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화
390화
아진은 자리를 정돈하면서 말했다.
“처음 여기에 와서 깨어나고 얼마 안 됐을 때 아버님이 뇌종양에 걸린 걸 알았어요. 그게 보이더군요.”
“네……?”
연월랑은 이제 자기가 서도진을 보면서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마저도 자신의 오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뭐길래 그렇게 온갖 특혜를 다 받은 건가 했던 것이다.
“그러면 좀 전에도 그게 보였습니까?”
“네.”
“…….”
연월랑은 기가 막혀서 더 이상 말을 하지도 못했다.
아진에게 주어진 것 중에 아주 작은 것 하나만이라도 자기가 얻을 수 있었다면 이곳에서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신기하네요. 가장 신기한 건,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이 왜 서 공자님을 질투하지 않는가 하는 거예요.”
“아아. 그건 연 군사님이 오해하는 거예요. 엄청들 질투해요. 나도 그러는데요?”
도종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연월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도종이 질투의 개념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 * *
수술을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연월랑은 그중에서도 대담함과 집중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아진에게는 그것들이 엄청나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북천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온갖 종류의 환자들과 마주쳤는데 아진은 손쓰기 어려운 환자를 만날수록 더욱 침착해졌다.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에게서는 전혀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한번은 비적에게 거의 혈겁을 당한 마을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아직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연월랑과 도종, 그리고 아진까지 모두 나서서 사람들을 치료했는데 연월랑은 처음부터 아진에게 마나를 사용하지 말라고 말했다.
마음이 급할수록 마나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기겠지만 이럴 때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고였다.
아진은 만약 자기가 늦어서 고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도 다시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연월랑의 말을 따랐다.
죽어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몰라도 아진은 눈앞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봐도 묵묵히 상처를 치료했다.
그것은 그들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연월랑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진은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어떤 식으로 치료해야 할지 판단을 내린 후에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 이미 눈으로는 다른 환자를 찾아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렇게 하면서 빠르게 환자들을 치료해나갔는데, 빨리한다고 대충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연월랑의 놀라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졌다.
아진은 몸 안의 상태를 볼 수는 있었지만 병명이나 병증에 대해서는 연월랑에 비해 훨씬 지식이 떨어졌고 연월랑은 그 부분을 부지런히 채워 나가 주었다.
아진은 연월랑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쨌을까 하면서 도움을 십분 활용했다.
“공자님은 그럴 때 아주 도움이 많이 되겠어요. 환자의 체력이 안 돼서 수술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공자님은 마나로 기운을 회복시킬 수 있으니까 그런 문제는 해결이 되겠어요.”
그러자 도종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 바에는 그냥 마나를 끝까지 불어넣어서 몸을 완전히 낫게 하면 될 텐데요?”
연월랑도 그 말이 맞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연월랑의 눈앞에 다시 상태창이 나타난 것은 그들이 북천으로 향하다 마차를 세워두고 야숙을 할 때였다.
아진과 도종은 모닥불 옆에서 잠이 들었고 연월랑은 자리가 불편해서 뒤척이다가 결국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상태창이 나타난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지만 연월랑은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상태창의 요구는 이번에도 연월랑이 생각한 것을 넘어서지 않았다.
서도진을 죽이라는 것.
그리고 따라 나온 보상이 웃겼다.
[살행에 성공하면 당신은 산본의가 이공자 서도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수 있습니다.]
연월랑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지금껏 어떤 말을 들어도 혹하지 않았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해 보고 다 원 없이 누려 봐서 이제는 새롭다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끌렸다.
연월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사라졌고 얼굴은 진지해졌다.
서도진이 되어서 산다.
황제의 총애와 산본의가 사람들의 절대적인 애정.
오히려 그것은 연월랑에게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연월랑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성별이 바뀌어버린 몸.
단전조차 만들어지지 않고 근력은 찾아보기도 힘든 몸.
그러다가 서도진을 떠올렸다.
‘와. 이번 건 정말 센데?’
누군가에게, 정말 길을 가다가 아무나 붙잡고 서도진으로 살고 싶냐고 하면 그 말을 거절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연월랑은 그 말에 홀린 듯이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은 하고? 서도진을 죽이는 것이?’
연월랑은 상태창이 무엇을 위해서 그런 명령을 내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걷잡을 수 없이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서도진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 어린 시선.
그를 향한 깊은 신뢰와 애정.
단순히 가문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니었고 마을을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진은 마을 사람 하나하나와 깊은 추억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연월랑에게는 그런 것들이 전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와서 연월랑이 맺어온 관계는 정말 별 볼 일이 없었는데.
서도진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연월랑에게 정말 혹하는 제안이었다.
간단히 웃어 버리고 무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운이 오래 갔다.
가주와 가모의 아들.
서도종의 동생, 서이린의 오라버니.
연월랑의 머릿속은 점점 더 많은 생각으로 분주하고 복잡해져 갔다.
연월랑이 타고 있던 마차의 문이 열린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아진과 도종은 동시에 눈을 떴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월랑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이제 웬만한 분위기는 다 감지가 됐다.
연월랑은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연월랑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좋은 결정을 내려 준다면 좋겠지만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월랑은 아진에게 다가오는 대신에 모닥불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은 자는 척을 계속해야 하나, 잠에서 깬 걸 알려야 하나 하다가 일어나 앉았다.
연월랑은 장작 하나를 던져 넣고 불이 잘 타도록 숨구멍을 만들었다.
타닥 소리를 내면서 불길이 몸집을 키우는 소리가 들렸다.
“상태창이 또 나왔어요.”
연월랑이 말했다.
“살행에 성공하면 서 공자님으로 살게 해 주겠대요. 이번에는 정말 너무 고민이 컸어요. 여태까지 이렇게 고민이 된 건 처음이에요.”
연월랑은 웃으며 말했지만 아진은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왜 안 죽였습니까?”
“죽일 수는 있고요? 저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함정에 빠지는 건 저라는 거요. 상태창이 노리는 건 저라는 말이에요. 그 말이 신빙성이 있어요.”
연월랑은 한숨을 쉬더니 아진을 바라보았다.
“서 공자님을 배신하지는 않을 테니까 서 공자님도 저를 믿어 주면 좋겠어요. 언젠가는 그 상태창과 싸우게 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때 제가 돕겠습니다.”
이간질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말인 것 같았다.
아진은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잠시라도 연월랑을 의심한 것에 대해서.
“그러겠습니다.”
모닥불이 만들어 내는 불빛 앞에서 연월랑의 표정이 씁쓸하게 일그러졌다.
자꾸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이제 새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고 다짐을 할 때마다 나타나서 마음을 흔들어 대고 이곳이 정말 현실이라고 생각하냐며 조롱하는 것 같은 상태창을 볼 때마다 기분이 정말 뭣 같았다.
그는 연월랑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무림 세계의 일원도 아니었다.
간신히 지상에 정착하고 평화롭다고 생각하며 희미하게 웃음 짓던 그의 주위에서 세트가 치워지고 황량한 벌판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나쁜 새끼!’
느닷없이 나타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 상태창을 향해 연월랑은, 레오루카 모레띠는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연 군사님.”
그의 상념을 뚫고 문득 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점점 기대가 됩니다. 무대를 만든 놈이 이길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는 적어도 한 방은 먹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어쩌면 제가 이길지도 몰라요.”
너울거리는 불길이 아진의 얼굴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희한한 노릇이었다.
왜 서도진이 그런 말을 하면 그 말이 믿기냐는 거다.
어느덧 연월랑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세트가 치워져도 서도진은 그 자리에서 계속 웃고 있을 것 같았고 그러면 자신도 서도진을 따라 웃음을 흉내 낼 수 있지 않겠나 했다.
서악이 다른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 기억해 두었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던 것처럼 연월랑도 서도진을 따라서 계속 웃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짜 웃는 자라고 했지?’
연월랑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엿 먹어. 이 새끼들아.’
그동안은 체념 어린 한탄이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진지한 경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포기하기는 일렀다.
아직 시작한 것도 없는데 벌써 포기하기는.
너무 일렀다.
* * *
그 일이 있은 후 세 사람은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치료했다.
가는 길에 산본의가 지부를 만나게 되면 그곳 사람들에게 수술법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열심히 수술법을 배웠다.
“이런 게 가능해진다면 앞으로 저희가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지겠습니다.”
그들에게 준비해 갔던 수술 도구를 주고 조금이라도 수술법을 더 알려 주고 떠나오면서 아진은 하나의 생각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들이 누리는 삶을 멋대로 망가뜨리고 부수고 조각낼 수 있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 그런 짓을 벌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이제는 아진 자신이 그러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살던 세계에서 그는 자신이 최강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도 착각일지 몰랐다.
그가 오른 무대에 다른 이들이 올라오지 않았기에 서도진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승리를 주워서 누렸던 것뿐인지도 몰랐다.
진짜 적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급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그 생각이 맞다면 아진이 싸워야 할 싸움은 훨씬 더 까다로울 터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진은 싸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맷집이라면 이제 누구 못지않게 좋아졌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싸우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잃는 것도 그랬다.
죽으면 그곳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 후에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