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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69화 (369/470)
  • 제369화

    369화

    “네가 정해. 아진아. 나는 사사로운 감정 같은 건 개입하고 싶지 않아. 나를 죽이려고 덤빈 사람인데 한때 어쨌다느니, 서악이의 엄마라느니 하는 말로 흔들릴 생각도 없고. 나는 나중에 문제가 될 만한 걸 놔두는 거 안 좋아해.”

    위도 자신이 거대 길드의 마스터였다.

    자신이 주도해서 이끈 레이드가 수천 번도 넘었고 수많은 사람을 통솔하며 상과 벌을 내리면서 조직을 다스려 왔다.

    알량한 동정심이 나중에 복잡한 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한두 번 봐 온 게 아니었다.

    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린린을 바라보았다.

    그 일은 아무래도 린린이 적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그 일을 맡겨 줬으면 하고 있던 린린은 가슴이 벅찼다.

    “알았어.”

    하유란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린린이라니.

    이 괴물에게는 자비를 구할 여지도 없을 거라는 것을 하유란은 알고 있었다.

    하유란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린린이 하유란을 낚아채서 사라졌다.

    아진은 위도와 함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유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진은 위도를 위로해야 하는 건가 하고 바라보았지만 위도는 일말의 감정도 내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벽 소저? 건너온 사람이 한 사람인 겁니까?”

    “잘은 모르겠어요. 제가 원래 확실하게 보진 못하잖아요.”

    벽예월이 난처한 듯이 말했다.

    “건너온 사람은 두 사람인데 이번 일에 투입된 사람은 한 사람인 건지도 모르겠고 다른 사람은 아직 건너오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전자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에요.”

    그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좀 억울하기는 하네요. 하유란은 제의를 받은 거잖아요. 그냥 무림으로 이동하겠냐는 질문만 받은 게 아니라 우리를 제거하면 원하는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고…….”

    아진은 린린을 통해 그 사실도 알게 됐고 그게 불만이었다.

    위도도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남아 있는 S급 헌터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 남은 S급 헌터 말이야.”

    아진은 그를 떠올려 보려고 했다.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았다.

    한때 아진 자신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기억이 흐릿해져 있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정말 강한 사람이 올 것 같아요.”

    “내 생각도 그래.”

    하유란이 처음부터 강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했다.

    하유란을 이용해서 두 사람을 제거하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하유란에게 큰 힘을 주었으면 됐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건지 이상했던 것이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을 간단히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둔 건 아닌 것 같아요. 충분히 즐기고 싶은 모양이에요. 시간이 걸려도. 그리고 실패해도.”

    벽예월의 말에 아진은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의 삶이 누군가 만들어 놓은 판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남에 괴수를 나타나게 한 것도 그자인 거겠죠?”

    아진의 말에 벽예월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정확히 아는 게 아니면 웬만해서는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것은 아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면 여기에 모여든 사람들은 할 일이 없게 된 거네.”

    위도가 말하며 아진을 바라보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산본에 모여든 사람들은 할 일이 없게 됐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온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위도는 그들이 그 일에 다 같이 나서 준 것에 큰 힘을 얻고 있었다.

    그동안은 아진과 산본의가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베풀었다면 이번에는 그들이 작은 힘을 모아서 산본의가 사람들을 지켜 주려고 나섰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어차피 우리는 여기에 왔고 이곳에서 시작한 삶에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앞으로도 이 삶에 충실하면 되는 거겠죠. 형님?”

    아진의 말에 위도는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마도 아진의 말이 맞을 것이다.

    이제 어느 날 갑자기 상태 창이 나타나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겠냐고 해도 위도는 그러겠다고 말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이곳에는 서악이 있었고 그를 둘러싼 작은 세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동안 속해 있던 어떤 세계보다 마음에 드는 세계였다.

    이곳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내놓고 지키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웃음이었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그가 인정하는 사람들이 짓게 될 웃음.

    그 웃음을 지켜 주기 위해 자기가 가진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족할 것 같았다.

    하유란으로 인해 받은 충격이 커야 했지만 위도는 생각만큼 슬프지 않은 것 같아서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서 그동안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았냐고 한다면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쓸데없이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기에게 서악이를 안겨 준 사람이니까 그 점은 고맙다는 생각 같은 것.

    그런 생각이 괜히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평가를 어렵게 하고 그러다 보면 괜히 자기에게서 이유를 찾으려고 하게 될 것 같았다.

    일어난 일은 분명하고 간단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은 욕망에, 한 S급 헌터가 상태 창의 제안을 수락했고 위도와 아진을 죽이려 했다가 실패했다는 것.

    그녀는 실패했고 아진과 위도는 살아남았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지금은 하늘이 뭐라고 말하나요. 벽 소저?”

    위도가 묻자 벽예월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바람처럼 맑은 얼굴을 했다.

    “전부 사라졌어요.”

    “별들이요?”

    하늘에는 여전히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는데 벽예월은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 사라졌어요.”

    피를 흘리던 위도의 별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가 흘린 피는 어쩌면 그의 영혼이 입은 상처인지도 모르겠지만 벽예월은 한동안 자신을 힘들게 옥죄고 있던 소임이 사라진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제 사람들을 돌려보내도 되겠다. 아진아.”

    “네. 그러게요.”

    아진 역시 후련한 마음으로 말하고 린린을 기다렸다.

    언덕 위에서는 산본의가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야 했지만 심후한 내공 덕분에 그곳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면서 몸에 녹이 슬지 않도록 무기를 휘둘렀다.

    상황이 종결된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들의 투지는 밤을 잊고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이제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이 들려왔을 때 사람들은 놀라며 그게 무슨 일인가 했다.

    아진은 자기들을 도와주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이들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범인이 잡혔습니다. 어젯밤에 야욕을 드러냈고 저희가 처리했습니다.”

    “정말…… 그런 자가 있었다는 말인가. 서 공자. 그게 누구였는가!”

    낭왕이 깜짝 놀라며 물었지만 아진도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서악이 자라고 나면 그 일이 서악의 가슴에 남게 될 터였다.

    “그것까지는 말씀을 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좀 전에 드린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는 것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각자의 무가와 문파를 두고 이리 와 주신 어르신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와 주신만큼 한시라도 빨리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모두의 얼굴에서 긴장의 빛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잘됐네. 서 공자. 사실 그 말이 맞기는 하다네. 이제는 구역도 다시 정비를 해야 하고 사파도 견제를 해야 해서 말이네. 그래도 오랜만에 이렇게 정파 무림이라는 이름으로 다 함께 서고 보니 이것도 좋군.”

    청성파의 장문인이 말했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낯빛을 보였다.

    “이곳에 와 주신 여러 어르신들의 마음은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아진의 말을 들으면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값진 보상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그들 사이에 오래 묵은 갈등이 드디어 해소된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진은 그들 사이에 있던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가주와 장로들을 보았다.

    그들과는 특히나 앙금이 많았지만 이제 그들과도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의 멸문이 되었던 남궁세가는 다시 뼈대를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천운으로 살아남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함께 지내오다가 황제에게서 가문의 비급을 받고 수련을 하며 가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옛 명성을 되찾는 일은 어쩌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무인인 그들의 실력을 말하는 것은 결국 무공이었고 고수가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 가문의 힘과 서열을 정해 주게 될 터였다.

    그동안 유명무실하게 겨우 명맥만 유지되어 오던 명문세가도 조만간 재편성되게 될 터였다.

    그 사이에 누가 더 땀을 많이 흘리는가, 누가 더 빠르게 성취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었다.

    서남에서 괴수가 나타나고 또 다른 S급 헌터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이 서로와 경쟁하며 땀방울을 흘리는 것은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

    * * *

    강호의 영웅들이 산본에 머물렀다가 떠난 것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듯했다.

    그 광풍에 휘말린 사람 중에는 랑랑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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