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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91화 (391/470)
  • 제391화

    391화

    “그 빌어먹을 놈이 이제 모습을 제대로 드러냈으면 좋겠어요. 상태창에 숨어서 나타나지 말고 말입니다.”

    한참만의 침묵 끝에 아진이 말하자 연월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월랑 역시 비슷한 의식의 흐름으로 같은 생각을 했던 참이었다.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에요. 이런 짓을 벌이는 자들은 아마도 불로불사의 존재들이겠죠? 그 오랜 시간 동안 죽지도 않고 할 일도 없으니까 인간 세계를 구경하면서 뭐 재미있는 일 없나 하면서 기웃거리는 걸 거예요. 그래 봤자 재미있는 일은 생기지도 않을 텐데.”

    연월랑이 작정을 한 듯이 퍼붓자 도종도,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로불사라는 존재들 말이에요. 왜 그런 존재가 됐을까요? 영원히 죽지 않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도종이 던진 질문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할 수만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늙지도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아닌가? 아니려나?”

    연월랑은 진지하게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정한다고 해서 누군가 그 말을 들어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궁금해졌던 것이다.

    “나는 아진이가 불로불사가 되면 나도 불로불사가 될 거야. 그런데 아진이가 죽으면 그냥 죽을 거야.”

    도종의 말에 멍하니 허공을 보던 아진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무슨 근본 없는 말이냐면서.

    그러나 연월랑은 그 말이 이해가 됐다.

    그리고 연월랑 자신도 그럴 것 같았다.

    북천에서의 삶도, 그리고 이곳에 건너오기 전의 삶도 실망스러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새로 배우고 깨달아 가는 것도 좋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해 가는 것도 좋았다.

    연월랑은 그것이 서도진의 옆에 있어서 가능해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도 그렇게 자신의 꿈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함께 이루어나가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저도 그래요.”

    “왜요오?”

    오히려 아진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연월랑과 도종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댔다.

    “어쨌든 그러니까 서 공자는 다치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요. 저도 많이 도울게요.”

    연월랑이 힘을 내라는 듯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 * *

    북천으로 서서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북혈마제가 은밀히 보낸 서신에 화답을 한 이들이었다.

    북혈마제는 연월랑이라는 질병에 걸린 것 같았고 시간이 지나도 연월랑을 잊기는커녕 점점 더 피폐해져 갔다.

    북천의 패자인 자신이 겨우 연월랑 하나를 차지하지 못해서 시름시름 앓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동안 무림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을 규합했다.

    예전 같았다면 북혈마제 쪽에서 손을 내미는 일은 없었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향화문 정도는 아니지만 북혈마제에게도 그가 부리는 정보각이 있었고 그곳에서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연월랑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만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서도진이 함께 오고 있다는 말에 북혈마제는 불쾌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왜 함께 온다는 건가 해서였다.

    “궁주님. 연월랑에게는 기대를 접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연월랑이 서도진과 함께 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북혈마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목을 벴다.

    이제 그렇게 사람들의 목을 함부로 베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곁에 있던 인재들이 그런 식으로 죽어 나갔다는 것을 알고도 그는 분을 참지 못했고 후회는 늘 때늦은 감이 있었다.

    “닥쳐라! 연월랑이 오면 반드시 안전하게 그녀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반드시 그래야 한다. 누구도 연월랑의 손끝 하나라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서도진의 시신을 가져오너라. 그런 자에게는 북천의 반을 줄 것이다! 나와 함께 북천을 다스릴 영광을 줄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사람들은 북혈마제가 이미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가진 광포한 힘 때문에 감히 그를 어쩌지 못했다.

    연월랑.

    연월랑…….

    북혈마제는 시름시름 앓으며 그 이름을 떠올렸다.

    연월랑이 알았다면 기겁을 하며 몸을 떨었을 일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서도진은 북혈마제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이렇게까지 위쪽으로 올라와 본 적은 없었다.

    염빈과 정빈을 그들의 나라에 데려다줄 때 북쪽으로 올라온 적이 있었지만 이곳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아진은 생각난 김에 염빈과 정빈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고 연월랑은 신기해하며 고개를 저어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진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아진이 그런 삶을 사는 동안 자기는 뭘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도 다음에는 정말 그런 삶을 살아 보고 싶어요.”

    “살면 되죠. 연 군사님은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결정을 한 사람은 본인일걸요?”

    도종이 문득 말했고 연월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종과 아진은 동시에 아차 싶었고 도종은 연월랑에게 사과했다.

    도종은 아진이 이루어 온 모든 것을 연월랑이 행운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진이 힘들여서 이루어 낸 것인데 연월랑은 그것을 전부 아진이 우연히 얻은 것들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서 한 번은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연월랑은 기분이 나빴지만 도종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이야 그렇지. 우리 산본의가가 처음에는 아주 어려웠거든요. 처음에 본가에서 눈을 떴을 때 아진이가 얼마나 난감했을지 연 군사님은 상상도 못 할걸요? 그때는 정말…… 아버님은 몸이 편찮으시지, 본가에 빚은 많지, 제선문 때문에 환자는 다 뺏기지, 의원이며 의생이며 의녀님들도 본가를 떠나도록 종용받았고요.”

    도종은 눈물 없이는 못 한다는 듯이 말을 이었고 연월랑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실언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할 거냐. 아진아? 사람들을 죽일 생각이야?”

    도종이 말하자 연월랑도 궁금한 듯 아진을 보았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잘못이 없잖아. 그렇다고 북혈마제를 계속 그냥 놔둘 수도 없고.”

    “그러면 어쩔 건데?”

    “둘이 대결을 해서 지는 사람이 포기하자고 말할 거야.”

    “북혈마제는 절대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걸요?”

    연월랑은 잘되기만 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듯이 말했다.

    북혈마제가 얼마나 야비하고 탐욕스러운지,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연월랑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건 제안이 아닙니다. 부탁도 아니고요. 북혈마제가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만들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을 해야 할 겁니다. 수장이 사라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걸요?”

    아진의 말에 연월랑은 입이 벌어진 채 그를 바라보았다.

    광오하다.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아진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철이 없거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아진이 말하면 마치 미래를 알려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잘되면 좋겠는데 북혈마제의 주위에는 북혈마제 체제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들이 있어서요.”

    연월랑은 정말 아진이 말한 대로 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런 자들은 어디에나 있죠.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자기들이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싶으면 북혈마제를 대신해서 싸워도 될 겁니다.”

    “다섯 명하고 싸우겠다고 하면 되겠다.”

    도종이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셋인데?”

    “저는 못 싸워요.”

    아진과 연월랑이 연달아서 말하자 도종이 자기도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건 아진이 너지. 아진이 네가 다섯 번 싸우는 거야. 북혈마제와 그자의 부하들 네 명이랑 연달아서 겨루는 거지. 야, 인마. 너 정도 되면 그렇게 싸워야지. 너하고 북혈마제하고 싸우면 그걸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도종이 아진을 힐끔 노려보며 말했다.

    아진의 형으로서 그건 자기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연월랑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정도로는 해야 균형이 맞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북천의 사람들은 비열했다.

    비열한 작전을 써서 지금까지 승리를 일구어 온 사람이 연월랑 자신이었지만 북혈마제가 지금까지 승리를 누려 온 데에는 심리전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북방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했고 조금만 심리적으로 자극을 하면 불리한 조건에서도 기꺼이 싸웠다.

    연월랑은 그동안 그런 식으로 싸움을 만들고 북혈마제가 저절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아진이 북혈마제와 정당하게 싸워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함께 버텨 온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형제애가 더욱 끈끈했는데 아진이 북혈마제를 이긴다고 해도 북혈마제를 희생양이나 피해자로 생각하면서 아진에게 복수를 하자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될 거라면 도종이 말한 것처럼 사전에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도록 아진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북혈마제를 포함한 다섯 명과 아진이 비무를 해서 아진이 전부 이긴다면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섯 명을 구성한다면 북혈마제의 휘하에 있는 서열 5위까지가 전부 제거되는 것이기에 그 후에는 북천의 패자가 달라질 수도 있을 터였다.

    생각할수록 좋은 전략이라 연월랑은 연신 머리를 주억거렸다.

    “좋은데요? 정말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거기에는 아진이 그들 모두를 이겨야 한다는 커다란 전제가 있었지만 이미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아진이 나섰는데 진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그것을 상상하는 게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설마 그 사람들이 함께 덤비겠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도종이 묻자 연월랑이 웃었다.

    “그 사람들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그자들은 밥을 먹고 웃다가 그냥 도끼를 휘둘러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을 쳐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인과관계가 없고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

    도종은 갑자기 정신이 든 듯 아진을 바라보았다.

    너. 괜찮겠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진은 웃으면서 느긋하게 굴었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냥 이겨, 아진아.”

    “그래. 그러지, 뭐.”

    도종은 연월랑에게 북혈마제의 무공 수위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가 사용하는 무기와 무공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연월랑은 북혈마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북혈마제가 너무 불리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그랬다.

    그동안 북혈마제의 군사로서 그에 대한 것은 빠짐없이 알고 있는 연월랑이었으니 그러는 게 당연하기는 했지만 북혈마제는 아진의 앞에서 열려 있는 책이나 마찬가지였다.

    책을 펼쳐 놓고 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너무 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자 말을 하던 연월랑이 문제를 느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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