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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71화 (371/470)

제371화

371화

남궁세가가 자리한 합비에 이른 후 아진과 린린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사이에 합비의 모습이 많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동안 산본에만 있다 보니 다른 곳이 산본과 확연히 비교되는 것 같기도 했다.

워낙 번성한 산본을 보다가 합비를 보자 크게 낙후된 것처럼 느껴졌다.

아진이 처음 무림에 왔을 때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남궁세가가 기지개를 켰으니까 여기도 금방 커질 거야.”

그런 말을 하면서 가는 동안 사람들이 독각화망 때문에 놀라는 일이 자주 생겨 결국 독각화망은 보따리에 넣어서 아진이 들고 가야 했다.

독각화망은 갑자기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속상한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껏 뿔에 비단을 묶었는데 그건 효과도 없었다.

그들은 객잔에 들어가면서 곳곳을 오가는 남색 무복의 무인들을 구경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었다.

무인들은 열을 지어 다니면서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멈춰서 상관을 할 뿐 쓸데없이 분란을 야기하거나 사람들에게 겁을 주지도 않았다.

“저런 것도 많이 변한 거네. 전에는 세가의 무인이라고 하면 권위가 엄청 났었는데 말이야.”

아진이 말하자 랑랑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랑랑에게는 이런 모습이 전부 다 처음이었기에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전에는 그랬었어요?”

랑랑이 물으면 소청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아진과 린린은 소청을 데려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하는 게 아니었다.

소청이 아니었으면 자기들이 그런 걸 일일이 설명을 해 줘야 했을 텐데 소청은 그 일이 자기 몫이 된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말이 많지 않은 소청이었는데 랑랑에게 알려 줄 때는 그렇게 자상하고 수다스러울 수가 없었다.

“린린. 소청을 보면 꼭 오라버니 같지 않냐? 엄청 친절하고 마음씨가 착하잖아.”

“오라버니? 어떤 오라버니? 설마 오라버니는 아닐 테고.”

린린은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이 얼굴까지 와락 찡그려가면서 말했다.

아진은 본전도 못 건질 소리를 자기가 왜 했을까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객잔에 있는 동안 들려오는 이야기들도 별것이 없었다.

“혈림이 합비에 지부를 내려고 했다가 그대로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지?”

“나도 그 소리 들었는데. 사파의 살수들이 어디 합비에서.”

“이제 안휘제일검은 누가 뭐래도 남궁세가의 가주님이시니까.”

사람들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남궁세가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궁세가가 다시 합비의 패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민초들이야말로 무가가 바르게 가고 있는지 알게 해 주는 가장 정확한 기준이 되는 듯했다.

그들은 억울하고 분한 것이 있으면 자신들의 불만을 어떻게든 토로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진은 독각화망이 든 보따리를 들고 먼저 일어섰고 일행도 모두 그를 따랐다.

희한한 구성이었지만 그들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많지 않았다.

도시가 조금씩 활기를 되찾으면서 그런 외지인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들어오곤 해서였다.

아진은 그대로 남궁세가를 찾아갔다.

현판은 과거의 것과 달랐다.

아진은 전에 그곳을 찾아왔을 때의 기억을 전부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감정이 전혀 없었다.

문을 지키던 사람들은 아진을 막아선 채 누구인지 물었다.

“산본의가의 서도진이 가주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일전에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도진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력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서…… 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그곳에 있던 한 사람이 경공까지 펼쳐서 안으로 사라졌다.

곧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누가 왔는데 그렇게 요란한 건가 해서였는데 그 자리에 온 사람들 중 몇이 아진과 린린을 알아보았다.

“혹시 서도진 소협이 아니십니까.”

그 소문은 빠르게 번져 나갔고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들었다고 해 봐야 과거에 한창 영광을 누리던 시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숫자였지만 지금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유대감은 어느 때보다도 강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멸문당했던 무가.

그 가문이 다시 일어서며 조금씩 존재감을 키워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아직은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한 걸음을 옮기면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지 저절로 눈치가 보이는 마당에 황제의 총애와 검신의 믿음을 한 몸에 받는 아진이 그곳에 나타났으니 가문의 경사와 다름없게 느껴졌을 터였다.

아진이 그런 환대를 받고 있을 때 안에서 가주가 나왔다.

가주는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안휘제일검이자 창천검이라는 별호를 얻고 있었다.

“서 소협이 어쩐 일입니까.”

그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나왔다.

아진은 산본의가에서 보았던 그를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반가웠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갈 수 있을까 해서 염치 불고하고 와 보았습니다. 제 질녀가 강호행을 나서고 싶다고 해서 함께 길을 나선 참이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언제든지 와 주십시오. 서 소협이 온다는데 누가 마다하겠습니다. 객청에서 잠시 쉬고 계시면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가주는 이런 일을 해 본 경험이 많지 않은 듯했고 아진에게 책을 잡히지는 않을까 해서 긴장한 모습이 다분해 보였다.

아진은 그를 막으며 식사는 객잔에서 하고 왔다고 말했다.

“내일이면 다시 길을 나서야 할 텐데 그사이에 가주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다른 일로 괜히 번거롭게 해 드리려고 온 것이 아니니 편히 대해 주십시오.”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러면서 가주가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이들 역시 그냥 보내는 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다과나 내어 주십시오. 그 외에 더 주시면 불편해서 다시는 이곳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가주는 아진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들은 제 누이인 이린과 제 제자인 은소청, 그리고 조카딸인 유랑입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잔치라도 열린 것처럼 사람들은 은근히 들뜬 듯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에 소청과 랑랑은 객청에서 쉬고 린린과 아진은 가주 집무실에서 가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아진이 그곳에 찾아온 이유가 뭘까 하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진이 처음에 와서 한 말 때문에 한껏 기가 살아 있었다.

아진이 한 말을 들어 보면 가주가 아진에게 도움을 준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가주는 아진이 자신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을 한 것을 알고 있었고 가문과의 해묵은 관계에 대해 한 번은 제대로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진에게 그 일을 다시 꺼내 사과했다.

“가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제 그 일은 잊고 서로 발전적으로 협력해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습니다. 황상께서 본가의 보법과, 권법, 검법이 담긴 책들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멸문 당시 가주님의 직계도 아니었고 우리가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은 남궁세가의 하급 무인들이 배울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말했고 아진은 그 말을 경청했다.

“성취는 어떠십니까.”

“성취야…… 열심히 한다고 하고는 있습니다만 생각만큼 되지 않아서 아쉽고 답답한 마음뿐이지요.”

가주는 안타까움을 다 말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겨우, 간신히 기회를 얻었는데 그것을 익힐 재주가 부족해서 발목을 잡히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제가 조금 봐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가주님.”

“예?”

가주는 깜짝 놀라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가문의 무공을 아진이 자기보다 잘할까 했지만 그는 곧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밑질 것도 없었고 더 내려갈 바닥도 없었다.

“소협. 그러면 부탁하겠습니다.”

그는 부끄럽다는 생각 같은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해 주겠다고만 한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아진도 그들이 빠른 성취를 이루어야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 그 일을 미루지 않았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본가의 다른 무인들도 함께 견식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소협.”

가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가주만 익힐 수 있는 무공.

가주의 직계에게만 허락되는 무공.

방계에게까지만 전수하는 무공.

무가는 그런 식으로 각자에게 가르치는 무공에 차등을 두어 왔고 그로 인해서 무공이 실전되기도 하고 명맥이 끊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가주인 남궁진원은 남궁세가의 다른 무인들에게 무공을 아끼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듯했다.

그 자신이 혈통으로 가주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고, 지금의 상황에서 가문을 빨리 명문 세가의 반열에 올리고 검가로서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 아예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어떨지요. 소협?”

가주는 적극적이었고 아진은 그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아진이 무공을 봐 줄 거라는 말은 삽시간에 퍼졌고 세가 내의 모든 인원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다른 임무에 투입돼 있던 이들도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전부 다 와 버려서 그 자리에는 세가의 무인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여 있었다.

“우선은 그동안 익힌 것을 보여 주십시오. 잘 되지 않는 것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남궁진원의 귀밑이 붉어졌고 아진은 자기가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을 정정했다.

“그러면 제가 먼저 초식을 펼쳐 보이겠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하는 게 낫겠다는 듯 가주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만약 가주가 먼저 초식을 보이고 아진이 다음에 그것을 펼쳤다면 비록 아진이 그것을 노린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주의 권위는 실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주가 그것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의 보법은 기교가 많지 않지만 세가의 권법이나 검법과 잘 맞습니다. 그리고 심법은 근간 중의 근간이 되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펼치는 것은 그것들이 전제가 됩니다.”

그러면서 아진은 남궁세가의 대표적인 권법과 검법을 펼쳐 보였다.

사람들은 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아까운 듯이 가까이 모여든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구결을 외우는 것은 정작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무리를 익히고 깨닫는 것이 어려울 것이며 초식을 펼칠 때 동작이 원활히 연결되기 위해서는 내공이 충분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원래 각자가 깨닫도록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여러 해가 지체된 것이니 제가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진은 각 동작이 이어질 때 내공이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상세한 지도를 해 주었고 각 무공에 숨겨진 무리를 알기 쉽도록 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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