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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88화 (388/470)
  • 제388화

    388화

    “그럼 같이 가시죠.”

    위도가 연월랑을 따라나서자 연월랑은 이제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결정하는 게 편해졌다며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연월랑이 아진을 찾아가는 동안 의원 몇 사람이 연월랑을 향해 달려왔다.

    손에는 쥐가 있었는데 환한 얼굴을 보면서 연월랑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군사님. 연 군사님. 드디어 제가 혈관문합을 한 쥐가 살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한 건 전부 다 죽었거든요. 잘 봉합이 안 되었나 보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쥐의 대동맥을 완전히 다 이은 것 같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말이 쉽지 그게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동안 고생이 엄청나셨겠습니다.”

    “연 군사님이 지도해 주신 덕분이죠. 그런데 쥐의 대동맥으로 연습하는 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사람들 혈관문합을 할 때는 혈관이 굴뚝같이 느껴져요. 정말 쉽게 되거든요. 처음에 연 군사님이 그 이야기를 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알았는데 이제는 그 말이 이해가 됩니다.”

    “정말 잘됐습니다.”

    연월랑의 얼굴에 진심 가득한 웃음이 지어졌다.

    의원은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았지만 연월랑과 위도가 함께 갈 곳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며 돌아갔다.

    위도는 연월랑의 표정을 보았다.

    지난 삶과 이번 삶을 통틀어 연월랑의 표정이 이렇게 밝은 적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월랑도 작게 한숨을 쉬며 그 여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대협.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요. 처음에 의과대학에 진학했을 때는 의사로 살 줄 알았거든요.”

    “연 군사는 헌터 각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된 편이었나 봅니다.”

    위도는 그렇지 않아도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고 연월랑은 정말 그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월랑은 사소한 이야기들을 하며 아진을 찾아갔다.

    연월랑이 서악을 안아 주려고 해도 이제 서악은 남에게 안기는 것보다는 자기 다리로 걸어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조금 가다가 넘어져도 서악은 넘어지는 것이나 아픈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연월랑도 깨닫는 것이 많았다.

    마침내 아진이 머무는 내원이 보였을 때 연월랑은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아진에게 가서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고 나면 이제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완전히 사라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월랑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서악은 연월랑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는지 그에게 돌아와서 연월랑의 손을 잡았다.

    자기가 데려다줄 모양이었다.

    “그래. 가자.”

    연월랑이 마음을 굳히고 걸음을 옮겼을 때 아진이 나왔다.

    연월랑의 기척을 미리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연 군사님. 위도 형님. 서악이도 왔구나.”

    아진이 앉아서 두 팔을 벌리자 서악이 활짝 웃으며 아진에게 달려가 그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연월랑이 심술을 부리며 서악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내가 안아 준다고 할 때는 싫어하더니.”

    “그건 연 군사님이 이해해야 합니다.”

    아진이 서악을 들고 일어서자 서악이 아진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연월랑은 서악이 부러웠다.

    아무 생각도 없으니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의 누가 감히 서악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자기가 만지작거리는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영웅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연월랑은 그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제자인 소청도, 질녀인 랑랑도 아진의 귀여움을 받지만 서악처럼 이렇게 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나도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나이를 많이 먹어 버렸나.’

    그러나 그도 알고 있었다.

    그게 사실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북천에 있는 동안 연월랑은 제멋대로 굴었고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해를 입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연월랑으로 인해서 그런 건 아니었고 북혈마제가 연월랑 때문에 변덕을 부려 제멋대로 사람을 죽여서 그런 거기는 했지만 연월랑이라면 그 일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어렵게 오신 것은 알겠지만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합니다.”

    아진은 연월랑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예?”

    연월랑은 혹시 아진이 자기가 할 말을 미리 알고 그러는 건가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진이 그렇게 말을 해 준다고 해도 자기는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연월랑은 그 말을 들은 것이 좋았다.

    “연 군사님에게 저희 의원님들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철방에도 오랜만에 활기가 돌고 있고 어머니께서는 의료 도구를 대량으로 만들어 전국에 팔 생각도 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연 군사님이 옆에 있어 주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저도 연 군사님에게 그 의술을 배워 보고 싶기도 합니다.”

    “예?”

    연월랑은 연달아 나오는 놀라운 소리에 눈이 더 동그래졌다.

    “여기가 어디인지 연 군사님이 잊은 모양입니다. 여기는 산본의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 우리가 있을 곳을 결정합니다. 누군가 침입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피하거나 도망치지는 않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연월랑은 그게 단순히 자기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냐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아진이 시원하게 웃었다.

    “북혈마제가 어떤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연 군사님을 납치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목숨 하나만 걸어서는 안 될 겁니다.”

    연월랑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했다.

    한때는 그도 그랬었다.

    레오루카 모르띠.

    던전을 향해 나아갈 때 그가 앞서 나가면 그를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움을 잊었다.

    연월랑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알겠습니다.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공자님은 저에게 배울 게 없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까지 살리실 수 있는데요.”

    그러자 아진이 제 손을 바라보았다.

    “마나의 힘이 아니라 저도 의술을 배워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마나라는 이 힘은 제 것이 아니니까요.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존재가 준 힘이겠지요.”

    “아…….”

    연월랑은 아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아진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은 어쩌면 그 미지의 존재로부터 받은 것일 텐데 미지의 존재가 변덕을 부릴 때 그 힘이 모래처럼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능력을 갖추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 노력을 기울여 왔던 건가 보구나.’

    연월랑은 어느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고 수련하고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위가 없는 정상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계속해서 정진해 나갔다.

    성취를 이루고도 만족하지 못한 채 그 위로 올라가기 위해 매 순간 더 자신을 연단해 나갔던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서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싸우기 위해.

    연월랑은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다.

    자기도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서기 위해서 노력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해도 낙망할 것은 아닐 듯했다.

    이제부터 바뀌면 되는 거니까.

    “연 군사님이 있어서, 불가능한 꿈을 꿀 수 있게 됐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가진 마나가 사라지고 그 힘이 나타나지 않게 돼도 연 군사님에게 부지런히 배워 두면 그런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연월랑이 아진을 마주 본 채 말했다.

    “잘 가르칩니다. 제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지 몰랐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제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잘 하고 잘 따라 하는 것 같아요.”

    서악이 웃음을 터뜨렸다.

    딱 시기적절하게 터진 웃음소리에 모두가 서악을 따라 웃었다.

    어쩌면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냐는 듯이.

    누굴 보고 배웠는지 서악은 요즘 웃을 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는데 그 모습에 더 웃음이 터져 버렸다.

    “서악아. 어른을 그렇게 놀리면 못 쓴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감을 갖는 건 좋은 일이다.”

    왠지 아진이 그렇게 조곤조곤 말을 하는 동안 더 만신창이가 되는 것 같았지만 연월랑은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런데 그게 황실의 문제로도 비화될 수 있을 텐데…… 그것도 괜찮은 겁니까?”

    연월랑이 조심스럽게 묻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도 팔자라고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 문제는 폐하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현재로서는 북천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그 힘이 유익하다고 해서 북혈마제가 멋대로 구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으시겠다고 했습니다.”

    연월랑은 아진이 황제와 담판을 지어서 그 문제까지 벌써 해결을 했다는 건가 하는 마음에 놀라웠다.

    산본을 비우고 황성에 갔을 때 그 일을 처리한 듯했다.

    “그러면 염치 불고하고 여기에 남겠습니다.”

    연월랑이 말하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언제부터 배울 수 있겠습니까?”

    “의학당에서 수업을 하고 있으니 와서 들으셔도 되고 따로 배우고 싶으면 말씀을 해 주셔도 됩니다.”

    연월랑이 돌아가고 아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마나를 사용하는 것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연월랑에게 나타났다는 상태창에 대한 얘기를 듣고 아진은 자기가 그것을 계속 믿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마나를 통해 얻는 힘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이제는 새롭게 준비를 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

    * * *

    철방에서는 이제 병장기보다 의료 기구가 더 많이 만들어졌다.

    연월랑은 부지런히 그곳을 오가며 품질을 살폈다.

    특히 메스는 의원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았다.

    만약 산본철방의 방주가 아니었다면 의원들은 그렇게 품질 좋은 메스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그런 메스가 갖춰지지 않았다면 수술이 그렇게 수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연월랑은 철방에 가는 것이 정말 좋았고 그때마다 자기가 얼마나 큰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 깨달았다.

    “연 군사님. 크기는 이게 좋습니까? 다른 크기로도 만들어 볼까요? 북리 의원님은 손이 작지 않습니까? 여자 의원님들이 사용하실 메스는 따로 만들어 볼까 하는데요.”

    연월랑은 이곳이라면 그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에 진심으로 놀랐다.

    다른 곳이라면 만들어져 나오는 물건에 자신의 손을 적응시켜야 할 텐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요.”

    “예. 그럼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수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만들어지지 않은 수술 도구도 저희가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수술을 하는 동안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많은 도구들이 만들어졌는데 연월랑은 어느새 사고방식이 굳어 버려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방주가 보면 의외로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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