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373화 (373/470)

제373화

373화

가주는 아진과 조용히 자리를 마련했고 서남에서 나타난 괴수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했다.

“소협도 알고 있겠지만 수련을 아무리 해도 실전의 경험이 따라 주지 않으면 어렵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다른 사람들과 싸움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서남에 나타난다는 요괴를 토벌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진이 죽인 괴수와 같은 것은 더 이상 나타난다는 소문이 없었지만 요괴에 대한 소문은 훨씬 오래전부터 나왔던 것이라서 다른 곳에서 나타나고 있을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아진은 그들이 아직 그 요괴들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일 수 있어도 지금은 다른 것을 할 게 아니라 기본기를 탄탄히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진이 대답을 하지 않자 가주도 깨닫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혹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수련을 해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지 소협의 의견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남궁세가에는 남궁세가만의 고결한 무공이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그것을 연마하고 수련하면 저는 좋은 결과를 얻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가주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언젠가 저만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때 남궁세가가 도움이 되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개인의 문제도 아닐 텐데 그거야 당연한 겁니다. 본가를 믿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아진은 그곳에 며칠 더 머물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가르쳐 주었고 가주는 가문에 있는 영약을 어떤 식으로 배분하면 좋겠는지 아진의 의견을 물었다.

그것은 정말 민감한 문제라서 외부인에게 의견을 묻는 게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진에 대해 전폭적인 믿음을 갖고 있어서 그러는 듯했다.

아진 역시 몇몇 사람에게 기대하는 게 있었고 내공 문제만 해결되면 그들에게 상승 무공을 알려 주고 싶었기에 가주가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말을 해 주었다.

“방계를 키우는 것이 세가를 든든하게 하는 방법이면서 한편으로는 위태롭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결정은 결국 가주님이 하셔야겠지만 저는 이번 세대에 그분들이 강해지는 것이 남궁세가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진이 말하자 가주는 고민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도 가주가 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대의 가주는 내 직계 중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가주가 돼서 어려운 시기에 세가를 맡았습니다. 나는 빨리 세가가 정상적인 기틀 위에서 발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주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세가의 미래는 밝겠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제가 떠난 후에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거나 묻고 싶으신 게 있다면 언제든 본가로 소식을 전해 주십시오. 도울 수 있는 것은 힘닿는 대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소협이 본가를 이렇게 지지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소협의 믿음을 절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남궁세가를 떠날 때 사람들은 멀리까지 나와 아진 일행을 배웅했다.

“여기에 오길 잘한 것 같아. 우리가 한 건 별 게 아니었지만 이 사람들한테는 꼭 필요한 도움이었던 것 같아.”

린린의 말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랑랑과 독각화망은 독문에 비무를 청하러 가겠다는 원래의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랑랑은 아직 자기 자신의 독공을 수련하지는 못하고 독각화망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린린이 랑랑의 공격 방법에 의문을 품었다.

“랑랑. 너도 검술을 제대로 익혀야 할 것 같지 않아? 독각화망은 어차피 네가 명령을 하지 않아도 너를 도울 텐데. 네가 독각화망을 조종하기 위해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 말을 랑랑에게 직접 할 수 있는 건가 하면서 아진과 소청은 랑랑이 상처받을 것을 걱정했다.

그러나 랑랑은 역시 그런 거였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것 같기는 했어요. 어차피 독각화망에게 뭘 시켜야 하는지도 모르거든요.”

“그래. 검술은 내가 가르쳐 줄게.”

소청이 말하자 린린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암기술을 집중적으로 익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너랑 독각화망은 최고의 살수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와아……!”

랑랑은 뭔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을 빛냈다.

“누구보다 빠르게 비수를 빼고 한 번 네 손을 떠난 비수는 반드시 급소를 노리게 할 수만 있으면 너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야. 모두가 너를 두려워하게 될 거고 말이야.”

“굉장해요. 그렇게 할게요.”

“그래. 괜히 어설프게 이제 와서 독공 배운다고 할 일이 아니야. 독물을 조종할 수 있으면 그 능력을 활용하면 되는 거고.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남들하고 똑같이 굴 필요는 없어.”

랑랑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는 뭘 배우는 게 좋을까 고민이 많은 듯했는데 린린의 말을 듣고 속이 후련해진 것 같았다.

소청과 아진도 랑랑이 독공을 익히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에 그 말을 좋게 여겼다.

암기술도 만만치 않게 어렵겠지만 몸에 독의 기운을 흡수하고 독장을 발하는 것과 비할 바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발이 닿는 대로 느긋하게 가면서 수련을 하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하며 무가와 문파가 보이면 그곳에 들어가 쉬고 독문이 보이면 비무를 청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독문은 랑랑이 비무를 청하는 것을 재미있게 여겼다.

“산본의가의 귀한 아이를 다치게 할 수는 없으니 발은 움직이지 않고 손도 하나만 사용하도록 하겠소.”

랑랑을 보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말을 번복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말을 번복할 틈도 없이 먼저 상대방의 몸을 날려 버리는 일이 속출했다.

독각화망은 랑랑을 대신해 싸웠고 일단 독각화망이 독아를 드러내고 독을 분사하면 일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린린이 말했던 방법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먼저 독각화망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독을 분사하면 모두가 일시적으로 독각화망에게만 집중했기에 랑랑은 그사이에 자신의 암기로 사람들을 공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단순한 비무라서 실제로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지만 랑랑은 앞으로 실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달아 가고 있었다.

아진은 랑랑이 침을 날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재능은 모두가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랑랑이 모두의 앞에서 입증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비수가 편한 모양이었다.

랑랑은 자기에게 힘든 것은 과감히 버리고 손에 익고 편한 것을 골라 거기에 전념했다.

잘 되지도 않는 일에 오래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렸는데 일단 한 번 포기하고 나면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 성격은 누굴 닮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독각화망이 잠잠해지고 난 후에야 나무로 된 작은 칼이 바닥에 수북한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도중에 느꼈던 게 뭐였는지 깨달았다.

독각화망을 피할 당시에는 신경 쓸 틈도 없었지만 그게 진짜 비수였다면 자기들의 목숨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각화망은 오랜만에 존재감을 드러내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는데 독각화망이 날뛸 때는 제일조도 함께 날뛰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 심심했는데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흑주도 같이 끼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거라 흑주가 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남들이 신나게 노니까 자기도 같이 날뛰는 듯했다.

“랑랑. 정말 대단하구나. 독각화망만 조종할 수 있는 거냐? 아니면 다른 독물도 조종할 수 있어?”

독문의 문주는 자기가 처참하게 당했다는 생각보다, 독물을 조종할 수 있는 아이를 봤다는 것이 신기한 듯 묻더니 랑랑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독문에 있던 독물 몇 마리를 가져와서 랑랑에게 보여 주었다.

랑랑은 처음 보는 독물 앞에서 긴장한 채 아진의 손을 잡고 그의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밀었는데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독물이 랑랑의 앞에서 공격성을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아보았다.

“이놈들이 원래 이러질 않는데. 사람이 가까이 오기만 해도 몸에 독이 맺히는데 랑랑을 공격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랑랑 같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다니. 내가 이랬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들은 랑랑을 부러워하며 말했고 랑랑에게 비법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랑랑. 너는 독각화망의 독을 얻을 수 있지 않으냐? 그건 엄청난 혜택이란다. 독각화망이 싸우는 동안 너도 독각화망의 독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거지. 독각화망이 우리를 공격하는 동안 너도 함께 공격을 한 건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암기를 사용할 때 거기에 독각화망의 독을 묻히면 효과가 훨씬 좋아질 거다. 이제부터 네가 연습할 건 급소를 노리는 거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인 것처럼 흥분하며 말했다.

“원래 무기에 독을 미리 발라 두면 막상 사용할 때 독이 말라서 효과가 반감되는 경우가 많지. 그런데 너는 독각화망과 같이 다니니까 싸우기 직전에 암기에 독을 묻힐 수가 있잖아.”

“정말 그렇겠어요.”

랑랑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사람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경쟁자에게 이런 걸 가르쳐 주면 안 되는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 말에 랑랑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랑랑처럼 어린아이에게 이런 훈련을 시키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곳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어려서부터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진은 혼자서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모두 사라지고 평화롭게, 그리고 어린아이답게 살 수 있는 때가 올까?’

아진은 그 시간을 당기는 것이 결국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 * *

“스승님. 그런데 요즘에는 기분이 이상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하고요. 그동안 스승님이랑 같이 있으면 항상 일이 생겼던 것 같은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어느 날 산속에서 야숙을 준비하며 소청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런 생각 종종 하거든. 너희 스승님은 일을 몰고 다니는 것 같아.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일이 생기지.”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신기해요. 그래서 스승님 옆에 있으면 수련이 저절로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좋아요. 제가 만약에 스승님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훨씬 더 약했을 거예요.”

역시 소청이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불안했는데 그렇게 또 아진의 편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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