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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76화 (376/470)

제376화

376화

“나는 천마신교의 교주다.”

린린이 말하자 가주가 코웃음쳤다.

그러나 그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말은 신교에 가서나 하거라. 여기에서 그런 말을 해 봐야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테니 앞으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가주가 그렇게 말하자 소청은 기분이 나빠진 듯했다.

자신의 사고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하대를 해 버린 것은 린린이었는데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지 소청은 가주가 린린에게 반말을 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계속 말할 이유는 없을 것 같소. 내 제자는 당신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했소. 나 역시 당신들이 사이한 힘에 당신들을 제물로 주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내 제자를 당신들에게 맡길 수 없소.”

아진은 벽의 그림자를 보며 말했고 그들도 아진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우리 집안의 문제요. 소협에게는 우리 일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는 걸 자각하길 바라오. 그동안 소청을 돌봐 준 건 고맙지만 소협의 본분에 대해서 생각하시오. 더 이상 관여하려고 하는 것은 선을 넘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도 더는 묵과할 수만은 없소.”

“묵과하지 마시오. 나 역시 묵과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은 힘을 얻기 위해 사이한 방법을 쓰고 있고 당신들만으로 안 될 것 같으면 다른 곳에서 제물을 끌어들일 가능성도 높소. 그것은 과거에 사도련이 행했던 것과 비슷한 일이고 나는 그런 일을 미리 알아내고 막을 권한을 갖고 있소.”

아진이 말하자 몇 사람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이 알려져 있었기에 아진이 그냥 겁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았을 것이다.

“괜한 걱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제물로 삼지 않소.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오.”

서둘러 진화에 나서려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며 아진이 그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봐야 하겠소.”

“우리에게는 소협에게 그걸 보여 줘야 할 의무가 없소.”

“그건 잘못 아는 겁니다. 사도련의 일 이후 폐하께서 나에게 그 일에 대한 권한을 폭넓게 위임하셔서 나는 언제든지 이런 일에 대해 조사할 수가 있습니다.”

아진은 황제에게 받아 가지고 있던 패를 보여 주었고 가주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사특한 힘에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황제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명령이오. 평소에 이곳에서 해 왔던 것을 지금 바로 시행하도록 하시오.”

그들은 아진의 말에 굴욕감을 느꼈고 모두 가주를 바라보았다.

가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렸지만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아진이 누구인지 알면서 함부로 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 온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괜한 핍박을 하지 마시오. 증거도 없이 이러는 것은 안 될 일이오.”

가주는 피할 길을 찾으려는 것 같았지만 아진은 이미 벽을 향해 돌아섰다.

“숙부님.”

랑랑이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독각화망이 잔뜩 움츠러든 채 랑랑의 뒤로 숨고 있었다.

독각화망은 영물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녀석이었고 그런 모습을 보이는 적이 거의 없었기에 아진은 호기심을 느꼈다.

제일조는 동굴에 따라 들어오지도 않았고 흑주 역시 소청의 품속에 숨어 있었다.

“소청아. 흑주를 꺼내봐.”

그러나 소청은 손을 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 버렸어요. 만지지도 말라는 것 같아요. 스승님.”

흑주까지 그러는 것을 보면 벽의 존재가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라는 의미였다.

“설명해 보시오. 가주님. 어떤 힘을 얻기로 한 것인지 말입니다.”

“내공을 얻고 무공의 성취를 이루는 것과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은 것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가주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검을 꺼내 들었다.

“우리는 이 검으로 몸을 그어 피를 내서 그림자 용에게 주고 힘을 얻습니다.”

“그 힘이라는 것은 뭡니까. 당신들이 피를 주면 그림자 용은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는 벽에서 나오게 됩니까?”

“그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림자 용이 당신들에게 나타나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진의 질문이 계속될수록 가주는 더욱 난감해했다.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아진이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파고든다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불편해졌던 것이다.

“갈등이 되는 것 같군요. 제가 가주님을 도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주님은 이곳에서 저에게 모든 얘기를 다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이 동굴째로 다 함께 이곳을 날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곳이 장차 더 큰 혼란과 해악을 야기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화가 난 듯이 아진을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치고 말았겠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서도진이라는 인간은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실현하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것을.

“얘기를 쉽게 풀어 갔으면 합니다. 여기에서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아진은 벽을 살피면서 독각화망과 흑주의 반응에도 역시 주의를 기울였다.

둘은 각각 랑랑과 소청에게 숨어들고도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동굴을 나가자는 듯 귀찮게 굴었다.

단순히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결사적으로 그곳을 나가고 싶은 듯해서 랑랑과 소청은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흑주와 독각화망이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흑주는 다른 사람 못지않게 의리가 있어서 자신의 힘에 부치더라도 웬만하면 아진의 곁에서 그를 도와주려 했을 텐데 그런데도 소청을 조르며 자꾸만 나가자고 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흑주가 이렇게까지 반응을 보인 게 언제였지?’

애써 생각해 보려고 해도 바로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그것은 까마득한 일이 되어 있었다.

“소청아. 랑랑이를 데리고 동굴 입구 쪽으로 가 있어. 린린. 네가 아이들을 보호해.”

그러자 소청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여기에 있을 거예요. 스승님.”

소청은 아진이 뭐라고 말을 해도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흑주 역시 만만치 않았고 아예 소청의 품 밖으로 나와서 머리로 소청의 가슴을 팡팡 치며 밀어댔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 같았는데 아무리 소청의 고집이라고 하더라도 흑주가 그렇게까지 하면 소청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초식을 취할 수도 없이 흑주가 계속 밀어 댈 테니 먼저 뜻을 꺾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고님은 여기에 계셔 주세요.”

“그래. 걱정하지 마.”

소청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듯 아진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랑랑의 손을 잡은 채 동굴 입구로 달려갔다.

은씨세가의 사람들은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슨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소청이 도망치는데 가서 잡아야 하지 않냐는 듯 사람들이 일제히 가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가주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소청은 가기 싫은데 억지로 입구 쪽으로 간 거였고 자신의 스승을 그곳에 둔 채 멀리 가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린린. 소청이랑 랑랑이에게서 눈을 떼지 마.”

아진이 말하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입구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고 설사 그 거리가 수십 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그곳을 오가며 충분히 아이들을 보호할 자신이 있었다.

이제 아진의 온 신경은 그림자 용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림자 용은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다.

벽을 타고 이리저리 유영하듯 움직이는 그림자 용은 아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아진은 은씨세가 사람들에게서 작은 탄성 같은 것이 흘러나온 것을 들었다.

고통에 겨운 소리였는데 한 사람에게서 나오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여러 사람에게서 나오기 시작했다.

소리의 강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통증을 참는 것 같은 소리였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았다.

“으으윽…….”

누군가 작게 신음을 토하더니 마침내 검을 빼 들었다.

스르르르릉-.

아진은 그가 검 손잡이에 손을 얹는 것을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거기에는 얼마든지 반응을 할 수 있어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검을 빼든 사람은 누가 손을 쓸 틈도 없이 자신의 복부를 검으로 갈랐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텐데도 그는 그제야 고통에서 해방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검을 빼 들고 스스로 몸에 상처를 냈다.

결단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주저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제 몸을 상하게 한 후에야 고통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진은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몸에서 검을 바로 빼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진은 그 모습을 유심히 보면서 그들이 검에게 피를 먹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린린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검으로 낸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야 마땅했다.

그러나 흘러내려야 할 피가 중력을 거슬러 검을 향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진은 마른 헝겊처럼 피를 빨아들이는 검을 지켜보았다.

“으윽!”

피가 충분히 흘러나오지 않았는지 한 사람이 검을 비틀었다.

그러자 조금 더 많은 피가 흐르면서 검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일각 가량이 지났을 때 누군가 검을 빼 들고 천천히 벽을 향해 다가갔다.

그림자 용은 그때까지도 벽을 유영하듯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진을 신경 쓰는 것 같았지만 특별히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린린의 근처에서 멈춘 적도 있었지만 그때도 오래 있지는 않았다.

난데없이 동굴에 찾아온 이들에게 화가 났을 텐데 아직은 얌전히 기다렸다.

이윽고 한 사람이 다가가 벽을 향해 검을 찔러 넣자 손쉽게 검이 벽으로 들어갔다.

벽이 무르지 않은 것을 알고 있던 아진은 신기해하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검이 벽에 꽂히자 그림자 용이 그곳으로 움직였다.

그림자 용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마치 검에 묻은 피를 그림자 용이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자 용이 피를 빨고 나자 은씨세가의 사람은 검을 뺐고 다른 이가 검을 벽에 박아 넣었다.

그와 같은 행동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그림자 용은 피를 흡수하면서 조금씩 몸이 커졌다.

육안으로 한눈에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급격한 변화를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주의 깊게 바라본 사람이라면 변화한 것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계속 저렇게 하도록 놔두면 안 되는 것 아니야? 그림자 용이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은데?”

린린이 말했지만 아진은 우선 기다렸다.

그림자 용 때문이 아니었다.

은씨세가 사람들이 무아지경인 것처럼 보였고 지금 잘못 움직였다가는 그들 모두가 주화입마에 빠질 듯해서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던 것이다.

린린도 비슷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하고 아진의 의견을 구하고만 있었다.

그림자 용이 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검이 처음의 상태로 돌아왔고 은씨세가 사람들의 상처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림자 용이 가진 특수한 힘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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