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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98화 (398/470)

제398화

398화

벽예월은 아진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 몸의 주인에게 느끼는 미안한 마음도 알고 있었고 그 몸의 주인이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것에 화가 나기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빨리 알려 드렸어야 했는데. 짜 맞추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요.”

“아닙니다. 벽 소저가 아니었으면 누가 그걸 알 수 있었겠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공자님. 저는 공자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그런데 벽 소저는 위로 같은 건 잘 못 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아니. 그것도 어쩌면 오해일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저에게 위로받았다고 말하기도 하거든요.”

아진은 벽예월을 놀리는 게 정말 쉽다고 생각하면서 웃었다.

“벽 소저는 항상 저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벽 소저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래요.”

벽예월은 순한 눈꼬리를 내리고 웃었다.

아진은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제 주위에 넘쳐난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와 비례해서, 원래 자기 대신 그 모든 것을 누려야 했을 몸의 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기다리고 있어야겠네요.”

“네. 뭐라고 말하건 듣지 마세요. 함께 가자고 해도 같이 가시면 안 돼요.”

“저를 데려가려고 오는 거예요?”

“그건 몰라요. 그런데 좋은 의도가 아닌 건 분명해요.”

“네.”

아진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누군가를 화나게 하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정말 세상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아진을 버리고 간 여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 * *

태혈령은 제 성질을 겨우겨우 누르면서 산본의가에 도착했다.

낭인은 정말 도움이 안 됐다.

산본의가를 찾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깨달았을 때는 그때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태혈령은 낭인에게 돈을 던지고 산본의가를 향해 신법을 펼쳤다.

자연지기를 이용한 방법은 아니고 월하일보를 펼쳤는데 그것만으로도 낭인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남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기가 아는 것 중에는 월하일보 정도가 평범했다.

월하일보를 펼친 결과 태혈령은 산본의가 근처에서 청수 일행과 마주쳤다.

그들은 객잔에서 봤던 여자가 그곳에 나타난 것에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던 여자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신법을 펼쳤다는 건가 해서였다.

태혈령은 그들에게 쏘아붙이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일단은 이공자를 먼저 보기로 했다.

그러나 청수는 태혈령이 거기까지 온 것을 보고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 태혈령의 앞을 막았다.

“여기에는 웬일입니까. 소저.”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왜 너에게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는 산본무관의 섬풍대 소속입니다. 섬풍대의 임무는 산본의가의 질서를 지키는 겁니다. 소저가 왜 여기에 왔는지 물을 수 있는 권한은 우리에게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게 나오자 그녀도 더 이상 계속해서 하대를 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이공자를 보러 왔어요. 이공자를 만나기만 하면 될 일이에요. 섬풍대에는 볼 일이 없고 말이에요.”

“이공자님을 찾아오는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좋은 의도로 오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소저의 신원을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조그만 것들이 무인 놀이를 하는 것 같아서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점점 태혈령의 인내심에 바닥이 드러났다.

“무복을 입고 알량한 내공을 갖고 그럴듯한 검을 차고 있으니까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세상을 좀 더 두려워하면서 살면 좋겠군요.”

태혈령이 말하자 청수가 웃었다.

“소저를 산본의가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소한 요구에도 응하지 않는 소저가 공자님을 뵙게 되면 쓸데없이 분탕만 치게 될 것 같군요.”

태혈령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청수는 그냥 말만 그렇게 한 게 아니었는지 태혈령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청수와 함께 온 이들도 각자의 자리를 점하며 태혈령을 막았다.

태혈령은 한숨을 깊이 쉬었다.

이런 곳에 와서 이런 조무래기들에게 붙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말을 할까 생각하자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본신의 힘을 다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형이 바로 그 사실을 알아낼 터였다.

이제 와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비밀을 유지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산본의가의 가주가 제 자식처럼 키우고 있는 산본의가 이공자는 사실 그녀의 수치였고 다른 이들에게 그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무사님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이공자님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 말만 하면 그냥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막지 마세요. 전부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청수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을 때 그녀는 자기가 뭘 본 건가 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내공과 곤오철로 만든 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

너무 빨리 사라져 버려서 자기가 뭘 느낀 건지 알아차리지도 못했지만 태혈령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사문의 기운과는 확실하게 대비되는 기운이었다.

그것은 정파의 기운도 아니었고 산본의가를 지킨다는 산본무관의 무인들이 그런 기운을 발출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작 그 기운을 발출한 당사자가 그것을 모르고 사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제어되지 않는 증오와 적개심 때문에 그것이 저도 모르게 나와 버렸던 듯했는데 태혈령은 완전히 달라진 눈빛을 하고 청수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돌아가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이번에도 불응한다면 우리는 소저를 묶어서 현청으로 데려갈 겁니다. 그 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소저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태혈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이공자를 보러 왔다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프면요? 내가 아파서 진료를 받으러 왔다면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하는 말을 우리가 믿겠습니까?”

청수는 태혈령이 기회를 다 써 버렸다는 듯이 그녀의 팔을 잡아 뒤로 돌렸다.

무림에서는 아이와 여자, 노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었다.

겉모습만 보고 함부로 방심하지 말라는 것인데 멀리 볼 것도 없이 산본의가만 봐도 린린과 소청이라는 괴물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청수는 처음부터 자기가 가진 위력을 상당히 발휘해서 태혈령의 팔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물고기처럼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청수가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청수와 함께 있던 아이들은 청수만큼이나 조심성이 대단했다.

아이들은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을 열어 두는 편이었고 태혈령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청수가 놓친 태혈령을 다른 아이가 붙잡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놓쳤고 태혈령은 연달아 다섯 명의 손을 빠져나갔다.

그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수다……!’

그들 모두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들었다.

손에서 느껴진 내력은 확실히 그들의 의혹을 더욱 짙어지게 했다.

겨우 40년 치의 내공밖에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객잔에 있던 사람이 이 시간에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과도 맞지 않았다.

그들은 태혈령이 자신의 내공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 자리에서 각자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나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 거 참.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도 그러네.”

태혈령은 고개를 흔들어대며 말했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그런 거였지만 설사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본 사람이 있다면 이놈들을 전부 다 끝내고 나서 살인멸구를 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너희들. 오늘 운이 아주 나쁜 것 같다. 오늘 죽게 될 건 몰랐지? 꼬맹이들아.”

태혈령이 말한 순간 아이들이 이상한 보법을 밟았다.

태혈령은 짜증이 더욱 솟구쳤다.

“제발 그만 좀 할래? 그나마 뼈라도 온전히 남기고 싶으면 말이야.”

그러나 아이들은 태혈령을 악적이라고 규정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머뭇거릴 이유를 알지 못했다.

패월방에서 구출된 아이들은 실전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언젠가 자기들에게도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하며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수련을 해 왔다.

소청이 놀고 있는 것 같다 싶으면 납치를 하듯 데려다가 배워 가면서 실력을 쌓은 결과, 이제는 산본무관의 교두들도 전부 그들을 인정했다.

오죽했으면 그들로 무력대를 구성했겠는가.

다른 곳도 아닌 산본무관이었다.

근래에 산본무관에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치열한 경쟁이 치러지는지를 생각하자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 네놈들의 재롱은 특별히 구경을 해 주겠다.”

태혈령이 말을 하고 가만히 아이들을 바라볼 때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보법을 밟았고 태혈령을 중심으로 맴돌았다.

태혈령은 어떤 소리도, 신호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태혈령의 주위를 맴도는 동안 허공을 밟으며 몇몇 아이들이 그곳에 나타났다.

설마 저 어린 것들이 벌써 허공답보를 펼친다는 건가 하며 태혈령이 놀랄 틈도 없이 아이들은 대열 안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의 몸이 각자 두 개씩으로 늘어난 것처럼 그들의 움직임은 일정했다.

태혈령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멋대로 휘날리며 펄럭였다.

태혈령은 설마 자기가 진에 갇힌 건가 하면서 뒤늦게 그곳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아이들은 태혈령에게 주의를 기울였지만 정작 태혈령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봐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들이었고 어쩌다 얻어걸린 내공을 가지고 무인 놀이나 하는 놈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삽시간에 만들어 낸 진이 자신의 일신을 구속할 정도라는 것을 깨달은 태혈령은 진심으로 놀랐다.

사형이 알게 된다면 절대로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태혈령은 조급해졌다.

여기에서 사문의 제자가 자연지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안 되겠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태혈령이 그 자리에서 진각을 밟자 순간적으로 흙무더기가 1층짜리 전각 높이는 족히 되게 솟구쳤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오히려 태혈령을 향해 파고들며 진을 극단적으로 좁혀 나갔다.

‘이런 미친 것들이!’

흙먼지가 눈알을 향해 쏘아져 들어가면 최소한 고개를 돌리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태혈령은 미치고 펄쩍 뛰어오를 것 같았다.

한 줌의 바람으로 변해 그곳을 빠져나가는 동안 놈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 거였는데 모두가 태혈령을 본 듯했다.

태혈령은 순식간에 수십 장이나 날아가 몸을 숨겼다.

미친 듯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치욕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고작 저따위 조무래기 놈들 때문에!’

태혈령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그 자리에 있는 아이들을 전부 죽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절대 사문에 이 말이 들어가면 안 된다.’

태혈령이 그곳을 향해 막 몸을 날리려 했을 때였다.

“……!”

한 사람이 산본의가에서 나왔다.

가벼운 무복 차림의 그를 본 순간 태혈령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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