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화
395화
“참. 그러고 보니 사매가 낳은 아이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지 않아?”
‘참? 그러고 보니?’
아마도 이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그 일을 생각하고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왔을 거면서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꽤나 가증스러웠다.
“그걸 왜 사형이 신경 쓰시죠?”
태혈령은 냉랭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사매. 스승님께서 우화등선하시고 내가 마음 붙일 사람이 사매 말고 달리 누가 있겠나. 제발 나한테 잘 좀 대해 줘. 불쌍하지도 않나?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산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참…….”
실존하는지조차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환상의 존재.
그 백산선문의 장문인인 표월이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확실히 그럴 만은 했다.
표월은 들고 있던 부채를 접고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사매. 그 아이라면 본문의 염원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매의 아이가 아닌가. 사매가 펼친 옥함신공이 잘못되었을 리도 없어.”
“그렇지 않아요. 낳고 나서 확인해 봤었어요. 옥함신공이 완전히 망했었다고요. 그게 내가 낳은 아이라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였어요.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마세요.”
“사매. 그래도 확인은 해 볼 수 있지 않아?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지?”
표월이야말로 초조해졌다.
상대가 태혈령만 아니었다면 그는 그렇게 애타게 부탁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태혈령이라서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표월 자신의 무위를 상회하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전부 다 긁고 헤집어서 그놈이 있는 곳을 찾아낼 텐데.
그리고 저를 두고 아이를 낳은 부정한 사매를 대신해 그 아이에게 영원한 고통을 안겨 줄 텐데.
꺼지지 않는 지옥 염화에 가두고 영혼까지 녹아내리도록 만들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지도 모르는데.
“나갈 생각이 없으면 내가 하산을 할까요?”
태혈령의 마지막 축객령이었다.
“아니야. 사매. 나도 이제 막 일어나려고 했어.”
일어선 그가 어색하게 웃고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그를 쏘아보는 태혈령의 눈썹과 머리카락에 서릿발이 맺혔다.
빙백기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그녀의 의지에 따라 전각의 곳곳에 순식간에 3척이 넘는 고드름이 생겨나더니 하늘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한다고 화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제 인생 최대의 오점.
‘그 멍청한 놈! 처음부터 잘못 고른 거였어. 아니. 제 아비가 팔푼이였다고 해도 내가 펼친 옥함신공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태어난 놈이 더 바보지.’
할 수만 있으면 제 머릿속에서 그 기억을 전부 다 긁어내 버리고 싶었다.
평생 동안 그 모멸감을 간직하고 사는 것은 너무 괴로웠다.
‘정말 그놈이나 찾아내 볼까? 그놈이 죽고 나면 이렇게 자주 떠올라서 괴롭지는 않을지도 모르는데.’
태혈령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그곳에 찾아가 봐?’
주름 한 점 없던 그녀의 깨끗한 검미에 골 하나가 파였다.
산본의가.
‘그곳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을까?’
백산선문이 세상의 모든 소문에서 귀를 닫은 채 오직 우화등선에만 힘을 쓰며 수련을 해 오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것을 궁금해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문의 규율을 우습게 여긴 그녀라고 하더라도 일단 허름한 의가를 찾아가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도망치듯 떠나온 이후에는 나름대로 규율을 지켰다.
‘더 이상은 아니겠지만.’
태혈령의 생각이 조금씩 더 깊어졌다.
‘그래. 그렇게 하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런 걸 내 핏줄이라고 남겨둘 수 없지. 그런 치욕을.’
태혈령이 사라진 자리에는 굳게 얼어붙은 서릿발만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 * *
연월랑은 산본의가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거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땠는지 연월랑은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도종과 아진조차도 산본에 도착한 후부터는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을의 아이들 말이에요. 그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모르죠?”
보통은 아진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연월랑이 열심히 질문을 해 대야 했는데 그때는 그런 것도 없이 아진이 먼저 얘기를 시작했다.
“사도련 밑에 흑도 방파가 여럿이 있었어요. 사파 놈들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아진은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경위를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아…… 저도 그 얘기 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들은 건 그거랑은 조금 다른데.”
“그래요? 어떻게 들었는데요?”
북혈마제는 아진과 산본의가 사람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각색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 속에서 아진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한 악당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북혈마제의 군사였던 연월랑조차도 북혈마제가 하는 말을 그냥 믿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북혈마제가 했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아진이 하는 말을 듣고 연월랑은 그렇게 되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아진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북혈마제가 만들어 냈던 거짓말에는 곳곳에 허점이 있었던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거두어 주셔서 아이들이 그날의 일을 완전히 잊고 살아갈 수가 있었죠. 행복하냐고,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을 것도 없었어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거든요.”
연월랑은 신기해하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라면 절대 그런 아이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구해 줬다고 하더라도 인연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하고 그 후에는 내쳤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많은 아이들을 마을에까지 데려오다니.
그리고 새로 살 가정까지 찾아 주다니.
그건 존경의 영역이 아니라 오지랖의 영역처럼 느껴졌다.
만약 다른 곳에서 다르게 만났다면 아진과는 절대로 친해질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고방식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아…….”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연월랑이 작게 소리를 내자 도종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연 군사님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옆에서 보고 있으면 좀 신기해요. 저도 그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이 녀석 옆에 있으면 저절로 이 녀석에게 전염되는지 어느 때 보면 아진이가 할 만한 짓을 제가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말이죠. 해 놓고 보면 흐뭇해요. 생각하지 못한 보상으로 돌아오기도 하고요.”
“보상요?”
“예. 보상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마을에 온 아이들이 자라서 본가의 일에 발 벗고 나서는 걸 보면 뭔가 뭉클해져요. 만약에 그 아이들이 본가의 고용인이거나 낭인이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 아이들은 우리를 친가족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아끼고 도와줘요. 우리는 늙고 약해질 수밖에 없고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연월랑은 격하게 공감을 하지는 못했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정도였다.
그때가 되면 돈을 주고 자기를 돌봐 줄 사람을 고용하면 되는 건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가 했던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연 군사님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 있지 않을까 해요. 그렇게 되더라고요. 우리 린린만 봐도 알 것 같지 않나요? 린린이 그럴 애가 아니거든요.”
도종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고 연월랑은 이게 단순히 웃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종과 린린을 변화시킬 정도의 힘이라면 정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자신 역시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미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에 린린이랑 오다가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폐관수련 비슷하게 본가를 떠나 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기간이 좀 길었거든요.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서 린린을 봤더니 린린도 저를 똑같은 표정으로 봤죠. 뭔가 달라졌는데 뭐가 달라졌는지 모른 거죠.”
아진은 별로 재미도 없는 얘기를 열심히도 했다.
그게 연월랑에게는 웃기게 보였다.
이런 이야기가 이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재미있나 보구나 했던 것이다.
그리고 평소 아진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는 일도 거의 없었기에 연월랑은 신기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집중을 해서 들은 결과 그 내용은, 아이들이 그사이에 커서 우와아아아 하고 나타나지 않고 어른스럽게 나타났다는 거였다.
내용을 깨달았을 때는 조금 허망하기도 했고 아진도 그 사실을 느꼈는지 멋쩍어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얘기를 조금 재미없게 하네요.”
“조금? 너 얘기 엄청 못해.”
도종이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놀려댔고 연월랑은 오히려 그 상황이 재미있어서 웃었다.
그러다가 아진이 말한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을 목도했다.
곳곳에서 아이들이 달려왔던 것이다.
아진이 이때쯤 돌아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고 달려오는 아이들에게서 아진을 향한 끝없는 애정이 보였다.
연월랑은 문득 그런 게 부러워졌다.
‘그래. 나도 일단 목표를 세우자. 나한테 저런 얼굴로 달려와서 맞아 줄 사람을 한 사람 정도는 만드는 걸로. 서 공자도 처음에는 한 사람이었겠지. 처음부터 이렇게 많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연월랑은 자기가 그 목표를 이미 이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산본의가에 들어갔을 때 바로 확인이 가능했다.
“슉부니이이이!”
숙부님을 부르는 것 같은데 어디서 서악이가 뛰다 넘어지다 구르다 하면서 연월랑을 향해 달려왔던 것이다.
“그래도 숙부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서악아?”
가까이에 있던 위도가 서악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주자 서악이 헷갈린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월랑이 자기를 숙부님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그런 건데 왜 그러나 하는 것 같았다.
“아니다. 그래. 숙부님 맞다. 어차피 숙부님이니까 그냥 숙부님이라고 해.”
포기한 것 같은 위도를 뒤로하고 연월랑도 부리나케 달려가 서악을 꼭 안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진이 했던 말들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서악이로 인해 자신이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정작 연월랑 자신은 달라진 게 없었는데 그를 바라보고 열광하는 어린 서악으로 인해서 그렇게 됐다.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달라지고 싶다는 힘은, 그런 마음은 이렇게 생겨나는 거구나.’
연월랑은 천천히, 느리게 그런 것을 배워 나가고 있었다.
* * *
사람들은 북혈마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고 도종과 연월랑은 서로 다투어 가며 이야기를 해 댔다.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서로 자기가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안달이 나 있었고 아진이 했던 말과 행동은 작은 것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죠. 의원님. 그 전에 서 공자님이 말했잖아요. 북혈마제한테요.”
연월랑은 별것도 아닌 것을 지적하면서 아진이 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산본의가의 사람들은 연월랑의 중계를 훨씬 선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