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4화
394화
“북혈마제. 이제는 네 차례인 것 같다만.”
아진은 그저 툭, 정말 작은 소리로 말했을 뿐이었는데 북혈마제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압도적인 무위와 잔인한 성벽.
궁주는 성격이 괴팍했지만 그가 휘두르는 병장기가 자신들을 향해 휘둘러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그의 강맹함을 사랑했다.
그에게 의탁하고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제멋대로 믿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궁주인 북혈마제는 사시나무 떠는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사신을 눈앞에 두었다고 해도 그자들이 모두 북혈마제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듯했다.
그런 면에서 북혈마제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사람들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그가 그렇게 무너져 버리지만 않았다면 북혈마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라도 얼마든지 버티며 싸우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혈마제가 정신적으로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붙들고 버텨야 하는 건지 중심을 잃었다.
전사의 마음에서 믿음과 투지가 사라지면 그 싸움은 오래 볼 것도 없었다.
“북혈마제. 아직도 다른 이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
아진의 목소리가 북혈마제의 귓구멍으로 독을 품은 개미 떼처럼 파고들었다.
북혈마제는 고개를 저어댔다.
“궁주님. 죽더라도 싸우고 죽으십시오!”
누군가 소리쳤다.
“궁주님이 버티신다면 저도 버티겠습니다. 저도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북혈마제의 손에 힘이 들어가게 하기에는 부족했다.
몇 사람이 투지를 끌어 올리려 하는 것 같았지만 북혈마제는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아진은 오히려 북혈마제가 아니라 그의 측근들이 더 무서운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 북혈마제를 죽이는 것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주군의 복수를 하자고 그들이 결집한다면 거기에 선동된 자들을 모두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수가 얼마나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진은 북혈마제를 놔두었다.
어차피 북혈마제를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그가 도망치는 모습을 사람들의 눈앞에서 실컷 보여 준 후에 북혈마제가 마음 놓고 있을 때 땅을 갈라서 그를 삼켜 버리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게 낫겠군.’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하고 나자 그때부터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북혈마제는 저를 바라보는 수하들의 눈에 죽음 같은 실망이 차오르는 것을 외면한 채 내달렸다.
‘지금이면…… 지금이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저 중에 몇 놈은 몸을 날려서 나를 살리려고 하겠지. 그때가 마지막이야!’
북혈마제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달렸다.
모두가 멈춰 있었다.
오직 저만이 달리고 있었다.
적을 뒤에 두고.
수하들의 시신을 바닥에 두고 더 이상 명령을 내리지도 않은 채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북혈마제는 설마하니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러고 있었다.
심지어 수치심이나 모멸감도 느끼지 못했다.
북혈마제는 자기가 아직 죽지 않은 이유가 서도진의 의도된 연출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뒤에 버려진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서 투지를 전부 사라지게 하려고 기다리는 것뿐임을 북혈마제는 미처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사람은 북혈마제가 달려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북혈마제가 딛는 땅이 요동치고 갑자기 푹푹 꺼지기도 했다.
그것 역시 서도진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다.
요동하는 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허둥대는 북혈마제의 뒷모습은 말할 수 없이 추했다.
더 이상 수하들에게 그는 견고한 산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만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패배자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둘 돌아섰다.
이제는 아진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런 이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쓸 만한 자들일수록 그런 생각을 먹은 듯했다.
아니면 북혈마제의 비겁한 모습을 봐 버려서, 자기들도 목숨을 구걸하다가 그런 꼴을 보이게 될까 겁이 난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진은 그들에게 흥미를 잃었다.
북혈마제가 도망친 이상 그는 그곳에 볼일이 없었다.
돌아가기 전에 할 일이 있기는 했다.
아진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허공을 향해 그었다.
북혈마제가 믿고 내디뎠던 발밑이 그 순간 갈라지며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지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균열은 북혈마제를 품은 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딱 붙어 버렸다.
그때 아진이 사용한 힘 중에 마나는 전혀 없었다.
순전히 자연지기만을 사용해서 한 일이었다.
그 사실이 더욱 만족스러웠다.
“그럼 이제 돌아가나?”
도종이 여기에서 더 할 일이 있냐는 듯이 물었다.
사람들은 설마 하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간단히 돌아갈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진은 정말로 마차를 돌려서 그곳을 떠났다.
황망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곳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권력 구조가 재편될 터였다.
이만하면 황제가 은근히 믿고 있던 세력이 크게 무너지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북천을 이용해 국경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연월랑은 북혈마제의 집요한 관심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가 있었다.
“허망하네요. 이렇게 간단할 수도 있다는 게요.”
연월랑이 말하자 도종이 웃었다.
“그거요. 엄청 배부른 소리인 거 알죠? 아진이니까 이런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나섰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예요. 양쪽에서 수만 명이 죽을 수도 있고 싸움이 오늘 안에 끝난다는 보장도 없었을걸요?”
도종이 열변을 토했다.
가끔 사람들은 그런 반응을 보였다.
아진이 너무 간단히 일을 해결하는 것을 보고 그게 별것 아니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게 절대로 아닌데도.
연월랑은 꼭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저자들. 그냥 두고 가도 뒤탈이 없을까요?”
도종은 그게 조금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저렇게 해 놓으면 당분간은 저자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걸요? 서로 견제하면서 어떻게든 저기에서 얻어먹을 걸 지키려고 할 거예요.”
연월랑은 북천이 앞으로 재미있게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북혈마제와 함께 그의 충성스러운 수하도 몇이나 죽었다.
북혈마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던 자들까지 함께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북천은 한동안 절대적인 패자가 없는 상태로 서로를 견제하게 될 터였다.
황제를 위해서는 그만한 선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서 공자님은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요?”
연월랑이 말하자 이번에도 도종이 나섰다.
“우리 아진이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아진이는 정말 엄청나죠.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멈추지 않아요.”
그 비슷한 이야기를 벌써 몇 번은 들은 것 같았는데 도종의 이야기가 지겹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믿어 주는 가족은 흔치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연월랑은 도종을 구경했다.
그를 보면 정말 신기했던 것이다.
아진이 많이 부러웠지만 특히나 부러운 것은 아진이 지금의 가족을 가진 거였다.
자기도 그런 가족을 만났으면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연월랑은 한숨을 쉬었다.
연월랑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알면 도종은 분명히 또 침을 튀겨 가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해 대겠지만.
하여간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 * *
“무슨 생각을 그리해. 사매?”
20대로 보이는 얼굴에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자신의 머리 색깔과 똑같은 비단옷을 걸친 채 맞은편에서 차를 들며 물었다.
실제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 사매라 불린 태혈령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요즘은 내내 냉막한 얼굴만 하고 있고. 사매가 웃는 낯을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
“내가 사형을 위해서 웃어 줘야 하는 사람인가요? 할 일 없으면 사형의 사문이나 살피세요.”
“내 사문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사매의 사문은 아닌 것처럼 들리잖아. 냉정하게 말하는 건 여전하군.”
그러면서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고 태혈령은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할 이야기가 없으면 나가 주면 좋겠어요. 생각할 것이 있어요.”
“나한테도 말을 해 주면 내가 같이 생각해 줄 수 있잖아?”
선도를 닦는 문파의 일원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몸담은 사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꺼렸다.
스승은 그들이 깨달음을 얻어 선계에 이르도록 하려 했지만 태혈령은 자신이 선계에 오르고 싶은 건지 오랫동안 갈등했다.
선계에 오른다면 자신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고민하며 혼자 유랑하던 태혈령은 인세에 다시 보기 힘든 무골을 가진 남자를 만났고 그와 하룻밤을 보낸 후에 흡정대법을 펼쳤다.
하룻밤의 만남으로 아이가 들어섰고 사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태혈령은 태아에게 옥함신공을 펼쳤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에게 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몸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성공이 보장되었다면 태어날 아이를 고수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서로 다투어 옥함신공을 펼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잘만 된다면 아이는 인세에 이름을 떨치는 고수가 되겠지만 그게 아니면 사람 구실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될 수도 있었다.
태혈령은 아이의 운명이나 미래가 걱정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아이와 다시 연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이를 낳은 후 태혈령은 선계로 들 예정이었고 아이는 가끔 생각날 때 심심풀이로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인간 세계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매개.
아이에게 기대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계에 오르지 못했다.
선계에 이를 수 있다는 사문의 무공에 대성해서 그녀만큼은 선계에 오르는 것이 확실하다고 믿었던 이들은 모두 당황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불안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인간의 육신을 가진 한 선계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고 우화등선은 호사가들이 만들어 낸 거짓 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동안 선계에 올랐다며 사라진 사형과 사저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정말 선계에 오른 것인지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자 우화등선했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었지 그 모습을 직접 본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화등선이 거짓이라면 자신들의 삶이 통째로 부정될 수밖에 없었기에 사문의 사람들은 머릿속에 떠오르려는 의심을 애써 부정하고 그것을 개인의 실패로 치부했다.
우화등선에 실패한 사람.
그것이 태혈령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었고 그녀는 까마득한 아래로 사문이 내려다보이는 장원에 머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선계에 올랐다는 스승조차도 사실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신선이 됐다면 한 번쯤 나타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기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였고 그래서 자신의 사형처럼 이렇게 귀찮게 계속 말을 거는 사람이 제일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