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1화
381화
“연 군사는 오늘의 성과가 그리 기쁘지 않은 모양이구나.”
북악천의 말에 그 주위에 있던 장로와 대제들이 못마땅한 얼굴로 연월랑을 노려보았다.
연월랑은 궁주의 기분을 맞출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궁주는 늘 그녀의 마음을 신경 썼다.
연월랑의 지략으로 지금껏 북혈마제가 숱한 승리를 일구어 왔고 수많은 세력이 그의 발아래에 엎드렸지만 북혈마제의 측근들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연월랑은 쉽게 예측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궁주가 오래전부터 연월랑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로 연월랑을 떠보며 궁주의 기분을 맞춰 주도록 설득했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멸시하듯 바라보며 치를 떨곤 했다.
북혈마제 정도 되면 사내답고 호방하고 그만하면 외모로도 어디에서 빠지지 않는데 감히 일개 군사가 궁주를 대하는 태도가 그게 무엇인가 해서 모두가 이를 갈았지만 연월랑을 향한 북혈마제의 총애가 너무 커서 섣부르게 모략을 할 수도 없었다.
허튼짓을 했다가 오히려 북혈마제의 칼에 수급이 잘려나간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일을 목도한 경험이 쌓이다 보니 말을 조심하게 됐고 뒤에서 흘겨보기는 해도 직접 대놓고 연월랑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오늘은 승리를 자축하며 내 궁에서 축하주를 들면 어떻겠는가. 연 군사.”
연월랑이 허락을 해 주기만 한다면 북혈마제는 진심으로 기쁠 터였다.
얼음으로 빚은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그의 가슴은 매번 푸르른 소년처럼 두근거렸다.
잔인하고 피를 보기를 즐기는 성정이지만 연월랑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그냥 평범한 남자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연월랑이라는 산성은 단 한 번도 그에게 틈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아직 궁주님의 앞에 굴복하지 않은 세력이 더 많습니다. 저는 궁주님이 지금의 승리에 도취될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월랑은 고작 이것을 이루고 기쁘더냐고 말하고 싶은 듯했고 북혈마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 그렇구나. 반드시 이곳을 전부 통일하고 연 군사와 함께 중원을 밟을 것이다.”
연월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웃음을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느라고 연월랑은 혼이 났다.
‘찢어 죽일 놈!’
연월랑의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험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이 저를 향해 사나운 눈매를 하고 쏘아보는 것을 느끼며 연월랑은 먼저 말을 달렸고 북혈마제는 아쉬운 듯 그 모습을 아련히 바라보았다.
연월랑은 궁으로 들어가 자신의 처소에 이른 후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있게 된다고 해서 긴장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연월랑은 옷을 갈아입다가 멈칫했다.
‘보지 말자. 고개를 돌리지 마. 연월랑.’
그러나 연월랑의 고개는 기어이 돌아가 명경 속의 몸을 들여다보았다.
천상의 존재가 심혈을 기울여 깎아 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몸.
‘X발!’
연월랑은 터져 나오는 욕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내 소중이 어디 갔냐고!’
저를 무림으로 꼬드긴 놈이 어떤 놈이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무림으로 이동하겠냐는 상태창이 나타났을 때 연월랑은 S급 헌터로 초정점을 찍고 있었고 세상의 누구도 부러워할 게 없는 남자였다.
그는 스타였고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스타 중의 스타.
헌터들의 영웅.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레이드 스케줄보다 더 많은 게 광고 스케줄이었다.
일단 그가 출연하기만 하면 판매량이 급증했기에 광고주들마다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곤 했었다.
레오루카 모레띠.
그는 헌터가 되지 않았어도 성공할 사람이었다.
남다른 지성과 호감 가는 외모.
그를 본 사람들은 쉽게 호감을 느꼈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었던 레오루카는 헌터로 각성하고도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어차피 헌터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은 승승장구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배가 부른 상태에서 디저트 하나를 더 받은 느낌.
상대는 아끼던 것을 준 건지 모르겠지만 레오루카는 뚱한 표정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저 새끼는 저걸 또 왜 가져왔어?’라고.
헌터 각성이 그에게는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나한테 이런 능력은 또 왜 나타나?’
그것까지 잘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것도 잘했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고, ‘나란 인간은 도대체 못 하는 게 뭘까?’라는 궁금증이 진지하게 들었다.
던전에서의 활약도 무수한 말을 남겼다.
압도적이라는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어딜 가건 존재감이 넘쳐났고 레오루카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존재 자체로 민폐가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레오루카에게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고 그는 혼자서도 완전했다.
그는 딜러였지만 탱커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다.
그의 레이드는 시작과 동시에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았고 그가 가는 곳마다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절실하고 절박할 틈이 있었다면 레오루카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매번 어제와 같은 오늘이 이어지고 내일도 오늘과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그 상태창을 보았다.
무림으로 이동하겠냐는 상태창을 봤을 때 레오루카는 호기심 반, 귀찮음 반으로 그러겠다고 말했다.
경거망동의 극치였다.
자신이 정말 무림 세계로 이동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레오루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저에게서 나온 웃음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뭐야…… 뭐야, X발! 웃음소리가 왜 이래!!’
그는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북천의 패자라 불리는 북혈마제의 군사 연월랑.
한 떨기 고고한 꽃처럼 아름다운 여. 자.
그게 레오루카 모레띠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연월랑이 된 레오루카는 꼬박 하루 동안 제 방에 틀어박혀 손에 잡히는 온갖 것을 내던졌다.
“야, 이 새끼야!! 너, 나와, 이 새끼야!! 너, 뭐야! 너 뭔데 나한테 이런 짓을 한 거냐고. 이 개X끼야!!”
그녀는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자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미친 듯이 소리쳤다.
연월랑이 그러는 것을 본 적 없던 사람들은 기겁하고 북혈마제에게 그 사실을 고했지만 북혈마제가 나서고도 연월랑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잠잠해지기는커녕 북혈마제에게까지 욕을 퍼부어서 궁의 모든 사람들을 살얼음판 위에 걷도록 만들었다.
그게 벌써 7년 전의 일이었다.
레오루카는 군사 연월랑으로 사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자기가 여자가 됐다는 사실에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북혈마제가 자신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북혈마제를 먼저 죽이자고 계획을 세웠을 정도였다.
지금도 그 계획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언제든지 다시 만지작거릴 패로 생각하고 있었다.
연월랑은 명경에 비친 제 모습에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찼다.
기껏 키워놓은 근육도 다 사라지고.
아니. 그 상태창은 뭐였을까.
연월랑은 그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아오오오오!!”
연월랑의 방에서 다시 갖가지 것들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자 밖에 있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군사의 발작이 다시 시작된 것 같다면서 걱정이 커졌던 것이다.
* * *
“궁주님. 이제 궁주님의 연치도 있으니 혼인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을 것인데 마음에 두신 분이 계시면 혼담을 넣겠습니다.”
궁의 대소사를 맡아온 장로 사규열이 말했을 때 북혈마제는 그의 말을 음미하듯이 생각했다.
요즘의 북혈마제에게 다른 사람은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연월랑.
그녀가 아니고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사규열의 이야기로 북혈마제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북혈마제는 이유가 없어도 화를 내는 사람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살인을 심심풀이로 저지르기도 했다.
시립해 있던 무인에게서 검을 빼앗아 그것으로 그자의 배를 찌른 일은 지금까지 한두 번 있어 왔던 게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궁주에게서 조금이라도 대답이 늦어지면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며 긴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북혈마제가 뭔가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사규열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고생한 이들과 함께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면 어떻겠는가.”
전혀 엉뚱한 말을 하는 그였지만 사규열은 궁주가 연월랑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 빠른 이들이 연월랑을 찾아갔다.
전투가 멈춘 후 연월랑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군사인 자신을 찾아올 이유도 없었다.
연월랑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퉁명스러운 표정을 한 채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모두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연월랑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연 군사. 궁주님께서 연 군사를 연모하시니 우리에게는 큰 홍복이오. 연 군사에게도 크게 영광스러운 일이 될 테니 이번 연회에서 준비를 하고 있도록 하시오. 아무래도 궁주께서 연 군사에게 청혼을 할 것 같으니 말이오.”
연월랑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것 같았다.
‘죽일까?’
그게 처음 든 생각이었고, 도망치는 게 낫겠다는 게 다음에 든 생각이었다.
연월랑의 몸은 무공에 적합하지 않았다.
검술도 형편없었고 체력은 끔찍했다.
체력과 근력을 끌어올려 보려고 식사량을 늘려보고 수련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그냥 그게 연월랑의 체질이었다.
저질 체력에 그냥 머리만 좋았다.
‘젠장!’
연월랑은 그 자리에서 제 성질을 다 부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연 군사. 연 군사에게도 나쁜 조건이 아니오. 궁주님의 배필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력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지 연 군사도 모르는 바가 아닐 것이오. 우리 입장에서는 궁주님이 더 좋은 곳의 여식과 혼인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궁주님께서 연 군사를 마음에 두신 것을 어떻게 하겠소?”
연월랑은 장로들의 얼굴에 한 번씩 주먹을 꽂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녀가 조용한 것을 동의로 여긴 장로들은 조금 더 잔소리 겸 충고를 늘어놓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연월랑이 부끄러워하는 것 같더라는 말을 북혈마제에게 전했다.
부끄러워하는 연월랑.
북혈마제는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하면서 흡족해했고 연월랑은 장로들이 떠나자마자 짐을 꾸렸다.
여기에서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할 것이 아니었다.
‘오래 미뤘지. 더는 미룰 일이 아니야.’
연월랑은 오랫동안 침묵하던 상태창이 어느 날 다시 나타났을 때 상태창의 명령에 호응하지 않았다.
산본의가의 이공자 서도진을 죽이라는 간단명료한 요구에, 그 임무를 수행할 경우 레오루카에게 줄 보상에 대해서도 줄줄이 언급했지만 그는 똑같은 함정에 두 번 연속으로 당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서도진을 죽여서 자기가 얻는 게 뭐라는 말인가.
레오루카는 모든 것을 다 갖고 다 누려 봤기에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천천히 나이를 먹어 가는 것에 대해서도 만족했다.
지금 연월랑의 몸은 고작 열아홉 살이었지만 열두 살부터 서서히 나이 들어온 몸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렸을 때의 불안과 고통이 있어서 레오루카는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