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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86화 (386/470)
  • 제386화

    386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월랑은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사람들은 연월랑을 따라 철방으로 갔고 철방에 있던 야장들은 의원들이 갑자기 떼로 몰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최근에 잘못한 일 없는 것 같은데요?”

    철방의 방주가 방어하듯이 말하자 서종욱이 웃었다.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여기에 있는 연 군사님이 다른 곳에서 오신 분이라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연 군사님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왔습니다. 앞으로 연 군사님이 만들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산본의가의 가주가 직접 그렇게 청하는데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연월랑에게 호기심을 가지며 어떤 게 필요하냐고 물었고 연월랑은 수술에 필요한 도구들을 그림으로 그려 주었다.

    “이건 왜 이런 모양이어야 합니까, 연 군사님?”

    야장들보다 의원들이 더 궁금해했고 연월랑은 그것들이 수술 시에 어떻게 쓰이게 될지 알려 주었다.

    “아아…….”

    아아…… 라고는 했지만 아직 확실하게 머릿속에 연상되는 것은 없었는데 그래도 그들은 신기함과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제가 이해한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이렇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연 군사님이 아침저녁으로 찾아와서 제대로 만들고 있는지 확인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 그건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월랑은 드디어 자기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오늘 일이 끝나고 나서 같이 술 한잔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도종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자신의 신분이 갑자기 상승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 레오루카로 살면서 유명인의 삶을 충분히 누려 왔지만 유명한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들과 사소한 농담을 나누고 격의 없는 사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와 같이 있는 사람이 아무리 유명하고 잘났다고 하더라도 레오루카가 그들의 유명세를 압도했던 탓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멀리서 동경하며 봐 왔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대화에 연월랑을 끼워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월랑은 진심으로 기뻤고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 * *

    도종이 말한 자리에는 황실에서 돌아온 아진도 와 있었고 린린이 그 옆자리를 지켰다.

    연월랑은 자기가 처음에 린린을 보고 느낀 감정과 삽질을 했던 경험 때문에 민망했지만 린린은 그 일을 다 잊은 듯 편하게 대했다.

    도종은 자기가 궁금해하던 것들을 연월랑에게 물었고 연월랑은 대답해 줄 수 있는 선에서 답을 해 주었다.

    “그런 과거가 있었군요. 신기합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연월랑은 점점 더 자기 얘기를 많이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나오는 얘기가 재미있는 듯 입가에서 웃음을 거두지 못한 채 귀를 기울였다.

    “저는 간 이식 전문의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간동맥을 잇는 연습을 하는데 간동맥이 2밀리예요. 2밀리미터요.”

    술에 취한 와중에도 연월랑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2밀리미터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 주려고 젓가락 끝을 2밀리미터 정도 잡았다.

    “이게 그 정도예요.”

    “그걸 잇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잇는다는 거죠. 잘라서 잇는 거요.”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뭐로 이어요?”

    “바늘요.”

    연월랑은 사람들이 이제 자신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수록 연월랑의 표정은 자신만만해졌다.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요.”

    북리소은의 말에 연월랑이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여러분에게만 특별히 그 비법을 알려 드릴게요. 2밀리미터의 간동맥을 쉽게 잇는 방법요. 그런데 비법이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한 눈을 하고 연월랑을 바라보았다.

    연월랑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자 몇 사람이 귀를 기울이며 연월랑 쪽으로 다가왔다.

    “쥐의 대동맥으로 연습을 하면 됩니다. 그건 1밀리미터 정도거든요. 쥐의 대동맥을 잘랐다 이어 붙이는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사람의 간동맥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청 쉽죠.”

    “…….”

    그 자리에 있던 의원들은 연월랑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연월랑은 바늘만 준비가 되면 자기는 당장 그걸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서종욱이 큰 소리로 웃었다.

    “연 군사님이 우리 야장님들을 너무 우습게 본 것 같습니다. 지금 가면 아마 바늘이 완성돼 있을 겁니다.”

    “……네?”

    연월랑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아무리 쥐의 대동맥을 능숙하게 이었던 사람이라고 해도 이곳에 온 지 7년이었다.

    그사이에 그 일을 한 번도 안 해 본 것은 물론이고 원래 살던 곳에서도 헌터로 활약을 한 이후부터는 수술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감이 다 떨어졌을 텐데…….

    연월랑은 이마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게…… 메스도 있어야 하고…… 그러니까 수술용 칼요.”

    “그것도 만들었을 겁니다.”

    “혈관 겸자로 혈류도 차단해야 하는데…….”

    “가 보면 어떨까요. 연 군사님?”

    그때까지 마신 술이 아까울 정도로 한순간에 취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래도 정말 그 모든 걸 그사이에 다 완성해 놓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연월랑은 마치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철방으로 갔다.

    그때까지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철방에서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이분들은 왜 이렇게 늦게까지 일을 하시나. 몸 생각 같은 건 안 하시나.’

    이것저것 불만을 가진 채로 연월랑이 가자 방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안 그래도 연 군사님을 찾아가 뵐까 했는데 연 군사님이 먼저 오십니다?”

    “저를 왜……요?”

    “연 군사님이 그려 주신 대로 만들어 보기는 했는데 제대로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어서요.”

    연월랑은 산본의가의 저력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겸자라는 건 특히 더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용도로 쓰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요. 그래도 다른 건 얼추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연월랑은 방주가 내놓은 것들을 보고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을 잘 그려 주었다고 할 수 없는데도 그 정도면 정말 잘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메스는 기가 막혔다.

    연월랑은 자기를 따라온 의원들 외에 이제 철방의 방주와 야장들까지 거느린 채 쥐를 찾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쥐는 필요한 만큼 원 없이 잡아 드릴 테니 언제든 말만 하십시오.”

    쥐를 잡기 위해 멀리 갈 것도 없었고 연월랑을 따라오던 야장 하나가 철방으로 돌아가더니 쥐 몇 마리를 순식간에 잡아 와 버렸다.

    “안 그래도 계속 얼쩡거리는데 놔두고 있었더니 이럴 때 쓸모가 있군요.”

    연월랑은 이제 심호흡을 해야 했다.

    뭐 하나 핑계를 대보려고 해도 이곳에서는 씨도 안 먹힌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메스니 겸자까지 뚝딱 만들어 주고 쥐까지 잡아 오니 이제 그냥 입을 다물고 자기가 하기로 한 걸 보여 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프겠네요. 마비산을 가져올까요?”

    북리소은이 쥐를 보며 말하자 린린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마비산을 가지러 간 것뿐이었는데 제선문주까지 딸려 왔다.

    “쥐의 대동맥을 잇는다니. 웬 사기꾼이 활개를 치나 해서 와 봤소.”

    연월랑은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허허 웃었다.

    연월랑은 자기를 둘러싸고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쥐의 복부를 가르고 대동맥을 절단했다.

    혈관 겸자는 정말 잘 만들어져서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감탄을 하게 만들었다.

    방주는 혈관 겸자가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다음 날 훨씬 더 사용하기 좋은 혈관 겸자를 열 개 정도는 넉넉히 만들어 놓을 것 같았다.

    연월랑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대동맥의 봉합을 시작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멈췄던 일인데도 손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이걸로 연습을 하다 보면 다른 건 쉽다는 거죠?”

    사람들은 연월랑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건지는 모르는 것 같았고 자기들도 연습을 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연월랑은 그들의 앞에 고생길이 훤하게 열렸다고 생각하면서 웃었다.

    왜 웃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해 보고 잘 안 될 때마다 그들이 연월랑을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데도.

    자기가 자기 앞에 고생길을 훤히 열어 놓은 것도 모른 채 연월랑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해맑았다.

    * * *

    연월랑이 산본의가에 오고 산본의가의 풍경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전이라면 포기하거나 무인들에게 넘겼어야 할 환자를, 복잡한 수술로 살려내는 일이 점점 늘었다.

    방주는 연월랑이 부탁하는 수술 도구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고 좀 더 나은 것을 만들어오기도 했다.

    연월랑은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면서 놀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산본의가에는 남아도는 쥐가 없어서 다른 곳에 가서 쥐를 잡아 오기도 해야 했는데 이러다가는 산본에서 쥐가 씨가 마르겠다는 말도 나왔다.

    “검강으로 잘린 상처도 이제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기가 실린 무기에 당하면 일반적인 상처하고 달라서 우리 힘으로는 손을 쓰지 못하고 포기해야 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적어도 시도는 해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이게 다 연 군사님 덕분입니다.”

    연월랑은 그들이 해 주는 말을 들으면서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꼈다.

    그사이에 연월랑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수술법 몇 가지를 알려 주었는데 그것도 모두 철방의 방주와 야장들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연 군사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의학당에서 수련생들을 가르쳐 주셨으면 하는데 어떠시겠습니까?”

    연월랑에게 그 부탁을 한 사람은 가주 서종욱이었다.

    그는 연월랑에게도 예우를 다했고 연월랑은 가주가 그렇게 대우해줄 때마다 몸 둘 바를 몰랐다.

    북천에서 사람들이 그를 대우해 주지 않을 때는 악에 받쳐서 바락바락 소리만 질러 댔었는데 이곳에서는 성격까지 바뀌는 것 같았다.

    “부족한 재주지만 해 보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

    북혈마제의 사람들이 들었다면 가증스럽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연월랑은 이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삶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번 인생만큼은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북혈마제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종종 걱정이 되고 겁이 나기는 했지만 연월랑은 그때마다 다시 희망을 품었다.

    “대협. 나도 처음부터 여기에서 깨어났으면 정말 좋았을 것 같습니다.”

    연월랑은 위도에게 그런 말을 자주 했고 위도는 연월랑의 말이 그렇게 잘 이해될 수가 없었다.

    “나도 그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늦게라도 왔으니 된 거겠지요. 우리도 참 희한한 인연이 아닙니까? 원래 살던 곳에 있을 때는 서로 잘 어울리지도 못했는데 이곳에 와서 이렇게 모이게 됐으니 말입니다.”

    “거기에서 만났으면 잘 지내지 못했을 거예요.”

    레오루카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이들을 만났다면 안하무인으로 두 사람을 업신여겼을 것이다.

    특히나 서도진을 그곳에서 잘 알지 못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 깊이 엮였다면 분명히 원수가 됐을 텐데 그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우……!’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갑자기 저절로 떠오르면서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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