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5화
385화
“셔약이도 방어력 이만이야.”
“이만? 그냥 이만 오천 해. 아니. 기분이다. 오만 하자. 오만. 서악이는 방어력도 오만, 공격력도 오만. 그래. 치유력도 오만 하자.”
연월랑은 이제 비밀로 할 일도 아닌데 서악이가 그런 말을 먼저 배우는 게 대수겠냐면서 마구 질러댔다.
그리고 서악이 앞에서 자신의 황금기 얘기를 들려주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서악아. 네가 이 숙부님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 숙부님이 지나가면 말이야. 사람들이 저절로 갈라지면서 길을 만들었었어. 숙부님이 나타나면 꺅꺅 소리를 지르다가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고. 너무 잘생겨서.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못 할 짓을 한 거야. 왜 그렇게 생겨 가지곤. 내가 나타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개구리처럼 보였거든.”
연월랑은 한창 추억에 잠겨 있다가 현실로 돌아올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서악이 너는 네 눈앞에 갑자기 뭐가 나타나서 뭘 물어 봐도 홀랑 그러겠다고 대답하면 안 돼. 알았어?”
서악은 연월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연월랑은 그것만큼은 아주 중요하다면서 서악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웅.”
연월랑이 너무 귀찮게 하는 바람에 서악이 동냥을 하듯이 대답을 해 주자 연월랑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거 정말 중요한 거야. 특히 그거. ‘무림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런 게 보이면 아니라고 해. 아아. 아니지. 너한테는 여기가 집이지? ‘현대 세계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아니라고 해. 아니라고 하고 귀를 꽉 막고 도망쳐. 알았지? 안 그러면 아버지도 영영 못 보게 돼.”
그때까지 연월랑의 이야기를 제법 잘 듣고 있던 서악이 갑자기 울먹였다.
다른 말은 못 알아들어도 아버지를 영영 못 보게 된다는 말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
연월랑은 이렇게 어린아이도 그런 건 아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서악을 안아 주었다.
“지금은 괜찮아. 지금은 괜찮은데 나중에 그런 게 보이면 조심하라고. 그래야 아버지랑 오래오래 같이 살 수 있으니까. 알았지?”
서악은 뭐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연월랑은 서서히 산본의가에서 존재감을 과시해나갔다.
힐러여서 마나의 능력으로 사람을 고쳤던 아진과 달리 연월랑은 헌터로 각성하기 전에 무려 의과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아진의 치료법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없었지만 연월랑은 산본의가의 의원들에게 앞선 의술을 전수해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도종이었다.
연월랑은 산본의가를 기웃거리면서 여러 일에 관심을 보였는데 가끔 보이는 기행 때문에 사람들이 연월랑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거리를 두었다.
연월랑이 무림으로 오면서 성별이 바뀌어서 생긴 일이었는데 연월랑이 남자들에게는 허물없이 대하면서 예쁜 여자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쓰는 모습이 너무 이상해 보여 다들 연월랑을 꺼렸던 것이다.
연월랑도 사람들이 자기를 이상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기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을 밝힌 김에 자기가 원래 남자였었다는 것까지 말했지만 사람들은 외모에서 느껴지는 차이를 쉽게 극복할 수가 없는 듯했다.
연월랑도 그런 취급을 계속해서 받다 보니 사람들 틈에 가는 게 점점 꺼려졌는데 그래도 언제까지 서악이하고만 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만 보니 나쁜 사람들도 아닌 것 같고, 자기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주면 잘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의원들이 진료하는 곳을 기웃거리다가 우연한 일에 휘말렸다.
그날은 아진이 황성에 간 날이었고 아진이 의가에 없을 때는 확실히 다른 때보다 긴장감이 짙게 감돌았다.
연월랑도 아진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고 그런 사람이 옆에 있고 없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고 있었다.
서도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랐지만 그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눈물이 날 만큼 부러웠었다.
연월랑은 의가에 감도는 긴장감을 같이 느끼면서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한 환자가 사람들에게 업혀 급히 들어왔다.
여러 의원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었고 환자는 병상으로 옮겨졌다.
가주인 서종욱과 도종이 환자를 살폈는데 목에 자상을 입은 환자였다.
연월랑은 그런 일을 안 한 지 워낙 오래돼서 누군가 자신에게 부탁을 한다고 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뒤로 빠졌을 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월랑이 한때 의술을 배웠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월랑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치료를 하는지 궁금해서 사람들 틈으로 환자를 보았다.
목이 덜렁거릴 정도의 부상이었고 피가 계속 쏟아지는 바람에 시야를 확보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서종욱은 무인들을 불렀고 위도와 린린이 사람들에게 불려왔다.
린린이 운기요상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상처가 생긴 부위 때문에 운기요상은커녕 지혈마저도 어려웠다.
린린이 고개를 젓자 서종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의생들이 금창약과 지혈제, 마비산을 가져다주었는데 연월랑은 자기가 왜 그랬는지 알지 못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환자는 호흡이 되지 않는 듯 청색증을 보이고 있었다.
‘기도를 확보해야 할 텐데.’
상처가 생긴 부위를 봤을 때 기도가 막혀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연월랑은 남자의 목에 대침을 찔러 넣었다.
연월랑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뜬 채 연월랑을 보았다.
연월랑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이 순간 자기가 당황하거나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누구도 자신의 처치를 믿지 못할 터였다.
그러면 이 환자는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뺏기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며 연월랑이 말했다.
“기도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연월랑은 환자의 얼굴을 살폈다.
호흡이 돌아오고 있었지만 그것은 긴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래도 사선을 넘을 뻔했던 환자가 살아 돌아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연월랑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옆에는 린린이 있었다.
린린이라면 불가능한 것들을 뛰어넘어서 기적을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린린은 연월랑이 한 일을 이상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 상황에서 다시 운기요상을 시도했다.
연월랑은 린린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운기요상이 성공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공은 정말 신기했다.
점혈을 해서 출혈을 멈추게 하는 것도 가능하고 절단된 부위가 스스로 연결되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인들의 영역에서 가능한 일이었고 의인들이 그것을 배울 수는 없었다.
산본의가의 의원들 중 일부는 아진이 구해 준 영약으로 내공을 높이고 그가 가르쳐준 무공을 익혔지만 대다수는 순수하게 의술에 의존했다.
린린이 운기요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 연월랑은 정신이 들어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손에 묻은 붉은 피를 보았고 자기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벌였는가 했다.
린린이 수습을 잘했으니 망정이었지 잘못 했으면 감염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연월랑은 사람들 틈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찬물에 손을 씻는데 온갖 생각들이 복잡하게 떠올랐다.
그래도 후회는 길지 않았다.
환자는 살았고 자기가 갖고 있던 지식이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했다.
“연 군사님.”
연월랑을 부른 사람은 도종이었다.
도종은 연월랑이 한 일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까 뭘 한 건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기도가 막힌 것 같아서 기도를 확보하려고 그랬습니다.”
연월랑은 자기가 한 일을 알려 주었고 도종은 놀란 얼굴을 한 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연월랑은 도종의 표정을 보면서 이 이야기가 빨리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혹시 거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다시 보고 싶습니다. 연 군사님이 아니었으면 그분은 죽었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연월랑은 웃음이 지어지려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우연히 불시착한 곳에서 싹을 틔우지 못한 채 존재 이유를 잃어 가던 연월랑에게 그 순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연월랑이 도종을 따라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많은 의원들이 모여 있었다.
심지어는 가주인 서종욱도 같이 있었다.
“…….”
연월랑은 그를 보고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연 군사님에게 오늘 큰 빚을 졌습니다. 호흡이 멈춘 환자였는데 그렇게 해서 호흡을 이어 나가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연월랑의 얼굴이 밝아졌다.
“상태가 좋았으면 인공호흡을 했을 것입니다.”
“인공호흡이라는 게 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연월랑에게 한 가지라도 더 배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지금껏 숱한 기적을 봐 왔지만 범접할 수 없는 천재인 아진이 하는 것과 연월랑이 한 것은 차이가 있었다.
연월랑이 한 것이라면 자기들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연월랑은 그들의 앞에서 인공호흡의 동작을 해 보였다.
“이렇게 하면 호흡이 정지됐을 때 환자의 호흡을 도울 수 있습니다.”
“솔직히 린린이 운기요상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환자를 살리지 못했을 겁니다. 혹시 연 군사라면 어떻게 했을지 알려 줄 수 있습니까?”
서종욱의 말에 연월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수술 도구가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겠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좌절을 안기는 것밖에는 안 되는 게 아닐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때 산본철방이 떠올랐고 몇 가지 수술 도구는 철방의 야장들에게 부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연월랑조차 제가 한 말을 듣고 놀랐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건가.
여기에 있는 사람들보다 앞선 의학 지식을 갖고 있다고 너무 자만해서 내질러 버린 이야기는 아닌가?
연월랑이 잠시 침묵하는 동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연 군사님. 연 군사님은 군사님이 할 수 있는 것만 하시면 됩니다. 할 수 없는 일까지 해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연 군사님이 알려 주는 것 중에서 우리가 우리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만 할 테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부 보였던 모양이에요.”
연월랑이 말하자 도종이 웃었다.
“투명해서 다 보이네요.”
“그러면…… 수술 도구 몇 가지를 만들어 달라고 말을 해 봐도 될까요? 그게 있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수술 도구요?”
서종욱이 거기에 관심을 보였다.
산본의가의 가주가 관심을 보이는 이상 그 일이 얼마나 추진력을 얻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예. 수술을 위해서는 모양이 조금 다른 칼과 가위, 바늘이 있으면 좋고요.”
“그걸 그려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철방으로 가시죠.”
도종은 연월랑을 재촉했고 연월랑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입에서 나올 말에 집중하는 것을 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무대의 중앙으로 끌려 나온 느낌이었는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