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0화
380화
아진이 오른손을 뻗자 그의 손에 4척이 넘는 거대한 바람 칼이 생겨났다.
그림자 용은 벽과 허공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 가며 아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림자 용이 아진에게 집중하면서, 그림자 용이 분출하던 무형지기는 상당히 약해졌다.
더 이상은 힘을 분산해 가면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그림자 용도 알게 된 것 같았다.
아진의 옷자락이 거친 광풍에 휘말린 듯 펄럭였고 그림자 용은 서서히 아진의 주위를 돌았다.
아진의 눈이 고요히 감겼다.
그림자 용이 뇌기를 날리며 아진을 압박했다.
그 순간 아진의 몸에서 수백, 어쩌면 수천 개가 넘을지도 모르는 뇌기가 폭발해 나갔다.
뇌전을 머금은 검기다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한 공격에 그림자 용은 황급히 몸을 피했다.
린린의 품에 있던 흑주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맹렬히 그림자 용을 향해 달려나갔다.
주먹만 한 강아지가 제 주인만 믿고 만용을 부리는 것 같았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아진의 공격이 엉켰다.
그림자 용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흑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흑주야. 물러서!”
아진이 지강을 발출하며 그림자 용을 공격했지만 그림자 용은 멈추지 않았다.
둘의 힘이 그대로 맞부딪쳤다.
린린과 소청, 독각화망까지 나와서 그림자 용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림자 용은 결국 흑주를 덮쳤다.
“……!!”
아진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손을 뻗어 흑주를 구하려 했지만 그림자 용이 흑주를 덮친 것이 먼저였다.
“오라버니…….”
린린도 다급하게 다가와 아진의 옆에 섰다.
흑주를 덮은 그림자 용은 연이은 공격에 힘을 잃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투지를 불태웠다.
모두가 허망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림자 용의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마치 어딘가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는데 아진은 설마 하면서 흑주를 바라보았다.
흑주가 그림자 용의 진기를 흡수하고 있는 건가?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림자 용이 보여준 힘이 너무 막강했다.
아진은 자기가 흑주의 비극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헛된 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림자 용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 흑주가 남아 있었다.
그 반대가 되는 게 당연할 텐데도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것은 흑주였다.
흑주는 좋은 싸움이었다는 듯이 혼자서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아진에게 날아왔다.
“너…… 괜찮은 거냐?”
흑주는 뭘 잘못 먹은 것처럼 조금 불편한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 제 뱃속에 들어간 이상 그림자 용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흡수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았다.
그림자 용은 이제 동굴의 벽 대신 흑주의 몸 안에 갇힌 채 떠돌았다.
“……흑주 괜찮은 거야. 오라버니?”
흑주의 몸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 용을 보면서 린린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림자 용은 금방이라도 흑주를 뚫고 나올 것처럼 보였지만 흑주도 만만치 않았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흑주를 바라보는 동안 흑주는 혼자 근심 없는 얼굴로 아진의 곁에 얼쩡거렸고 아진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부터는 가려서 먹어. 흑주야. 그러다가 큰일 난다.”
그러면서도 아주 안심이 되지는 않아서 흑주를 안고 제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림자 용이 갑자기 폭주해서 혹시라도 흑주를 상하게 하지 못하도록 기운을 밀어 넣어 그림자 용의 기를 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진이 놔주자 흑주는 훨씬 편해진 듯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고 잠시 후에 동굴 입구 쪽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은씨세가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
그들은 안에서 벌어진 일이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상상한 장면은 그림자 용이 아진 일행을 없애고 그들을 제물로 힘을 키우는 거였을 것이다.
실망한 얼굴에 그들의 생각이 여실히 드러났다.
“소청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가주가 말하자 소청이 웃었다.
“그림자 용은 사라졌어요.”
그러자 가주가 놀란 얼굴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더니 허겁지겁 팔을 걷었다.
“주박이 사라졌다…….”
가주의 말을 신호로 다른 이들도 자기들의 몸을 살폈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상의를 훌렁 벗고 옆 사람에게 등을 보이며 주박이 없어졌냐고 물었고 다른 이들도 자기들의 몸을 확인받았다.
“정말 사라졌습니다. 정말 주박이 사라졌어요!”
그림자 용의 주술에 묶여 있던 것이 꼭 좋은 건 아니었는지 그들은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여가면서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아무 대가도 없이 힘을 빌려주겠다고 하는 존재는 없잖아요. 힘이 들고 오래 걸려도 스스로의 땀으로 얻지 않으면 그건 진짜 자기의 힘이 되지 못해요.”
소청의 말에 은씨세가 사람들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아진은 그런 그들의 곁에 소청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소청 역시 그 마음을 확실히 굳힌 것 같았다.
“소청아. 우리에게는 너를 키울 의무가 있다.”
가주가 말했지만 소청은 더 말할 이유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는 어머니가 계세요. 어머니가 지금까지 저를 잘 키워 주셨는데 이제 와서 제가 다른 분에게 의탁할 이유는 없어요.”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그거라면 가주님이 더한 것 같은데요? 그림자 용에게 운명을 맡긴 걸 보면요.”
가주는 분한 듯이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래도 억지로 화를 참으며 말했다.
“너는 귀한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 네가 그렇게 천한 여자의 밑에서 커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주의 말에 소청이 웃었다.
“가주님. 제 어머니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가주님은 저에 대해서 알 기회가 없었죠. 앞으로도 영영 알 기회가 없기를 바라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가주님이 제 아버지의 육촌이었다고 해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앞으로 그런 말을 할 때는 조심하는 게 좋아요. ‘내 목 위에 머리가 없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한 번 정도 해 보시고 나서 정말 그래도 될 것 같으면 그때 그런 말을 하세요.”
“…….”
사람들은 소청의 말을 들으며 입술을 뻐끔거렸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는 못했다.
소청의 얼굴을 보면서 그것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가요. 스승님.”
소청은 이제 자기가 그곳에 남아서 할 일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쩌면 오랫동안 아버지의 가족들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언젠가 만나고 싶다고 소망을 품어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만남은 소청에게 상처 외에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아진은 소청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소청은 그를 바라보고 웃음을 짓더니 그 손을 잡았다.
가주에게서 어머니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고 나면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아진은 소청에게 더 이상 위로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놓았다.
흑주가 아진의 어깨에 머리를 박으며 톡톡 두드렸다.
그림자 용 때문에 속이 다시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아진은 흑주를 두 손으로 감싸고 가면서 내내 자신의 공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처음에는 그림자 용을 완전히 없애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은 되지 않았다.
그림자 용은 점점 약해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제 흑주가 확실히 우위를 차지했다는 믿음이 생겨서 마음은 조금 놓였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던 제일조가 다시 날아와 흑주의 주위를 같이 날았다.
그러자 흑주도 아진의 손에서 떠나 제일조와 함께 둥실 떠갔다.
“흑주는 참 대단해. 독각화망도 그렇고.”
아진이 무심결에 말하자 제일조가 속상한 듯이 아진을 힐끔거렸다.
그동안 자기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는데 이번에 한 번 빠졌다고 바로 그러냐는 것 같은 시선이라 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오라버니.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린린이 진지하게 충고를 하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린린은 제일조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그림자 용과 싸우면서 린린은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었다.
자신이 그림자 용을 쓰러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깊은 좌절감과 낙심이 함께 들었다.
아진은 혼자서도 결국 이길 것 같았고 싸우는 동안 스스로 강해지면서 승리를 거머쥘 것 같았다.
정작 아진은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진이 더 이상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어째야 할지, 그것은 걱정이 됐다.
‘괜히 그림자 용 같은 게 나타나서!’
린린은 속으로 삐죽거렸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다시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치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것은 소청도 비슷했다.
소청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림자 용은 희한했고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동굴을 나온 게 자기들이 아니라 그림자 용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스승님은 위기의 순간마다 방법을 찾아내고 그림자 용을 이겼다.
소청은 그를 그렇게 만드는 힘이 자기들을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청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정말 좋은 스승님을 만나서 다른 불평은 전혀 할 수 없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은 스승님을 두었으면서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불평하거나 원망한다면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림자 용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을까요. 스승님?”
소청이 묻자 아진이 흑주를 바라보았다.
흑주는 태평해 보였다.
그림자 용이 다시 나타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이번처럼 적대적으로 굴 것 같지는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믿음이 가득 묻어났고 그들의 얼굴에 번진 웃음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어느 순간 그들의 모습은 서로 닮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 * *
북방의 초원을 달리던 말들이 하나둘씩 멈춰 서고 있었다.
선두에 선 남자는 강아지풀을 입에 물고 잘근 씹었고 몇 사람이 그의 옆으로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애쓰며 기분을 맞춰주려 했다.
“궁주님이 보이면 모두가 내빼는 모습이 고양이 앞의 쥐 같지 않은지요. 궁주님께서 말을 타고 가시면 무기를 들 필요도 없이 저절로 길이 열리는 듯합니다. 이제 궁주님의 명성만으로도 이 지역을 통일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오체투지 하는 것을 보니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 진작 이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이곳의 승리를 기반으로 중원까지 발밑에 두는 것이 어떠신지요. 궁주님.”
“그 말이 맞습니다. 그놈들은 우리를 관외의 세력이라 부르며 무시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보면 다들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칠 것입니다.”
궁주 북혈마제 북악천은 신나게 떠들어대는 이들을 지나 말을 몰았다.
한쪽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던 군사 연월랑은 이 모든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녀는 설원처럼 하얀 비단옷을 입고 고혹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