요?”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건 평범했다.

공자님이 유명해지니까 이제 와서 공자님의 유명세를 이용해 보려고 한 거거나 돈이라도 얻으려고 온 게 아니냐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설마하니 아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죽이러.”

“네? 세상에…… 공자님. 괜찮으세요? 속상하시죠…….”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아진은 무수한 동정을 받게 되었다.

그 일로 산본의가의 일가가 급히 모였다.

아진의 생모가 아진을 찾으러 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산본의가에 퍼져 나갔다.

소식을 들은 가모가 가장 먼저 아진을 찾아왔다.

그녀는 아진이 충격을 받았을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아진아.”

그녀는 괜찮냐고 묻지도 못한 채 아진을 안아 주었다.

이제는 아진을 안으려면 아진이 몸을 한껏 낮춰 줘야 했다.

“제 어머니도 아니잖아요. 저는 괜찮죠. 그냥 저는…… 진짜 아진이에게 미안해요.”

“그래…….”

가모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어서 가주와 도종도 달려왔고 가주는 가모가 했던 것과 똑같이 아진을 안아주었다.

“이제 와서 뭐라고 말해도 너를 뺏기지는 않을 거다. 아진아.”

“네. 꼭 그래 주세요. 절대 뺏기시면 안 돼요.”

아버지의 말이 흐뭇해서 아진은 다시 부탁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다 있을 수 있다는 말이냐. 잊어라. 다 잊어버려라. 아진아.”

아진은 그러겠다고 말했지만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진은 자신을 찾아온 여자가 자연지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린린과 함께 먼저 마선을 보고 오기로 했다.

연월랑은 가는 김에 혹시 역천마의를 만나서 자신에 대한 연구의 진행 상황을 같이 들어 볼 수 있을까 했고 결국 그렇게 세 사람이 함께 나섰다.

혹시라도 그사이에 생모가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지만 위도와 소청도 있고 도종도 이제는 믿을 만했으며, 게다가 청수를 비롯한 패월방의 아이들도 이제 제법 기대해 볼 만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형님. 그때까지만 잘 부탁해.”

“오래 걸려도 되니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다 알아 와.”

도종이 의젓하게 말하는 걸 보며 아진 일행은 산본을 떠났다.

폭풍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머리는 그럴수록 오히려 냉철해졌다.

* * *

“사매.”

“…….”

“사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태혈령은 사형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짓을 하고 돌아온 거야? 왜 이렇게 얼이 빠져 있어?”

그답지 않게 사형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언제나 그에게 고자세를 취하던 태혈령이 뭔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 이미 의심할 이유는 충분했다.

“어디에 갔던 거지?”

“…….”

평소라면 태혈령은 그의 말을 그냥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별 같잖은 것들에게 제가 바람으로 변해 사라지는 것을 보인 탓이었다.

사문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사형이 장문인이 된 후에 더욱 철저히 지켜져 오던 일이었다.

“사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굳어졌다.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의 손에서 염화가 일렁이는 것을 보고 태혈령이 말했다.

“산본……의가에.”

“산본의가? 거기에는 왜?”

그는 이미 그곳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매.”

그녀를 부르는 소리의 끝이 뚝 떨어졌다.

그동안 그는 태혈령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태혈령은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로 돌아온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러나 무책임하게 숨어 버릴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말을 하기는 해야 했다.

사문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애를 찾아갔나? 왜?”

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의혹의 뒤에, 냉혹한 조롱이 이어 붙었다.

“보고 싶어서? 아니면 갑자기 엄마 노릇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자기가 사형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는데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때문에 계속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게 아니라. 내 오점을 지우려고 간 거였어요.”

“그런데?”

“그런데 웬 놈들이 나타나서…….”

결국 태혈령은 결코 말하고 싶지 않았던 얘기를 해야 했다.

그들에게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이 바람이 되어야 했다는 사실을.

“뭐?”

“……미안해요.”

“다시 말해 봐.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미안해요. 나도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에요. 숨기려고 했어요. 흙먼지를 치솟게 만들었고 그걸 날렸는데 바보 같은 것들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눈을 감지도 않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어깨가 들썩거렸다.

화를 참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라. 사매.”

“사형…… 미안하다고 말했잖아요!”

화르르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지옥의 염화가 그녀를 태웠다.

그녀와, 그리고 태혈령이 있던 공간 모두를.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되지도 못했다.

그 순간 바람이 되어 숨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사형의 능력은 그녀를 압도했고 탈주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태혈령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고통에 내동댕이쳐졌다.

화염이 태혈령을 다 태우고 나면 그녀의 형상이 다시 만들어졌다.

꺼졌던 생명은 그렇게 다시 움텄다.

사문의 제자에게 내린 스승의 선물은 자비가 아니었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몸.

고통은 영원했다.

* * *

“교주님. 산본의가에서 굶으십니까.”

마선은 뺨을 부풀리며 정신없이 음식을 먹어치우는 린린을 보고 말했다.

안쓰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린린은 저도 모르게 아진의 얼굴을 살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집에서도 그러더니 밖에 나와서 잘하는 짓이라는 표정이었다.

아니. 맛있어서 조금 서둘러 먹은 거였는데.

“그런데 왜 저한테 존대를 하세요. 선배님?”

“교주님인데 당연하지요.”

그러면서 아진을 빤히 바라보는 게, 서 공자도 우리 교주님에게 존대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 같았다.

린린은 상황이 점점 흥미진진해진다고 생각하며 볶은 고기를 입에 한껏 밀어 넣고 오물거렸다.

역천마의도 그 자리에 있고 싶어 했지만 연월랑이 가로채 가 버렸다.

“우선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마선님. 자연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요.”

아진은 교묘히 그 이야기를 피했다.

꼭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면 자기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고 말을 해 주겠지만 지금은 마선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봐서는 백산선문이 아닐까 하는데 지금까지 소문만 무성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사문 사람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노부가 만난 적이 없다고 해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봤다면 부정할 수 없겠지요. 무위는 어느 정도라고 하던가요?”

아진은 청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부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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