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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82화 (382/470)

제382화

382화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만한 황금을 준다고 해도 그는 혹하지 않았다.

그런 게 주어진다고 해도 하루에 세 끼를 먹으면 배가 부른데 더 이상 욕심을 부려서 뭘 한다는 말인가.

그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서도진을 만나면 말도 통하고 재미있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했다.

게다가 최근에 재미있는 얘기도 들려오지 않았던가.

서도진이 산본의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했다는 말이 조금씩 퍼지다가 결국 북천까지 퍼졌는데 그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연월랑은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었다.

너무 기뻐서.

그때부터 서도진을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을 더 이상 뒤로 미룰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북혈마제 이 멍청한 새끼. 꼭 망해 버려라!’

연월랑은 속으로 악담을 퍼부은 채 야반도주의 계획을 세웠다.

* * *

북혈마제는 연월랑을 신부로 맞아들일 생각에 기분이 좋았고 사람들은 혹시라도 연월랑이 그사이에 다른 마음을 품고 일을 벌이지는 않을까 해서 경계를 강화했다.

잘못 해서 연월랑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연월랑은 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그동안 자기가 모아 두었던 재물 중 가장 아끼던 보물을 시녀에게 주고 시녀를 자신처럼 위장시켜서 도망쳤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을 타고 장장 두 달에 걸쳐 도피길에 올랐다.

북혈마제는 연월랑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연월랑을 쫓아왔고 연월랑은 몇 번이나 위기를 맞았다.

그래도 절대 북혈마제와 혼인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겨 가며 산본으로 향했다.

서도진이 질녀의 강호행에 따라나서서 산본에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그곳까지 가면 자기를 매몰차게 내쫓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오직 그곳만을 향해 쉬지 않고 말을 달렸던 것이다.

* * *

“와…… 이게 진짜 무슨 개고생이냐고. 씨X!”

연월랑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욕이 나왔다.

꼭 여자가 돼서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성별의 문제보다 체질의 문제가 더욱 컸다.

지금도 강호를 호령하는 수많은 여협들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들은 이 정도 무리했다고 이렇게 숨넘어갈 정도로 지치지는 않을 텐데 연월랑은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씻은 게 언제야? 음식다운 걸 먹은 건 언제고? 와. 나 진짜 불쌍하네.”

언제 북혈마제의 수하들이 들이닥칠지 몰라서 객잔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길이 아닌 곳으로만 도망쳤더니 이제는 거의 한계였다.

가만히 있는데도 퀴퀴한 냄새가 올라와서 미칠 것 같았다.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가 자신의 몸이라는 사실이 더 소름 끼쳤다.

‘와…… 그래도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심한데…….’

아무리 북혈마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 상태를 본다면 그도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인간들.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인 거야? 추워 죽겠는데 불을 피우면 안 되려나?’

연월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생각했다.

민가에 들어가서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 때문에 마을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 후에는 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북혈마제가 어떤 놈인지 몰랐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날을 기점으로 조금 남아 있던 기대감도 전부 다 사라져버렸다.

연월랑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불을 피우는 것을 포기했다.

추위를 참는 게 낫지 괜한 위험을 감수하지는 말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 했으면.

그 정도 노력했으면 안 잡혀야 하는 것 아닌가?

연월랑은 정말 억울하고 분했다.

왜 하필 자기가 온 곳으로 북혈마제의 수하들이 따라온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촘촘한 기막에 걸려든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자기는 정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기에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났다.

“연 군사. 우리는 연 군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연 군사는 우리와의 관계를 하찮게 생각했던가 봐. 연 군사가 그러고 가면 우리가 어떻게 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사람이 연 군사일 텐데. 대단히 실망스러워.”

‘실망스러운 건 네 사정이고.’

연월랑은 철령대주를 노려보고 고개를 돌렸다.

‘네가 내 꼴이었어 봐라. 옳다구나 하고 혼인을 하게 생겼는지.’

평소라면 연월랑에게 깍듯하게 대했을 대주가 하대를 하는 것을 보면서 연월랑은 자기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주 낮을 것 같았다.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니 아직은 기대를 걸어 봐도 될까?’

연월랑은 가망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때까지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연월랑. 이번이 마지막일 거다. 궁주께서는 너를 용서하시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거야. 이번 일로 궁주께서 많은 사람을 죽이셨고 가문마다 충복들을 잃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곳곳에 너를 죽이고 싶어 할 적들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자들은 이제 궁주님과 싸워야겠군요. 내가 궁주님에게 그자들의 목을 달라고 할 테니 말이오. 그 이야기를 나한테 알려 준 게 과연 잘한 짓일까요?”

철령대주는 연월랑을 노려보았다.

홧김에 말을 해 버리기는 했는데 연월랑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궁주는 연월랑이 하는 말이면 뭐든 다 들어 주고 싶어 했다.

그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연월랑은 어쩌면 이것이 자기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철령대주. 여기서 나를 보지 못한 걸로 해 준다면 내가 언젠가 한 번은 철령대주의 목숨을 살려 주겠소. 그러니 나를 그냥 보내 주시오.”

철령대주는 기가 막혔다.

연월랑이 도대체 자기를 뭐로 보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해서 기가 찼던 것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자 연월랑이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궁주님과 혼인을 하면 나는 철령대주에 대해서 온갖 좋지 않은 말을 궁주님에게 할 수 있소. 궁주님이 질투를 느낄 만한 얘기도 할 수 있고 말이오.”

“연월랑!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네가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연월랑은 철령대주가 자신의 말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궁주라는 놈의 총애를 받다 보니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무기가 됐다.

철령대주는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마음을 굳혔다.

“그게 너의 뜻이라면 네 뜻대로 하거라. 그러나 나는 너를 데려갈 수밖에 없다. 너를 데려가지 못하면 궁주께서 오늘 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을 치실지 모른다.”

철령대주는 연월랑과는 맞지 않았지만 충신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연월랑은 이런 상황에서 그를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철령대주. 나한테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만약에 나를 놔주지 않으면 대주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을 거예요.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연월랑의 말에 철령대주가 웃었다.

“나는 이런 말싸움에 능하지 않다. 나는 궁주님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너를 데려오라는 것이 궁주님의 명이고 나는 너를 데려갈 것이다. 간단한 일이다.”

철령대주가 연월랑의 팔을 잡아 손을 뒤로해서 묶으려 할 때였다.

“에헤이. 그건 너무 나간 거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철령대주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검을 빼 들며 뒤로 물러섰다.

“누구냐!”

“우리가 누군지는 알 것 없고. 여자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연월랑조차도 그 말에는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동정을 사고 있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 말은 용서해 줄 수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일에 끼려고 하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거라. 이 여자는 내부의 규율을 어기고 도망치는 자다. 규율에 따라서 행하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마라. 목숨이 아깝다면 말이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어쩔 건데?”

“그러면 그런 목숨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철령대주는 말을 걸어온 이들을 둘러보았다.

행색은 초라했고 무인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철령대주는 더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들이 도대체 뭘 믿고 자기에게 덤비는가 해서였다.

철령대주 자신은 누가 봐도 신분 높은 무인이었는데 고작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고 나서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여자는 그냥 놔주도록 해.”

“네놈들의 신분을 먼저 밝혀라. 밝히고 싶지 않으면 본보기로 몇 놈을 우선 죽일 수도 있다.”

철령대주는 이렇게 된 이상 이 자리에서 피를 보는 것이 불가피하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연월랑은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남자들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개방의 방도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겼다.

한마디로 거지 같았다는 것이다.

그 추측은 상당히 진실에 근접했다.

개방은 아니지만 향화문의 문도라는 점에서 그랬다.

그들은 특히 북혈마제의 소식을 전담하는 자들이었고 연월랑이 도망쳐 나온 일에 관심이 많았다.

북혈마제에 대한 소식을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연월랑만큼 중요한 인물이 없었다.

북혈마제가 총애하는 군사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북혈마제가 연모하는 연월랑을 잡아 두면 가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월랑은 그들에게 기대를 해 봐도 좋을까 하면서 은근슬쩍 그들의 뒤로 숨었다.

철령대주는 연월랑이 그들에게 숨는 것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렇게 된 이상 그들을 계속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연월랑이 기대를 하고 있을 때 희망을 모두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철령대주의 병장기가 불을 뿜기 시작하자 연월랑은 안타까운 탄성을 쏟았다.

자신이 잠시 동안 기대를 가졌던 이들이 절대 철령대주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뒤로 훌쩍 날아서 거리를 벌리더니 철령대주를 향해 침을 날렸다.

아무리 철령대주라고 하더라도 세 방향에서 각자 날아오는 침을 전부 막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그들은 생각보다 움직임이 기민했고 각자가 맡은 방향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해 댔다.

겨우 그런 침을 가지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연월랑은 그들을 도와 철령대주를 공격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연월랑이 나서기도 전에 철령대주의 다리가 풀렸다.

철령대주조차도 그 상황에 놀란 것 같았다.

그러자 그들이 새로운 침통을 꺼내더니 그때부터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새로 꺼내든 침통은 훨씬 크고 굵어서 거의 손가락 굵기는 되어 보였다.

연월랑은 그들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아주 바보들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연월랑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그들은 영리하게 움직이더니 철령대주를 제압했고 한 사람이 연월랑에게 다가와 그녀를 등에 업고 신법을 펼쳤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신법의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려는 것 같던 희망이 다시 나타난 듯했다.

한참을 가던 문도가 숨을 고르며 연월랑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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