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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97화 (397/470)

제397화

397화

태혈령은 자기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거나 이상한 곳에 갇힌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손님. 자리를 안내해 드릴까요?”

태혈령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점소이가 다가왔다.

태혈령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어린 무인들이 앉은 곳 옆에 자리를 잡았다.

“뭘 드릴까요?”

“아무거나.”

“…….”

“소면.”

태혈령은 귀찮다는 듯이 말해 버리고 손짓을 해서 점소이를 쫓아버렸다.

“아진 공자님이 그러셨다는 게 상상이 돼. 공자님이라면 정말 그러셨을 거야.”

“그런데 내가 더 놀란 건 공자님이 그 상황에서 그 계산을 하셨다는 거야. 나는 그건 정말 못 할 것 같거든. 북혈마제를 봤으면 나는 그자를 빨리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 했을 텐데 공자님은 그자를 그 자리에서 죽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그것까지 다 미리 계산을 하셨다는 거잖아.”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게 놀라워. 앞으로 그런 부분이 더 다듬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배울 건 정말 끝도 없는 것 같아. 단순히 내공을 늘리고 초식을 익히고 무리를 깨닫는 게 전부가 아니잖아. 전략과 전술도 생각해야 하고 심리전에도 능통해야 하고.”

“그래도 우리는 듣고 배우는 게 많으니까 정말 운이 좋지.”

아이들은 티 없이 맑은 모습이었고 자기들 몫의 소면이 나오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워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혈령은 아이들이 떠나려는 것을 보고 급히 한 아이를 붙잡았다.

“너희. 산본의가의 이공자를 아니?”

“…….”

이공자님도 아니고 이공자라고 불렀다.

나이도 아진 공자님보다 많아 보이지 않는 여자가.

태혈령은 그 자리에 있는 아이들이 사도련에서 구출되어 산본에 온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은 산본무관의 수련생으로 무관에 만들어진 섬풍대 소속이었고 모두 아진을 신처럼 섬긴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태혈령이 처음부터 찍힌 것이다.

“우리 공자님을 언제 봤다고 공자라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뭘 몰라서 묻는 거라면 대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도록 하십시오.”

태혈령은 자기가 왜 그런 말을 듣는 건지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공자에 ‘님’을 안 붙여서 그런 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고는 기가 막혀서 실소가 다 나올 지경이었지만 아이들이 더 이상 자신을 상대해 주지도 않고 나가려 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 미안하다. 이공자님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아니? 이공자님을 뵈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다.”

그러자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이는 아진이 편월방에서 구해낸 청수였다.

처음에는 워낙 체구가 작아서 그보다 나이가 어린 소청보다도 어려 보였지만 이제는 다른 아이들 중에 우두머리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아니야? 뭐가?”

“모릅니다.”

그리고 청수가 돌아서자 다른 아이들도 청수를 따라나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공자에 대해서 떠들어 대던 아이들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태혈령이 일어섰다.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너희가 이대로 가서 공자님이 나를 만나는 게 늦어지면 공자님이 너희를 가만두지 않으실걸?”

그러자 청수가 피식 웃었다.

“우리 공자님을 만나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헛소리 그만하시죠.”

그러고는 그대로 객잔을 나가 버렸다.

태혈령은 멍하니 있다가 사람들이 자기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

모멸감도 모멸감이었지만 태혈령은 자기가 왜 그런 대우를 받은 건지 알지 못했다.

“당신.”

태혈령은 자신을 보고 있던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를 산본의가로 데려다줘요. 은자 한 냥을 주죠.”

“문제없습니다. 지금 바로 가시죠.”

은자 한 냥이라는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미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면 공짜로라도 할 텐데 은자 한 냥까지 받아 챙길 수 있다고 하니 태혈령의 지목을 받은 사람이 부러웠던 것이다.

태혈령이 먼저 밖으로 나가자 그 남자도 금방 따라 나왔다.

그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오면 일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을까 해서 산본에 온 낭인이었다.

그러나 태혈령은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고 산본의가로 안내하라고 재촉했다.

가는 길에 오히려 태혈령은 말이 없었다.

그때까지 자기가 들은 정보를 해석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 아이가 맞는 건가? 그런데 그런 무위는 말이 되지 않는데? 아이를 낳고 분명히 확인했는데? 옥함신공은 완전히 실패였는데 그게 다 무슨 말인 거지?’

“이공자님을 만나러 가십니까?”

낭인의 말에 태혈령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로 공자님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여러 곳에서 공자님을 만나려고 혈안이라고 하던데요.”

“그건 왜죠?”

“왜겠습니까? 이공자님과 친분만 쌓아 놔도 다 도움이 되니 그렇겠죠.”

“왜요?”

“이공자님을 안다고만 말해도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테니까 그러겠지요. 이공자님은 사람들이 자기와의 친분을 이유로 이득을 보려고 하는 걸 엄청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산본의가로 찾아들죠.”

태혈령은 마음이 급했다.

그에게서 나오는 말은 특별한 게 없었고 그냥 빨리 산본의가에 도착해서 자기가 직접 이공자를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경공을 펼칠 수 있습니까?”

그렇게까지 서두를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 곧 이공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가 않았다.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경공을 펼쳐서 가도록 하죠.”

낭인은 기껏해야 이류에 발을 걸친 자였다.

그런 낭인의 경공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았다.

태혈령은 그를 기다리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 * *

“봉합사도 새로운 걸 만들면 좋을 것 같기는 해요. 지금 사용하는 건 매듭이 잘 지어지지 않잖아요. 봉합사만 좋아도 매듭짓는 건 간단한데.”

연월랑이 수술을 마치고 나오며 아진에게 말했다.

“아아. 실도 신경을 써야 하는 건가 보군요.”

“그런데 이것도 웃기기는 해요. 만약에 여기가 산본의가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으면 그냥 있는 것에 만족했을 텐데 여기는 말만 하면 바로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더 욕심을 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봉합사 만드는 건 잘 안 될 것 같기도 한데요?”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아진이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연월랑이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말로 웃기기는 했다.

아진은 벌써 연월랑이 말한 봉합사를 만들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에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계신 거죠, 공자님?”

“네. 혹시 불편하십니까?”

“아뇨.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혹시 마나를 사용해서 고치시는 게 아닐까 할 정도여서요.”

“아아. 마나를 사용하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제가 마나를 사용해서 고치는 걸 보신 적이 없던가요?”

연월랑도 자기가 봤는지 안 봤는지 헷갈렸다.

자기가 봤을 때는 아진이 매번 수술을 통해 고친 것 같았던 것이다.

“보여 드릴까요?”

“네? 네!”

연월랑은 그거야말로 정말 대단한 구경거리겠다고 생각했다.

SSS급 힐러의 치유력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걸 보여 주려면 다친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를 고쳐 주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제일조가 벼락같이 내려와 연월랑의 가슴팍을 쪼고 날아간 것은 그때였다.

“역시. 제일조만큼 숙련된 조교가 없네요.”

비명을 지르는 연월랑을 보며 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저, 저 새 새끼가 지금 저를 죽이려고 했다고요! 당장 혼을 내 주셔야죠! 저건 죽여야 해요. 세상에. 미쳤어. 미쳤어!!”

그러나 연월랑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진의 마나가 상처를 향해 들어갔다.

“……!”

연월랑은 자기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광분해서 소리치고 있었던 것을 잊은 채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 이게…… 마나…….”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어차피 답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진이 연월랑을 고치고 있을 때 벽예월이 급한 걸음으로 그를 찾아왔다.

“아진 공자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급합니다.”

“예.”

아진은 연월랑을 한 번 바라보고 곧장 벽예월에게 달려갔다.

산본의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매일 수없이 많은 사람을 보게 되지만 그중 벽예월은 정말 특별했다.

만나면 반가운데 벽예월이 먼저 찾아오면 무서웠다.

그 무섭다는 감정은 다른 이들에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벽예월처럼 아진을 제대로 겁먹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이 바라보면서, 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는 가슴이 빠르게 두방망이질을 했다.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벽 소저. 잠깐만요. 심호흡 좀 하고요.”

“그런데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뭐가요?”

“그 여자가 오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게 누구인지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해석한 게 맞다는 전제이기는 한데…….”

“…….”

아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벽예월의 얘기를 들을 때는 자신이 가진 정보가 늘 뒤처졌기에 그는 그녀의 불안이 그대로 전이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 무기력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냥 차라리 빨리 듣고 불안에서 벗어나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벽예월이 그런 얼굴을 할 정도면 늘 그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기에 영영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아진이 몇 번 더 심호흡을 하면서 벽예월을 바라보았다.

“공자님의 어머니예요. 생모요. 정확히는, 공자님하고는 상관이 없는 분이지만요.”

“……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려다가 아진은 언젠가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느 날 산본의가에 찾아온 산모.

그에게 들렸던 문소리.

“그러니까…… 이 몸을, 이 서도진을 낳은 여자가 오고 있다는 거예요?”

“네.”

벽예월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제가 지금……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건가요? 왜 온 거래요?”

아진은 갑자기 은씨세가 사람들이 떠올랐다.

소청을 데려가겠다던 사람들.

그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소청은 그 후에 은씨세가 사람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접근을 해 오려고 해도 그때마다 그것을 막아 내고 있었는데 그게 이제 자신의 문제가 되려는 건가 했다.

그런데 벽예월의 얼굴을 보자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공자님. 공자님에게 겁을 주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러면 겁주지 마세요. 벽 소저.”

아진이 절박한 표정으로 말하자 벽예월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정말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또 못 견딜 것 같았다.

“왜요? 뭔데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가 공자님을 죽이려는 것 같아요.”

“…….”

아진은 말을 하지 못한 채 벽예월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는 떨렸는데 그 순간에는 화가 났다.

아진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몸을 차지한 것 때문에 그 몸의 주인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을 찾아온 여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자 싸늘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럼 내가 죽여도 상관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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