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3화
393화
북혈마제의 소식을 받은 북천의 세력들은 속속 비무를 준비했다.
그들 중에는 연월랑의 전략과 전술 때문에 패배했을 뿐 실제로는 북혈마제의 수하들과 대등한 무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자기를 도와 서도진을 무찌르는 사람은 자신과 함께 북천을 다스리게 될 거라는 북혈마제의 말은 그들의 사기를 돋웠다.
누가 뭐라고 해도 북천의 패자는 북혈마제였고 그가 하는 말은 여전히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북혈마제가 모아 놓은 사람은 서른 명이 넘었다.
처음에 서도진이 말한 것은 다섯 명이었지만 이제 다섯이라는 숫자는 북혈마제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궁 밖에 전사들을 배치해 두고 선두에 서른 명을 세워 놓고 그들이 아진을 상대하게 하겠다는 것이 북혈마제의 생각이었다.
서른 명이 동시에 아진을 공격한다면 아진을 죽일 수 있겠지만 만약 그러지 못하면 그때는 자기도 함께 나서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이놈들이 내가 무서운 것을 모르고 함부로 설쳐댄 것이다.’
북혈마제는 놀랐던 가슴이 이제 다 가라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정보각 놈들은 뭐라 하더냐.”
북혈마제는 이제 아진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졌다.
그런데 소식을 얻으러 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들을 찾으러 간 이들 역시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며칠 후면 이 모든 일이 끝을 맺을 터였다.
아진과 함께 온 연월랑을 어떻게 대할까 하는 생각도 조금 바뀌어 있었다.
처음에는 두 다리만 자른 채로 자신의 처소에 꽃처럼 두려 했으나 서도진을 끌고 와서 자신을 위협했다는 사실에 화가 조금 더 났다.
‘아무래도 두 팔까지는 없는 것이 더 낫겠다.’
북혈마제는 연월랑을 데려다가 그 주위에 화환을 둘러놓는 것을 상상했다.
그렇게 하면 연월랑도 그에게 자비를 구할 거라고 생각하자 북혈마제의 입가에 소리 없는 웃음이 지어졌다.
* * *
북혈마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황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자는 꽤 유용했는데 안됐구나. 그자의 아래에 들어간 자들 중 태반이 목숨을 잃게 되겠어.
그러면서 그 일이 기정사실이 된 것처럼 말을 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마라. 아진아. 필요하면 제거해야지. 그자를 방패막이로 쓰는 게 좋기는 했지만 사냥개가 주제를 모르고 주인의 손을 물면 목을 칠 수밖에 없지.
덕분에 아진은 지금 어떤 부담감도 없이 사람들을 마주한 채 설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목숨을 제 손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진은 그 사실을 저만 아는 것이 문득 불공평하게 느껴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서도진이다. 여기에는 북혈마제의 목을 따러 왔다. 북혈마제에게는 미리 서찰을 보내서 다섯 명과 비무를 하겠다고 알렸다. 그렇게 해서 다섯 번 모두 내가 이길 경우에만 이곳에서 내가 하기로 한 일을 하려고 했지. 나는 이런 일에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머리끼리 싸우면 되는 일이지.”
북혈마제는 그런 일이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까발려지는 것이 유쾌하지 않은 것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그곳에서 처음 안 듯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면서 아진은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았다.
“그런데 북혈마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고 나왔군. 그건 두 가지 이유일 거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북혈마제가 나를 혼자 상대하는 게 너무 두려워서 그런 것이고 둘째는 다른 놈들의 목숨이야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는 거겠지. 그거야 뭐. 그걸 모르고 지금까지 너희가 너희의 주인 옆에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닐 테니 너희가 책임을 져야겠지.”
“닥쳐라. 이 건방진 놈! 나는 내 땅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북혈마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강자존이라는 말이 좋더군. 강자는 모든 것의 정당성을 갖는다. 오직 강자만이. 오직 힘을 가진 자만이 그것을 말할 수 있다. 알고 있나.”
그 말에 북혈마제가 움찔했다.
스스로 자리를 지켜낼 힘이 없다면 그 자리를 탐하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용케 그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북혈마제. 혼자서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어찌할지 모른다. 목숨을 지키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구차하게라도 살아남고 싶다면 말이다.”
북혈마제는 금방이라도 관자놀이 옆의 핏줄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아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부들거리면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놈을 살려 두지 마라. 저놈을 당장 죽이라는 말이다!!”
북혈마제와 성미가 똑같은 몇 사람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아진은 그들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자들의 앞에서 고개를 돌린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서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은 짙은 긴장감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나 아진은 그들을 무시해서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곳곳에서 멋대로 자란 나무들을 향했다.
그리고 무심한 듯한 손길이 허공을 가르며 움직였다.
그것은 북혈마제나 그의 측근들이 단 한 번도 구경해 본 적 없는 무공이었다.
그 무공에 과연 이름이 있기는 한 걸까.
도종도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아진을 보았다.
나무를 향해 그러는 걸 보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바람과 흙이 아닌 다른 기운을 다스리는 것도 훈련했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이 그 연장선이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던 나무는 그 싸움에 말려들 운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 아진이 나타났다는 사실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바짝 마른 늙은 손가락 같은 가지들이 바닥을 기었다.
몇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고 기겁하며 비명을 터뜨렸다.
아진을 향해 달려오던 이들도 그 모습을 보았다.
기사(奇事)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무언가가 바뀌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그 나뭇가지가 끝까지 쫓아와서 자기들이 타고 있는 말의 발목을 잡아 움켜쥘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탄 말이 놀라서 투레질을 하다가 발을 삐끗하는 순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찾아왔다.
빠른 속도로 내달려 왔던 만큼 말이 넘어지면서 그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다가 갑자기 거칠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드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간단한 죽음이었다.
그것으로 인해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실 죽음이란 멀면서도 가까웠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는 사람도, 기사회생으로 살아나는 사람도 많았다.
누가 어떤 죽음을 맞게 될지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사람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었다.
“……!”
그들의 죽음을 보고 북혈마제의 진영에서는 큰 동요가 일었다.
누구도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은 연신 고개를 저어댔다.
“북혈마제. 네가 죽인 거다. 다른 놈들을 내보내면 그놈들도 이놈들과 다를 바 없는 죽음을 맞이할 테고 그들은 북혈마제 너에 의해서 죽는 거다. 더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내보내 보아라. 나는 아직 확인해 보고 싶은 게 많아서 네가 더 많은 놈들을 사지로 내몰아 준다면 오히려 고맙고 기쁠 것이다.”
아진은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말했다.
북혈마제는 제 부하들의 목숨을 아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하기 전에 몇 사람이 병장기를 높이 들어 올리고 험한 소리를 퍼부으며 달려 나왔다.
지금이 북혈마제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라면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진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이 지어졌다.
그의 얼굴에 지어진 웃음은 마치 꽃을 처음으로 본 아이의 표정과도 비견할 만했다.
그의 손이 허공에 유려한 그림을 그리자 마른 나뭇가지가 손을 뻗었다.
움직인 것은 나뭇가지만이 아니었다.
다 죽어 가는 것 같던 뿌리가 땅 밑을 파고들며 빠르게 뻗어 갔다.
“으으으아아악!!”
몇 사람은 갑자기 땅 밑에서 솟아오른 뿌리에 몸이 관통되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는 없다고 항변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아진은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 나무가……! 나무가 움직이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허공에 손가락질을 했다.
사람들은 결코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죽일 놈의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어느새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나무가 움직이고 있었다.
깊이 박혀 있던 뿌리가 땅 위로 올라왔다.
겉으로 보인 것보다 훨씬 더 깊게 박혀 있었는지 잔뿌리가 엄청났고 거기에 매달린 흙덩이만 해도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그런 뿌리를 가지고 나무들이 북혈마제의 진영으로 다가왔다.
북혈마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숱한 무공을 봐 왔던 그였지만 이런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경악한 북혈마제의 앞으로 나뭇가지 하나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왔다.
잘린 것도 아닌데 한없이 길어지며 북혈마제의 가슴을 노리고 들어왔던 것이다.
한없이 길어지는 창과 같이.
북혈마제는 그대로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수하 하나가 북혈마제를 옆으로 밀어내고 그가 있던 자리에 섰다.
북혈마제는 바닥에 나뒹굴면서 자기가 피한 죽음의 실체를 똑바로 보았다.
사람의 몸은 그렇게나 약했다.
갑자기 날아온 나뭇가지에 속수무책으로 찢겨져 피와 살점을 쏟아 낼 만큼.
북혈마제는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들려고 애를 썼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마지막 기회다. 북혈마제. 어쩌겠느냐. 아직도 저자들을 네 방패막이로 쓰겠느냐.”
북혈마제는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주위에는 수천 명의 전사들이 있었다.
남겨두지 말고 다 데려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충분할 것 같기도 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을 본 탓에 그의 고집이 더욱 강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제 앞의 서도진이 그렇게 무서운 인간인데 부하들을 살리자고 그 거대한 두려움을 홀로 맞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저놈을…… 저놈을 죽여라! 저놈을 죽이는 자에게는 궁의 절반을 내리겠다!”
그러나 북혈마제의 말에 혹하는 사람은 없었다.
궁의 절반이 아니라 북천의 패자 자리를 주겠다고 해도 그들은 아진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진은 나무를 놔두고 검을 빼 들었다.
곤오철에서는 가끔 여러 냄새가 돌아가면서 났다.
지금은 녹슨 쇠 냄새가 났다.
그것이 피부에 착 가라앉아 달라붙는 것처럼 평온한 느낌을 주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하면 작작 좀 하라는 말이 돌아올 것 같았다.
아마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린린일 것이다.
아진은 피식 웃었다.
녹슨 쇠 냄새는 피비린내와 상당히 가까웠다.
죽음을 예견하는 냄새.
지금 아진이 자신의 검에서 맡은 냄새도 사실은 녹슨 쇠 냄새가 아니라 피비린내일지도 몰랐다.
죽음이 다가오면서 그 냄새가 미리 그에게 느껴진 건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